‘친미·친중 갈림길’서 라이칭더 택한 대만 민심…민진당 정권 재창출에도 ‘절반의 승리’
‘미·중 대리전’ 성격을 띠며 세계적 관심 속에 치러진 지난 13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대만 민심이 미국을 선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 소속 라이칭더(賴淸德) 당선인은 선거 결과에 대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대만이 민주주의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민진당은 총통 선거와 함께 치러진 입법위원(국회의원 격) 선거에서 친중 성향 제1야당인 중국국민당(국민당)에 다수당 자리를 내주면서 절반의 승리에 그쳤다. 제2야당 대만민중당(민중당)이 총통 선거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입법회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상당수 유권자가 ‘친중이냐 반중이냐’ 하는 전통적 이념 대결과 양당 구도에 반감을 표하며 실용적 중도 노선을 표방한 제3정당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라이칭더 “민주주의의 승리”…외신 “중국에 맞설 후보 선택”
14일 대만 중앙선거위원회에 따르면 전날 치러진 제16대 총통·부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라이칭더·샤오메이친(蕭美琴) 후보는 558만6019표(40.05%)를 득표해 국민당 허우유이(侯友宜)·자오샤오캉(趙少康) 후보(467만1021표·33.49%)를 91만4998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총통·부총통 선거와 함께 치러진 입법위원 선거에서는 국민당이 전체 113석 중 52석을 확보해 원내 다수당이 됐고, 민진당이 51석을 차지했다. 나머지 의석은 민중당(8석)과 무소속(2석)이 나눠가졌다.
라이 당선인은 당선 확정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2024년 세계 ‘대선의 해’에 전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첫 번째 선거에서 대만이 민주진영의 첫 번째 승리를 가져왔다”면서 “대만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민주주의의 편에 설 것을 선택했으며, 대만은 국제 민주주의 동맹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진영과 중국을 한 축으로 하는 권위주의 진영의 대결에서 친중 국민당을 누르고 민진당이 세 번 연속 집권에 성공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외신들도 비슷한 관점에서 대만 총통 선거를 바라보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대만 독립을 강조해 온 민진당이 친중 국민당을 제쳤다”면서 “대만인에게 이번 선거의 핵심은 강대한 중무장 독재국 중국과 긴장 고조에 맞설 적합한 후보가 누구인지에 대한 선택이었다”고 보도했다. CNN도 “이번 선거 결과는 대만이 중국의 위협을 감수하더라도 민주 국가들과 관계를 심화해야 한다는 민진당의 견해를 유권자들이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평가했다.
불안한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와 증가하는 중국의 위협 등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투표 전날 타이베이에서 열린 민진당 유세 현장에서 만난 20대 여성 지지자는 “민주 대만의 선택을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면서 “대만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한·미·일 등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하며 우리의 선택지는 라이칭더 뿐”이라고 말했다. 타오위안에 사는 유권자 리모씨(53)도 “우리는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한데 국민당은 친중 색채가 강하다”면서 “우리는 국가의 큰 방향을 결정하는 선거에서 대만이 어떻게 갈지를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민진당, 야권 분열 반사 이익…국민당에 다수당 자리 내줘, 복합적 민심 작용
하지만 결과를 뜯어보면 이번 선거를 민진당의 온전한 승리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라이 후보는 국민당 허우 후보에 90여만표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 민진당 소속인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이 앞선 두 번의 선거에서 각각 308만여표와 264만여표 차이로 국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것과 비교된다. 사실상 민진당은 이번에 자력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기보다 야권 분열의 반사 이익을 본 측면이 강하다. 이번 선거에서는 제2야당인 민중당 커원저(柯文哲)·우신잉(吳欣盈) 후보가 예상보다 높은 26.46%(369만466표)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민진당을 지지하던 젊은층의 표심을 흡수한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통적 야당 지지 기반을 흔들고 중도층의 표심을 끌어안는데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3자 대결 구도가 아니었다면 민진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민진당이 총통 선거와 함께 치러진 입법위원 선거에서 국민당에 패배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민진당은 대만에서 8년 주기 정권 교체 징크스를 깨고 집권 연장에 성공했지만 이전 두 번의 선거와 달리 입법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국민당에 다수당 지위를 내어줌에 따라 국정 동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민진당은 과반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국정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비례대표 선거(정당 투표)에서만 8석의 입법회 의석을 확보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게 된 민중당과 적극적인 연대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린쯔리(林子立) 대만 동해대 정치학과 교수는 “민진당이 총통 선거에서 이겼지만 유권자들의 분리 투표로 입법회 최대 정당은 되지 못했다”면서 “민진당의 완전 집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안감이 컸다는 의미”라고 대만 중앙통신사에 말했다. 린 교수는 이어 “국민당의 패인은 92공식(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 명칭을 사용하기로한 양안간 합의)에 갇혀 있고, 전 세계가 디리스킹화(탈위험화) 할 때 단일 시장인 중국과의 무역 재개에 주력하는 것이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민진당은 저임금과 고용 환경 악화, 높은 집값 등으로 젊은 표심이 커원저 후보에 흘러간 상황을 인식해야 하며 향후 분배 문제 등이 라이 당선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단순히 ‘친미냐 친중이냐’, ‘민주주의냐 권위주의냐’의 선택으로 볼 수 없으며 내정과 경제 문제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김진호 대만중앙연구원 방문교수(단국대 정치학과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대만인들의 이념적 성향은 과거보다 약해진 측면이 있고 이번 선거에는 이념과 경제 문제 등이 모두 얽혀 있었다”며 “미국이 좋아서 민진당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대만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해 지금은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시 할 필요가 있다고 본 유권자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타이베이이 | 이종섭 특파원 noma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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