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냉면집에서 시를 썼다···2024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자들[인터뷰]
오랜 고통과 기다림 뒤에 찾아오는 기쁨은 두배가 된다. 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맹재범 시인, 허성환 소설가, 정우주 문학평론가는 고민과 갈등을 겪으며 문학의 길을 닦아왔다. 이제 막 등단해 새로운 문학의 길을 열어갈 이들을 시상식이 열린 지난 10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맹재범 “냉면 가게에서의 투명인간 느낌”
“따뜻한 시로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
맹재범 시인은 냉면 가게를 운영한다. 어느 날 주방에서 바쁘게 일하다가 손님들이 있는 홀을 쳐다보면, 이 식당에 자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한다. 주방과 홀 사이에는 칸막이 하나만 있다. 그는 “모두들 저쪽에서 기뻐하는데 나 혼자 여기 있는 느낌이었다”며 “생각해보니 나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당선작 ‘여기 있다’는 그렇게 나왔다.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뒤꿈치와 바닥사이에도 있는//나는 투명인간이다//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접시가 차곡차곡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그는 대학 시절 시 동아리에 참여했다. 몇번 쓰다 말았다. 문학을 꿈꿨지만 생업의 길을 갔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건 5~6년 전부터였다. 40대 들어서였다. “냉면 가게를 운영하다보니 겨울이 한가했어요. 겨울에 시간 있을 때 방 한쪽에서 식당을 바라보며 시를 썼어요. 신춘문예 응모해볼까 하고 시를 쓰는 시간이 저한테 주는 선물 같았어요.”
그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신춘문예 원고를 들고 우체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기억했다. “평택에서 아침에 원고를 봉투에 담아 우체국에 갈 때 그렇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매년 떨어졌지만 봉투를 잘 부치고 나면 올해도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원고가 우체국 직원과 집배원의 손을 거쳐 신문사에 도착하는 과정을 떠올려보면서 모든 분들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는 “시를 배운 지 오래됐다. 요새 풍토나 경향을 모르고, 시를 쓰다 보면 표현이 너무 직설적인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면서도 “따뜻한 시를 써서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소망했다.
허성환 “신춘문예가 인생의 전부였다”
방산시장 노동 경험 반영한 자전적 소설
허성환 소설가에게 신춘문예는 “인생 전부”였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컸지만 문학을 전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원하지 않는 전공으로 대학을 다니려니 즐겁지 않았다. 그는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고 소설 쓰기에 매진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문장을 잘 써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였고 좀 지나서는 문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그는 뒤늦게 중앙대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에서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소설 쓴 지 15년 됐어요. 매번 신춘문예 응모하고 떨어질 때마다 끝났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했죠. 여기서 포기하면 아무 것도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포기하지 않는 마음은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그는 2년 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이번 당선이 ‘2관왕’인 셈.
당선작 ‘i’는 방산시장에서 일하는 남편과 이제 막 임신한 아내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을 쓰는 아내는 남편이 일하는 공간에 ‘의자’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한다. 남편은 방산시장의 공용 화장실 변기를 ‘의자’로 삼아, 그곳에서 아내 뱃속의 아기 초음파 사진을 꺼내본다. 그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했다. “돈을 벌기 위해 방산시장에 갔는데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어요. 아내가 ‘언제 쉬는지’ ‘의자가 없는지’ 물어봤는데 그 물음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원래 육체노동에서 의자는 생각 안하니까요.” 소설은 ‘의자가 없으면 일터가 아니’라는 아내의 말에서 시작됐다. 순식간에 소설 구성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10일만에 완성했다. 실제 그의 아내도 임신 중이다.
그는 시상식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앞으로 정말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정우주 “슬픔을 찾아가는 천선란 소설의 매력”
“무력한 문학이 사회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
정우주 문학평론가에게 지난해 하반기는 꽤 힘든 나날이었다. 그를 가르치던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가 별세하는 등 여러 상황이 겹쳤다.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전화를 받은 날은 교수님 연구실의 장서를 정리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는 당선 통보 전화를 받은 순간을 “유독 자신이 없어 헤매는 중이었는데 이 길을 더 가도 된다고 다정한 격려를 받은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당선작 <상실의 자리로부터-천선란론>은 <랑과 나의 사막> <이끼숲> <천 개의 파랑> 등 천선란의 소설 속에 그려진 ‘인간과 비인간’의 무게를 생각하는 글이다. 그는 “평론가가 되고 싶다기보다 이 글을 꼭 써서 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냥 밝은 작품보다는 그 이면의 서늘함이나 상실, 슬픔, 고통, 균열을 말하는 작품에 끌리는데 천선란 소설이 그렇다”고 했다. “사회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빨리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데 도리어 슬픔이 유별난 곳으로 가고 싶다는 천선란 소설이 귀하게 느껴져요.”
정 평론가는 이화여대 대학원 국어국문과에서 석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국어교육과로 입학했지만 문학사를 살펴보는 일에 재미를 느꼈다. 동시대 문학을 보고 싶고, 문학과 호흡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무력하게만 보이는 문학이 오히려 사회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짝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평론가로 첫 발을 디디는 지금 그는 “학교 안에서만 공부하다가 세상 밖으로 글을 내놓는다고 하니까 두려움이나 불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며 “오히려 이 불안함을 발판 삼아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했다.
“문학은 사회의 고통과 슬픔, 어두움, 그림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수단이에요. 문학만이 지니고, 문학만이 할 수 있는 날카로운 지점이 있어요. 그런 부분을 말하고 오래 응시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쓰겠습니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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