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빅리그 종횡무진하는 손흥민·김민재·이강인·황희찬
2023년은 한국 축구 팬들에게 즐거운 한 해였다. 2022 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유럽 빅리그에서 한국 선수들의 멋진 활약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손흥민은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 100호 골을 달성하며 쉽게 깨지지 않을 대한민국 축구 역사의 대기록을 세웠다. 2023~2024시즌을 앞두고 토트넘 홋스퍼의 새 주장이 되는 경사가 있었고, 안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공격 전술에 힘입어 최근에도 꾸준히 활약하고 있다. 김민재는 33년 만에 SSC 나폴리의 이탈리아 세리에A 우승을 이끌었다. '레전드' 디에고 마라도나 시절 이후 첫 우승이기에 그 가치는 각별했다.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김민재는 2023 발롱도르 순위에서 전 세계 수비수 중 가장 높은 22위에 오르기도 했다. 스페인 라리가 레알 마요르카에서 맹활약한 이강인도 빅클럽 이적의 꿈을 이뤘다. 이강인의 행선지는 프랑스 리그앙의 명문 클럽 파리 생제르맹이다. EPL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소속 황희찬은 2023~2024시즌 그야말로 골 폭죽을 터뜨리고 있다. 20라운드를 마친 시점에 통산 10골로 리그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했다. 자신의 종전 기록이던 단일 시즌 EPL 5골을 이미 훌쩍 넘겼다.
‘토트넘 본체' 손흥민, 입지 더 탄탄해진다
손흥민(토트넘 홋스퍼)
토트넘의 새 주장 손흥민은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다. 2023~2024시즌 전반기에 리그 20경기 12골 5도움을 기록했고 컵대회 1경기에도 출장했다. 시즌 초반엔 왼쪽 윙으로 출전해 뛰어난 연계 능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동료 공격진의 답답한 골 결정력으로 4라운드 번리와 경기부터 손흥민의 위치가 최전방으로 바뀌었다. 손흥민은 최전방으로 올라간 첫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골 결정력을 뽐냈고, 15라운드 웨스트햄전까지 리그 9골을 터뜨렸다. 16라운드 뉴캐슬전부터 손흥민 위치는 다시 왼쪽 윙으로 바뀌었다. 부상과 징계로 결장 선수가 늘어나 토트넘의 무승이 길어지자 특단의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시즌 초보다 자신감이 오른 히샬리송을 다시 최전방에, 손흥민을 왼쪽 윙에 배치해 기회 창출을 맡겼다. 그러자 손흥민은 16라운드 뉴캐슬전부터 20라운드 본머스전까지 도움 3개를 기록하며 '특급 도우미' 역할을 해냈다. 특유의 득점력도 어디 가지 않았다. 윙으로 나온 5경기에서 3득점을 기록해 물오른 골 결정력을 뽐냈다. 현재 리그 12골을 기록 중인 손흥민은 득점 선두 모하메드 살라(리버풀), 엘링 홀란(맨체스터 시티)을 2골 차로 추격 중이다.
리그 후반기 토트넘 주장 손흥민의 입지는 더 탄탄해질 전망이다. 올해 상반기 이적 시장을 맞아 독일 분데스리가 RB 라이프치히 소속인 티모 베르너의 토트넘 합류가 유력한데, 그 또한 손흥민의 보조 역할에 전념할 가능성이 크다. 주전 경쟁 구도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다. 손흥민 특유의 공간 침투 능력과 골 결정력, 동료에게 간결하게 키패스를 찔러주는 센스는 독보적 수준이다. 현재까지 손흥민의 폼은 '토트넘의 본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트넘은 주전 선수 의존도가 높은 팀이다. 지난해 11월 이후 주전 수비수 크리스티안 로메로와 미키 판 더 펜, 주전 미드필더 제임스 매디슨이 빠지자 긴 시간 무승이 이어졌다. 주전들이 빠지면 공격 전개 속도와 패스 퀄리티, 수비 안정감이 모두 떨어진다. 공격진에 서는 손흥민에게 찾아오는 기회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손흥민이 아시안컵 일정을 마치고 2월 중순 돌아오면 로메로와 판 더 펜, 매디슨 등 부상으로 빠진 선수들이 다시 투입돼 경기를 뛰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그 후반기에는 다시 매디슨 패스-손흥민 득점이라는 공식이 기대된다. 손흥민과 토트넘 모두 후반기에 좋은 흐름을 이어가려면 부상 방지 및 체력, 선수 카드 관리가 필수다.
‘혼자 고생' 김민재, 팀 구조적 안정 절실
김민재는 2022~2023시즌 이탈리아 세리에A SSC 나폴리에서 뛰는 동안 대회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경기를 소화했다. 리그 15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5경기와 컵대회 2경기에서 활약했다. 라인을 극단적으로 높게 올리는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의 전술에 따라 넓은 범위를 빠르게 커버할 수 있는 김민재가 경기마다 필요했던 것이다. 나폴리의 세리에A 우승은 김민재의 '혹사' 없인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민재의 바이에른 뮌헨 이적 소식이 전해지자 팬들은 "나폴리 때보다는 쉴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뮌헨은 다요 우파메카노, 마테이스 더 리흐트라는 훌륭한 주전 센터백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팀이다. 김민재가 이들과 번갈아 출전하면 자연스럽게 쉴 타이밍도 생길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토마스 투헬 뮌헨 감독도 스팔레티 나폴리 감독 못지않게 김민재를 혹사시키고 있다. 투헬 감독 역시 라인을 극단적으로 높이는 수비 전술을 구사하는데, 이는 김민재의 활약이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우파메카노와 더 리흐트가 번갈아 부상을 당하면서 이들 대신 휴식을 취할 기회도 사라지고 말았다. 계속된 기용에 김민재는 체력적으로 힘든 기색을 드러내며 지난해 11월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다만 지난해 말 뮌헨 지역 폭설에 따른 일정 연기와 분데스리가 겨울 휴식기로 12월 한 달 동안 체력 회복에 전념할 수 있었다.
김민재가 아시안컵에 차출된 동안 뮌헨은 우파메카노, 더 리흐트의 조합으로 2월 중순까지 일정을 소화할 것이다. 이들이 그동안 경기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전반기 내내 따라다닌 잔부상을 털어낸다면 후반기 출전 빈도가 늘어날 전망이다. 물론 김민재의 주전 입지가 큰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투헬 감독은 김민재를 높은 수비 라인 전술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 김민재가 높은 수비 라인에서 생기는 뒤 공간을 빠르게 커버하고, 왼쪽으로 간결하게 전진 패스를 뿌리는 데 특화됐기 때문이다. 김민재는 후반기에도 주전 입지를 유지할 것이다. 경쟁자들이 다치지만 않는다면 전반기보다는 휴식 타이밍이 조금이나마 생길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걱정거리는 투헬 감독의 전술 지속가능성이다. 투헬 감독의 전술과 뮌헨의 아쉬운 선수 구성은 김민재가 가진 괴물 같은 능력이 더 눈에 띄는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높게 형성된 수비 라인 탓에 김민재가 커버해야 할 범위가 매 경기 비정상적으로 넓다. 게다가 수비를 도울 전문 수비형 미드필더가 없어 김민재 홀로 고생하는 형국이다.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서는 요주아 키미히는 공을 다루는 기술과 패스 능력은 일품이지만, 수비력이 장점인 선수는 아니다. 파트너로 나오는 레온 고레츠카나 콘라트 라이머도 수비 커버 능력에선 전반기 내내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김민재는 사실상 미드필더의 보호 없이 혼자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와 팀을 위해서라도 뮌헨은 구조적 안정을 찾아야 한다. 투헬 감독의 전술 변화와 선수단 보강이 절실한 이유다.
‘전천후 포지션' 이강인, 진짜 역할 찾아야
이강인은 2023~2024시즌 전반기에 리그 10경기에서 1골 2도움을 기록했고 UCL 5경기에서 1골, 컵대회 1경기에서 1골을 넣었다. 이번 시즌 출발은 좋지 않았다. 프리시즌 첫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시즌 개막 전까지 준비가 완전하지 못했다. 이강인은 시즌 초반 루이스 엔리케 감독의 눈에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지난해 9월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에 차출된 데다 부상까지 겹쳤다. 당초 주전 경쟁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이강인에 대한 엔리케 감독의 신뢰는 깊었다. 엔리케 감독이 플랜 A 전술을 다양하게 바꾸는 동안 이강인은 이곳저곳에서 꾸준히 기회를 얻었다.
이강인은 경기마다 왼쪽 윙, 좌우 중앙 미드필더, 오른쪽 윙, 최전방 공격수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다. 엔리케 감독이 이강인의 공 간수와 드리블, 전방 압박 능력을 높게 평가한 덕이다. 아시안컵 차출 직전인 1월 3일 툴루즈와 가진 프랑스 슈퍼컵 결승에서 이강인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선제골을 넣으며 경기 최우수선수(MOM)에 선정됐고, 파리 생제르맹은 슈퍼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엔리케 감독은 이강인의 다재다능함을 눈여겨보고 있다. 전반기만 봐도 감독이 주문하는 새로운 역할이 생길 때마다 이강인이 잇달아 낙점받았다. 세트피스 키커도 이강인 몫이다. 현재로선 주전 입지가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다만 엔리케 감독을 향해 축구 팬들이 갖는 의문은 "선수 파악은 이제 끝났는데 이강인의 진짜 역할은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너무 많은 포지션에 기용하다 보니 아직까지 이강인이 팀에서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특정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반기 경기 내용을 종합하면 이강인은 △왼쪽과 중앙을 오가면서 공을 배급하고 때에 따라 측면 넓은 공간으로 전진해 크로스를 올리며 △오른쪽에서 공을 잡은 뒤 오른쪽 풀백 아치라프 하키미와 연계해 전진한 다음 최종적으로 반대편 킬리안 음바페를 향해 양질의 패스를 건네고 △최전방에서 넓게 움직이는 가운데 '가짜 9번'(센터 포워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역할을 하는 선수)으로서 연계에 집중하는 선수다. 이처럼 다양한 역할을 잘 소화한 이강인이지만, 너무 잦은 포지션 변화 탓에 종종 경기력에 기복을 보이기도 했다. 리그 후반기에는 팀 성적 향상은 물론, 이를 견인할 이강인의 안정적 활약을 위해서라도 플랜 A가 완성돼야 한다. 공격을 잘하는 왼쪽 풀백 누누 멘데스가 부상에서 회복돼 돌아오고 엔리케 감독의 플랜 A가 완성됐을 때 이강인이 부여받을 역할이 무엇일지 기대된다.
‘리그 10골 기록' 황희찬, 자나 깨나 부상 조심!
황희찬은 2023~2024시즌 전반기에 리그 20경기에서 10골 3도움, 컵대회에선 1경기 1골을 기록했다. 시즌 개막 전만 해도 울버햄프턴과 황희찬이 이토록 선전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리그 개막을 일주일 앞두고 훌렌 로페테기 감독이 팀을 떠났다. 울버햄프턴은 게리 오닐 감독을 급히 선임해 새 시즌을 맞았다. 황희찬은 로페테기 전 감독의 신뢰를 받으며 경기에 자주 출전했다. 은사와도 같던 그가 팀을 떠난 후 오닐 체제에서도 선발로 기용될지 불투명했다. 실제로 시즌 초반 황희찬은 선발로 기용되지 못했다. 2라운드 브라이튼전과 4라운드 크리스털 팰리스전에 교체 출전해 골을 기록하며 조금씩 오닐 감독으로부터 점수를 따기 시작했다. 그후 선발로 나선 5라운드 리버풀전부터 10라운드 뉴캐슬 유나이티드전까지 선발 6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오닐 감독의 1순위 픽은 황희찬으로 정해졌다. 황희찬에게 자주 기회를 만들어준 페드루 네투가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탓에 득점력이 잠시 주춤하기도 했다. 하지만 13라운드 풀럼전, 15라운드 번리전에서 골을 터뜨리더니 19라운드 브렌트포드전에서 올 시즌 첫 멀티 골(2골)을 성공하며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완성했다.
전임 로페테기 감독 못지않게 오닐 감독은 황희찬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지도자다. 오닐 감독은 황희찬의 공간 침투 능력에 주목했다. 마테우스 쿠냐, 페드루 네투, 장리크너 벨레가르드 등 다른 공격 자원들에게 공 운반과 패스 연계에 치중할 것을 주문하고, 황희찬에게는 자유롭게 공간을 침투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했다. 그러자 패스를 찔러주는 동료들과 공간 침투에 나선 황희찬의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발휘됐다. 현재 황희찬은 리그 10골로 득점 순위 6위에 올라 있다. 울버햄프턴에서 그의 골 결정력을 대체할 선수는 없기에 주전 입지는 굳건하다고 볼 수 있다.
황희찬에게 당부하고픈 것은 "자나 깨나 부상 조심!"이다. 지난 시즌까지 잦은 근육 부상으로 고생한 그다. 다행히 올 시즌은 큰 부상 없이 건강하게 보냈지만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황희찬은 3라운드 에버턴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하프타임에 교체 아웃됐고, 19라운드 브렌트포드전에선 극심한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전반 종료 직전 교체 아웃됐다. 다행히 두 경우 모두 경미한 부상에 그쳐 황희찬은 이후 일정을 별 탈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리그 후반기에도 황희찬의 최대 변수는 부상이다. 전반기 내내 주전으로 뛴 데다, 거의 대부분 경기를 풀타임으로 소화했기에 근육에 많은 부담이 가해졌을 개연성이 있다. 아시안컵 기간에는 3~4일 간격으로 경기를 뛰어야 하기에 리그 후반기 체력 및 부상 관리에 영향이 미칠 수 있다. 후반기까지 부상 없이 잘 뛰어 2023~2024시즌을 좋게 마치는 게 중요하다.
임형철 스포티비·KBS 축구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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