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 교수, 페르미·오펜하이머 자리 꿰찼다…"한국선 불가능"
'美 물리학회장' 김영기 시카고대 석좌교수 인터뷰
[편집자주] 인구구조 급변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가 국가적 난제로 떠올랐다. 50년 뒤 학령인구는 현재 대비 3분의1 수준(약 280만명)으로 이공계(理工界) 인재 부족이 심각할 전망이다. 한국이 1962년부터 30년간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고도성장기를 보낸 원동력은 바로 '인적 자본'이었다. 하지만 최근 30년간 인구감소와 저성장 늪에 빠져 국가 미래는 절체절명 위기를 맞았다.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신(新) 이공계 두뇌 육성책'을 모색한다.
이 단체를 키 155㎝의 깡마른 한국인 여성이 이끌게 됐다. 김영기(62·사진)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2021년 '회장 당선자(President-Elect)'로 뽑혔고, 새해부터 회장직을 공식 수행한다. 한국인이 학회장직을 맡는 건 1899년 미 물리학회 창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김 교수의 업적을 살피면 5만명 정회원들의 선택이 놀랍지 않다. 2000년 과학저널 디스커버가 선정한 '21세기 세계과학을 이끌 과학자 20인' 중 1명으로서 '실험 입자물리학의 세계적 리더'로 소개됐고, 2004년 양성자-반양성자 충돌 실험에서 원자보다 작은 소립자의 근원을 밝히는 데 공헌했다. 세계 최고 입자물리연구소인 미국 페르미 국립가속기 연구소의 부소장(2006~2013년)을 역임했고, 대규모 국제 연구 프로젝트에서도 수차례 리더십을 발휘하며 이른바 '충돌의 여왕(Collision Queen)'으로 불린다.
하지만 김 교수는 지금의 성과를 얻기까지 "미국이라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곳의 과학계도 물론 백인·남성의 헤게모니가 공고하지만, 김 교수는 "한국보다 자유로운 연구 환경이 보장됐다"고 강조했다. 또 "연구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이민자의 문턱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과거 한국에 자리 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달리 선택한 이유다.
▶2021년 9월 차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듬해 부회장, 차기 회장을 거쳐 새해 회장직을 수행한다. 회장 직을 잘하기 위해 미리 '회장단'으로 일을 배우고, 임기 내 과제를 미리 준비한 셈이다. 새해는 미국 물리학회 125주년이다. 물리학의 역사가 깊은 만큼, 쓰이는 용어들은 오래된 감이 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다양성·포용성을 갖춘 물리학 용어를 정립하려 한다. 또 물리학계에는 국경을 초월하는 공통 숙제가 많다. 1월 아메리카 대륙을 시작으로 아태, 중동·아프리카 등 물리학계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힘쓰겠다.
-'비주류'인 한국인 여성학자가 학회장으로 추대된 이유는 뭘까.
▶회원들이 '생색'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미 물리학계도 여전히 백인·남성이 주류다. 아시아계·여성은 극소수다. 그럼에도 내 연구를 꾸준히 하다 보니 그들에게 리더십을 보여줄 소중한 기회가 생겼고, 회장직까지 추천받은 것 같다. 그들의 격의 없는 응원 덕분이다.
▶그럴 리가. 다만 문제를 감춰두지 않고 드러내 바꾸려고 하는 게 미국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이곳은 '이민자의 나라'다. 적어도 한국을 비롯해 내가 경험한 다른 나라보다는 기회의 문이 넓다고 느꼈다. (경북 경산 출신의 김 교수는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석사 학위까지 국내에서 취득했다. 이후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박사 학위를, 이후 미국을 비롯해 일본·유럽 등지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먼 미래를 계획하는 성격이 못 된다. 고등학교 때는 수학을 좋아했는데 대학교 3·4학년 때 물리 전공하는 선배들과 친해졌고, 졸업이 다가오자 취업과 공부 중 고민하다 '재밌는 거 하자'고 생각해 유학까지 왔다. 미국에 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당연히 한국에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연구소에 들어가는 길을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 미국을 택했나.
▶수학을 좋아해 처음에는 입자물리학 이론 전공을 고려했지만, 미국에 와보니 실험이 재미있었다. 한국은 아무래도 실험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점이 걸렸다. 또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내 세대만 해도 국내 대학의 연구실은 상하관계가 분명했다. 예컨대 한국의 '조교수(assistant professor)'는 말 그대로 선배 교수를 돕는 게 핵심인데, 이곳에선 자신의 독립적 연구가 우선이고 '어시스트'는 그다음이다. 이곳 환경이 내 연구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해보고 안 되면 돌아가지'라는 마음가짐도 도움이 됐다.
-한국의 청년들에게 이런 자율적 선택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선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 문과·이과를 선택하고, 대학에 가면 전공을 선택한다. 그다음에 진로를 바꾸는 걸 어려워한다. 과학기술 인재가 부족하다고 걱정하는데, 예컨대 한국에선 고등학교 때 물리를 선택하지 않으면, 나중에 물리 분야 인재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 셈이다. 그런데 물리를 전공하면, 연구자 외에는 뾰족한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공이 직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우수한 이공계 인재가 의대로 향한다.
▶내 주변에도 의사들이 있는데, 돈은 많이 벌겠지만 굉장히 힘든 직업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보장이 된다'는 생각에 쏠림이 심각하다. 이는 단지 학부모와 학생들 탓만 할 수는 없다. 서울의 집값을 감당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진 않으니까. 청년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주지 않는 교육, 과학기술 연구를 선택하기 어려운 경제적 여건. 이런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과학기술 인재 확보는 쉽지 않다.
▶세계 각국의 물리학계를 만나보면 미국은 물론 유럽과 남미도 고등교육 환경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교실에서 '뉴턴의 법칙'만 가르치지 말고, 새로운 과학기술 트렌드를 선보여 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보다는 저출산이 한국의 가장 큰 문제다. 과학기술 인재를 키우려 해도 애초에 청년의 수가 적다.
▶미국처럼 이민자들에 대한 문턱을 낮추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도 과학기술 분야 선진국인 만큼, 해외 과학기술인재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연구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이들이 쉽게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문화적인 '벽'을 허무는 것도 중요하다.
-국가 자원을 투입해 애써 키워놓은 인재가 자국으로 돌아가면 손해 아닌가.
▶잘못된 생각이다. 해외 인재들이 오랜 기간 한국에서 연구해도 좋겠지만, 혹여 떠나더라도 한국의 과학기술 대사 역할을 하게 된다. 내 경우에도 뿌리는 한국이지만, 미국에서 오랜 기간 연구활동을 하면서 여러 기관과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만큼 '빚을 졌다. 보답해야 한다'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많은 이들이 한국에 '마음의 빚'을 지게 해야 한다.
-해외 한인 연구자들이 고국에 기여할 방안은 없을까.
▶과학기술 선진국에서 활동하는 한인들이 늘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해외 유학을 했다면, 이제는 초중등 교육부터 해외에서 받는 청년들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이들 중 상당수는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기억하며, 고국을 위해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할 것이다. 한국이 추진하는 국제협력 연구의 핵심 자원들이다. 다만 연구자마다 처한 환경은 제각각인데, 한국에선 연구과제 참여를 위해 요구하는 조건이 일률적이다. 이를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해 준다면, 해외 한인 연구자들이 고국에 기여할 수 있는 더 나은 흐름이 조성될 것이다.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 역시 가속기로 입자물리 실험을 지속하는 '학생'이다. 연구라는 건 마라톤과 비슷하다. 그저 실험 자체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꾸준히 이어가야지, 성과를 내기까지 '앞으로 얼마가 남았나' 초조해하면 연구 못 한다.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빨리 지친다. 매일 하루하루 배움에 고마워하며, 조금씩이라도 축적되는 지식에 보람을 느낀다. 기초과학은 그런 기다림이 필요하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성과를 기다려주는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변휘 기자 hynew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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