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53] 금발, 파란 눈, 세련된 패션 감각, 넘치는 교양과 진보적인 사회적 태도까지. 그는 그야말로 모든 걸 다 갖춘 남자였습니다. 아버지는 한 나라의 왕이었지요. 집안·재력·외모 삼박자가 완벽한 신이 내린 사람. 언론은 이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습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왕세자였던 에드워드의 이야기입니다.
근데 신은 그에게 모든 걸 주진 않으셨습니다. 여자 보는 눈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데려온 신부는 미국 출신의 사교계 명사. 거기에 이혼 전력이 있고 지금도 결혼해 남편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영국 왕이 수장으로 있는 성공회는 전 배우자가 살아있는 이혼한 사람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미래의 왕이 이혼녀와 결혼한단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요.
영국 역사는 이 ‘세기적 연애’로 인해 풍랑 속으로 휘말립니다. 그리고 결국 다시 번영으로 나아갔지요. 어떤 사랑은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고 때론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에드워드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그의 연애가 국가적 위기를 불렀지만, 그 뒤를 이은 조지6세와 엘리자베스 2세가 이를 다시 바로잡았기 때문입니다. 100년 전 한 남자의 사랑이 불러온 후폭풍을 사색하는 시간입니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그 남자, 에드워드
“세계가 사랑한 남자, 에드워드.”
에드워드는 1894년 6월 영국 왕세자였던 조지5세와 메리 왕비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미래의 왕으로 낙점된 왕세손은 어린 시절부터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대영제국의 차기 지도자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호수를 담은 듯한 파란 눈이 뿜어내는 분위기도 관심을 더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릴 적의 영롱함을 세월의 풍파 속에서 잃곤 합니다. 에드워드는 달랐습니다. 외모가 아름다웠던 데다가 국가에 대한 봉사 정신도 투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3살 무렵 에드워드는 왕립 해군대학(The Royal Naval College)에 입학해 해군 입대를 소망합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미래 지도자로서 품격을 보여줬습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에드워드는 참전을 열망하지요. 모든 지도자가 몸을 사릴 때, 그는 자신을 최전방으로 보내줄 것을 당당히 요구합니다. 국무장관 키치너가 이를 막아섰지만, 에드워드는 포탄이 떨어지는 전선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었지요.
왕만큼 인기 있는 왕세자 에드워드
잘생겼는데다 현신하는 정신까지. 그는 점점 국가의 얼굴로 떠오릅니다. 1920년대부터는 조지 5세가 장남 에드워드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에드워드는 영국의 빈곤 지역을 방문해 시민들의 삶을 살폈고, 여러 식민지에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곤 했었지요.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듭니다. 고귀한 신분, 잘생긴 얼굴, 또 ‘미혼’이라는 타이틀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었지요. 미국의 패션잡지 멘스웨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미국의 청년들은 세계 그 누구보다 웨일스 왕자(에드워드)의 옷에 관심이 많다.”
유혹에 넘어가는 에드워드
에드워드 주변 그러나 끊임없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와 잠자리하려는 여성들, 도박이나 술을 권하는 사교계의 지인들이었지요.
우려는 곧 현실이 됩니다. ‘모범생’ 에드워드가 처음으로 ‘사고’를 치게 되지요. 1917년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서부 전선에 척탄병 근위 장교로 일할 때 마가렛이라는 파리의 고급 매춘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1년 뒤에 그들은 헤어졌지만, 그의 방탕을 예고하는 사건과 같았지요.
30대에 접어든 에드워드는 난봉꾼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유부녀를 애인 삼은 것도 여러 차례. 왕실 어른들은 결혼으로 미래의 왕이 자리를 잡기를 바랐지만, 그는 결코 발목 잡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조지 5세는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지 않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남겼을 정도였지요.
1931년 10월, 가을의 바람이 불던 어느 날. 그는 성에서 또 다시 파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미국 출신의 귀족 부인이자 애인이었던 델마 퍼니스와 함께였습니다. 그녀는 에드워드에게 자기 친구인 월리스 심프슨을 소개 시켜 주었지요. 심프슨 부인은 한 번의 이혼을 거치고 재혼한 몸인데도 사교계 파티에 빠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유유상종이라 하지요.)
배신이 싹을 틔웠습니다. 두 사람이 델마 퍼니스 몰래 바람을 피웠습니다. 월리스 심프슨은 에드워드와 사랑을 나눔으로써 두 사람을 한 번에 배신합니다. 친구 델마 퍼니스와 남편 어니스트 심프슨을 동시에요. 영국 왕실은 심각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유부녀 킬러가 영국의 미래 왕”이라는 조롱이 현실이 되어서였습니다.
유부녀 킬러가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
“저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에드워드는 진지해보였습니다. 장난삼아, 성욕에 못 이겨 유부녀를 건들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월리스 심프슨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 보였고, 그녀의 앞에서는 제법 의젓한 남성으로 있었지요.
사귄 지 3년째 되는 해에는 그녀를 왕실에 초대하기도 했을 정도였지요(물론 왕실 사람들은 달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런던 경찰청 산하 특별 부서는 보고서에서 “그녀가 왕세자를 완전히 사로잡았다”고 적었습니다. 또 다른 보고서에는 “심프슨 부인이 왕세자 몰래 잘생긴 자동차 딜러와도 연애를 하고 있다”고 썼지요.(그야말로 막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왕의 자리에 오르자 결혼도 도마 위에...
1936년 1월 20일이었습니다. 왕 조지 5세가 승하합니다. 왕세자는 이제 에드워드 8세로 즉위합니다. 유럽은 히틀러의 등장으로 전쟁 위기에 몰려 있었고, 새로운 왕은 유부녀와 연애 중인 위기의 상황. 대영제국은 길을 잃고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재무장관이자 후에 총리 자리까지 오르는 네빌 체임벌린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녀는 왕세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돈과 보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를 착취하는 완전한 파렴치한이다.”
에드워드는 공인으로서 신분을 망각했습니다. 오직 자신만의 감정을 중시하며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추구하고자 했었지요. 심프슨 부인의 현 남편과의 이혼 소송이 끝나자 마자 결혼하겠다고 공언합니다.
당연히 영국 왕실 뿐만 아니라, 정계 엘리트들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1936년 11월에는 총리 스탠리 볼드윈을 불렀습니다. “심프슨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에 볼드윈은 대답합니다. “그 결혼은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올 것입니다.” 왕으로서, 영국 국교회 수장으로서, 책무를 다하라는 준엄한 경고였습니다.
“미국 출신 이혼녀인 심프슨이 유려한 성적 기술을 활용해 에드워드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사도마조히즘 관계다”라는 풍문도 함께 돌았지요. 재밌게도 미국 대중들은 이 결혼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미국 평민이 영국 왕의 부인이 된다는 ‘영화같은 스토리’에 감동했기 때문이었지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렸다
“저는 왕으로서 마지막 의무를 다했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에드워드 8세가 즉위 11개월 째인 1936년 12월 전격 퇴위를 발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가장 초조한 눈으로 바라본 건 동생 조지였습니다. 형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부담감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왕라는 엄청난 왕관을 준비 없이 써야 했던 것이지요. 유럽 왕실이 줄줄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는 조지 6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합니다. 1936년을 ‘세 왕의 해’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아버지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말더듬이 왕 조지 6세...국민을 통합시키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었지만, 멀리 보면 축복과 같았습니다. 새로 즉위한 동생 조지 6세가 국민 통합의 아이콘으로 활약한 덕분이었습니다. 형과는 달리 달변도 아니었고, 말더듬증까지 있던 ‘쑥맥’ 조지는 그러나 끈기와 인내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으로 괴로워 하는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직접 말더듬증까지 고쳐가면서 대중 앞에 섰었지요(영화 ‘킹스 스피치’의 내용입니다).
1939년 나치 독일,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일본과 전쟁을 선포합니다. 폭격기가 런던 상공을 날아다니는 힘든 나날 속에서도 조지 6세는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버킹엄 궁전이 폭격당할 때도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왕실이 먹던 고급식단을 중단하고 영국 정부가 배급하는 음식을 함께 먹기도 했었지요.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왕실의 뜻이었습니다.
조지 6세의 리더십에 국민들은 감동합니다. 왕실에 대한 지지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총리 처칠과 조지 6세의 리더십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대중은 외쳤지요. “우리는 왕을 원합니다. 신이시여 왕을 구원하소서.(God, Save the King)” 에드워드 8세 치하였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지요.
그러나 전쟁의 스트레스는 조지 6세를 좀먹고 있었습니다. 종전 후 그는 폐암을 앓았고 동맥경화로 다리를 절단할 위기까지 겪었지요. 장녀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수행해야 했습니다. 1956년 조지 6세는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이제 엘리자베스2세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습니다.
빌런은 영원한 빌런이었다
에드워드는 묵묵히 왕실을 응원하면서 살았을까요. 한번 ‘빌런’은 영원한 ‘빌런’이었습니다. 퇴위 후 오스트리아에서 살다가 이듬해인 1937년 10월 심프슨 부인과 독일을 방문하지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초대에 응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나치 정권으로부터 ‘왕’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지요. 두 사람은 나치에 상당한 호의를 느꼈지요. 히틀러는 “에드워드 퇴위만 아니었다면 영독관계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에드워드 치하의 영국을 자신의 맘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지요. 비평가들이 에드워드를 ‘나치킹’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생이자 영국의 왕 조지 6세가 독일과 분투하고 있을 때, 그는 여기저기 피난다니기 바빴습니다. 프랑스 남부, 스페인, 포르투갈까지. 젊은 시절 헌신과 용기로 가득찬 에드워드는 이제 더 이상 없었습니다. 1940년 12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었지요. “독일의 논리적 지도자인 히틀러가 옳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히틀러와 평화를 중재해야 한다.”
사랑을 위해 왕도 포기한 사건이 불러온 나비효과
에드워드와 심프슨 부인은 전후에도, 파티를 다니며 살았습니다. 영국 왕실은 그에게 어떤 역할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왕실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한 건 동생 조지 6세와 또 다른 여동생 메리의 장례식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식에는 가지 않았지요. 그가 남기고 간 빈자리를 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요, 영국 왕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요.
유부녀와의 결혼을 위해 왕까지 포기한 에드워드의 삶. 그 선택이 영국의 역사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건 역사의 또 다른 아이러니입니다. 역사는 동화책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P. S.에드워드와 심프슨의 결혼한 지 약 80년이 지나고, 영국 왕자 해리가 미국의 이혼녀 메건 마클과 결혼합니다. 차남인 해리는 왕위를 포기할 필요는 없었지만, 또 다시 왕실과의 갈등을 불렀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또 다른 가면을 쓰고 반복됩니다.
<네줄요약>
ㅇ1930년대 영국 왕세자 에드워드는 전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왕세자였다.
ㅇ여자를 좋아한 그는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 유부녀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졌다.
ㅇ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해 왕실 위기를 초래했다.
ㅇ하지만 동생 조지 6세가 즉위 후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이다.
<참고 문헌>
ㅇ필립 지글러, 왕 에드워드 8세 전기, Knopf,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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