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죄만큼만 처벌받는 것이 그렇게 어렵나

한겨레21 2024. 1. 1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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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구경거리로 발가벗겨지는 삶 유도하는 ‘극장권력’… 시민의 존엄한 삶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선균씨는 포토라인에 세 번이나 서야 했다. 이씨 쪽은 약물검사에서 음성이 나온 다음인 세 번째 조사는 비공개로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경찰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진은 2017년 서울중앙지검 현관 앞에 마련된 포토라인에 마이크들이 놓인 모습. 한겨레 자료

배우 이선균의 사망 소식을 듣고 끝이 없는 절망과 사방이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이 함께 몰려와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안 되는구나. 깊이에서는 달랐지만 절망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어떤 거대한 성벽이 있고 그 벽은 엄청난 기득권 주류가 아니라면 도저히 넘을 수 없음을 새삼 느꼈다. 그 벽은 바깥에서 아래에 깔린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짓밟으며 한없이 비웃고 있었다. 네까짓 것들이 감히.

‘벌거벗은 삶’의 위태로움

그의 죽음에서 느끼는 애처로움은 배우 최진실의 죽음 때와 비슷했다. 한편으로는 무대 위에서의 화려한 삶이란 게 얼마나 허망한지를 새삼 느끼고, 다른 한편으론 잘잘못과 상관없이 대중 앞에 사생활이 낱낱이 드러나 구경거리 먹이로 던져지는 ‘벌거벗은 삶’의 위태로움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스타’라는 이유로 그들의 삶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동물원 원숭이로 취급된다.

이선균의 죽음에 두 죽음이 겹쳐진 가장 큰 이유는 “과연 이 사회에서 존엄한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확 떠오르면서 느끼게 되는 답답함과 절망이었다. 불가능하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더라도 가능하지 않고, 대중의 추앙을 받으며 화려함의 정점에 오르더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한쪽에서는 자신이 통제하던 바로 그 권력에 의해,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을 추앙하던 바로 그 대중에 의해 한순간에 발가벗겨져 차갑게 내동댕이쳐진다. 여기서는 존엄한 삶이란 불가능하다.

도대체 이 사회에서 존엄이 보호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누구도 감히 발가벗기지 못할 정도로 성벽의 가장 안쪽에 있으면서 대중과 철저히 멀리 떨어져 권력과 언론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들 대부분이 안다. 그런 사람이 없지 않음을 말이다. 확실히 있다. 모든 것을 구경거리로 던지는 권력과 언론조차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하고 확실히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완전한 기득권자, 아니 지배자다.

반대로 보면 복숭아씨처럼 단단하게 감싸 보호받는 그 한 줌의 ‘천룡인’을 제외한 나머지의 삶은 파리 목숨이다. 문자 그대로 발가벗겨진 삶이다. 구경거리로 발가벗겨진다. 구경거리로 발가벗겨지기 위해 사생활은 박탈당하고 일거수일투족이 생중계된다. 그러나 이선균 사건에서는 이 발가벗겨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가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발가벗겨지는 것에서 처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과잉’됐다는 점이다.

이선균 사건에서 많은 사람이 가장 한탄한 부분은 이 점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그 지은 만큼만 처벌받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그리고 그 죄지은 부분이 법적으로 처벌받아야 하는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지, 비난받더라도 그의 친밀성 범위 안에 있는 사람에게서만 비난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전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의 규칙이 증발해버렸다. 근대사회가 가진 가장 큰 규칙인 자신이 상관할 영역이 아닌 일에는 철저히 거리를 두는 ‘시민적 무관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한 파괴만이 죗값을 치르는 방법이 되는 과잉된 세상

이 과잉된 세상에서는 죄의 성격과 범위와 상관없이 어떤 죄든지 혐의만 주어져도 확증이 되고 죽을죄가 돼버린다. 오로지 죽는 것을 통해서만 죗값을 치를 수 있다. 어떤 죄든 죄에 대해 이 사회가 바라는 유일한 것은 철저한 파괴다. 인생은 끝장나야 하고 온 가족은 도륙이 나고 패가망신해야 하고 멸문지화를 당해야 한다. 그러니 일이 발생하면 실제 죄의 유무나 경중과 상관없이 무조건 무마부터 하려는 것이 당연하다.

일이 이렇게 된 첫째 이유를 공권력에서 찾는 것은 당연하다. 권력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죄의 유무와 경중에 맞게 응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 응징이 과잉되지 않도록 통제해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법’의 목적은 과잉 복수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필연적으로 과잉될 수밖에 없는 복수에 동일성, 즉 비례성이라는 선을 그어 폭력이 걷잡을 수 없이 전방위로 번져나가는 것을 막아 사회를 보호하려 한다.

지금 한국의 공권력은 어떠한가? 이번 죽음에서도 보이듯이 과잉 응징을 통제하기는커녕 수사 과정 자체가 이미 죄의 유무나 경중과는 상관없이 사회적 응징이 되게 했다. 가히 ‘극장권력’이라 할 만하다.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고대국가인 느가라를 분석하면서 과시적 의례로 주목을 끎으로써 통치하는 국가를 ‘극장국가’라 불렀다. 이 개념으로 인류학자 권헌익과 정병호는 북한을 극장국가로 분석했다. 극장국가 개념은 이벤트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을 넘어선다. 오히려 이벤트/의례가 곧 권력이며 권력의 목적이다.) 이 개념을 살짝 빌린다면 한국의 공권력이야말로 극장권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선균은 포토라인에 세 번이나 서야 했다. 그의 변호인에 따르면 첫 번째 조사와 두 번째 조사는 공개조사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였지만, 약물검사에서 음성이 나온 다음인 세 번째 조사는 비공개로 해달라고 두 번이나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 내부에서 이미 공개출석으로 정했다는 입장을 완강하게 고수하며 거부했다고 한다.

2023년 12월10일 방영된 한국방송(KBS) 옴부즈맨 프로그램에서 KBS가 ‘단독’ 보도한 이선균씨 녹취록 뉴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박희봉 KBS 보도본부 사회부 팀장은 “사회적 관심이 큰 사안”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한국방송 갈무리

현행 ‘경찰 수사 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은 ‘소환, 조사, 압수수색, 체포, 구속 등의 수사 과정이 언론이나 그 밖의 사람에 의해 촬영, 녹화, 중계방송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 규칙에 따르면 특별한 이유 없이는 사건 관계인을 포토라인에 세우지 않아야 하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이 규정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고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인천경찰청은 굳이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어차피 노출될 일이고 안전사고가 염려돼 그리 결정했다고 했지만, 스스로도 궁색한 변명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극장권력’이 된 공권력, 시민에겐 ‘관객’ 배역 줘

그런데도 왜 굳이 그를 포토라인에 세웠을까. 연예인도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공인이라는 둥 여러 말이 있지만, 극장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답이 나온다. 가장 스펙터클한 그림이 나오는, 전시하기 좋은 사람이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을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은 과시하기 좋은 선정적 이벤트이다. 이걸 절제하고 통제하면 (다소 이상화해서 말한다면) 근대적 공권력이지만, 참지 못하고 나서서 연출하면 이벤트로 통치하는 극장권력이다. 이선균의 변호인이 지적한 ‘모욕주기식 공개 출석’과 ‘피의 사실 공표’가 만연하는 이유다.

다소 과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번 사건을 보면 권력은 이런 ‘쇼’를 연출하는 것이 마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범죄의 유무와 경중을 분별하고 거기에 맞춰 제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쇼를 통해 국가 구성원이 각자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 그 역할을 하도록 배역을 나눠주고 연기에 몰입하게 하는 연출의 역할 말이다. 백성에게 분배된 역은 ‘열광하는 관객’이라는 엑스트라다. 이를 통해 각자의 현재 질서는 각본대로 흘러갈 뿐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으로 고정된다. 여기에 국가와 사회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시민은 없다. 엑스트라만 있을 뿐이다.

물론 다수 시민은 이 ‘열광하는 관객’이라는 배역에 충실했다. 언론은 시민들이 이 배역에 충실할 수 있도록 갖은 선정적 기사를 아낌없이 퍼날랐다. 에스엔에스(SNS)나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관심경제 미디어만이 아니다.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전통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앞장서서 보도 가치가 전혀 없는 사생활을 알 권리라는 명목으로 보도했다. 이선균과 유흥업소 실장의 녹취록을 ‘단독’ 타이틀을 달고 보도한 한국방송(KBS)이 대표적이다. 이런 보도는 대중에게 마치 여론으로 심판하는 권력을 가진 주권자 위치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그 위치야말로 ‘열광하는 관객’이라는 엑스트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극장에서는 드라마가 상영된다. 드라마는 현실의 일대일 축척 반영이 아니다. 드라마는 언제나 현실을 결핍/생략하거나 초과한다. 결핍하거나 초과하기 때문에 드라마에는 ‘극적 긴장감’이 생기며 사람들이 열광하게 된다. 주목을 지속시키고 열광을 끌어내기 위해 드라마는 생략하고 초과한다. 그렇기에 불가피하게 인간의 모든 면이 이야기이고 드라마라 하더라도 적어도 권력에서는 드라마가 절제돼야 한다. 권력, 특히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공권력은 ‘드라마’가 아닌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죄지은 만큼 벌준다”라는 공권력의 원칙이 살아 있게 되고 사람들은 드라마(의 열광과 공포)에서 빠져나와 일상을 안심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건조하고 밋밋한’ 권력을 요구하자

다른 말로 하면, 국가의 권력이 움직이는 통치 장소는 결코 극장이 돼서는 안 된다. 그 장소에서는 필연적인 드라마에서 벗어나 한없이 사실로 다가서려는 ‘건조하고 밋밋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관객이 아닌 시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력이 밋밋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권력이 연출하고 국가가 극장이 되고 처벌이 드라마가 되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 시민의 역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부터 관객이 되는 것을 중단하고 거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존엄을 보호할 수 있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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