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촉발시킨 ‘하얀 축복’···남북전쟁 몰고온 ‘하얀 저주’ [역사를 바꾼 사물들]

김기철 기자(kimin@mk.co.kr) 2024. 1. 1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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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19 - 자본주의 네트워크를 완성한 목화

대선을 앞둔 미국 정치권에서 전혀 뜻밖의 역사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1861~1865년 있었던 남북전쟁의 원인 중에 흑인 노예 문제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미국 공화당 경선 현장마다 후보들은 “‘남북전쟁의 원인’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우경화된 일부 유권자들이 후보들에 대한 사상검증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이 같은 질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것은 재앙이었다”, “만약 협상이 됐다면 에이브러햄 링컨이 누군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괜찮다”고 했다. 전쟁까지 안가도 협상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고 그랬다면 링컨은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이에 앞서 니키 헤일리 후보도 “남북전쟁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한 유권자 질문에 “기본적으로 정부가 어떻게 운영되느냐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더불어,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과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모호하게 답했다.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제 폐지 결정보다는 단지 정부 운영 방식에 대한 견해차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일이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링컨의 정당’ 공화당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플 뿐이다.

이런 답변들에 대해서 역사학계에선 “초등학교 수준의 허튼소리이자 무지한 발언”(데이비드 블라이트 예일대 교수)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미국 남북전쟁은 1861년 북부를 중심으로 한 연방(Union) 11개주로 구성된 남부 연맹(Confederacy)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었다. 노예제 기반 농업이 중심인 남부와 공업이 주력인 북부 간 갈등이 커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노예제에 대한 생각과 경제적 이해관계의 차이가 전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니까 남북전쟁이 일어난 그 근저에는 남부지역의 경제가 흑인 노예의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점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이다.

1750년 미국의 흑인 노예 인구는 20만명 수준이었다. 흑인 노예 인구가 불과 5년만인 1775년 70만명으로 늘어나더니 1860년대 인구조사에 따르면 390만명까지 늘어났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등 일부 남부주에서는 흑인 노예의 인구가 백인 인구를 앞질렀다.

그렇다면 1750년과 1860년 사이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어떤 산업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의복혁명을 가져온 하얀 열매
목화는 구대륙과 신대륙 모두에서 자라는 전지구적인 식물이었다. 주로 남위 35도에서 북위 37도의 넓은 지역에서 자라는 아열대성 식물이었지만 생육기간 동안 온도가 섭씨 10도 아래로 떨어져서는 안되고 200일 이상 서리가 내리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자라지 않았다.

목화에서 실을 뽑아 옷감으로 만드는 기술은 이미 5000년전부터 인도에서 개발되어 활용되어 왔다. 이 기술은 인도와 이집트, 중국 등 고대 문명에서는 공통적으로 개발되어 발전되어 왔고 신대륙에서도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유럽인들이 멕시코의 아스테카를 점령했을 때 그곳에서는 이미 면화 꾸러미와 염색한 천을 공물로 바치는 풍습이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32년 잉카제국을 공격했을 때 잉카의 도시 카하마르카의 상점들에 가득 쌓인 어마어마한 양의 면직물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각 지역별로 면화산업이 개별적으로 발전했지만 19세기 이전까지 가장 선진적인 면직물 산업을 이룬 곳은 역시 인도였다. 최상급 인도산 면직물의 품질은 유럽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다. 13세기 여행객 마르코 폴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면직물을 코로만델 해안에서 보았다”고 했는데 코로만델 해안은 인도 남동부 벵골만(Bay of Bengal)에서 첸나이(Chennai)로 이어지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 면화가 중국의 농촌지역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고려의 사신인 문익점의 눈에 면화가 들어온 것은 이런 상황과 연관이 있다. 1433년에는 백성들이 면포로 세금을 납부했고 군인과 관료들의 옷도 면직물로 만들기 시작했다.

면화와 면직물 생산을 위한 기술 혁신도 인도와 중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솜에서 씨를 제거하는 원통형 씨아, 면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 수직식 직기, 디딤판 직기 등도 모두 아시아 지역에서 발명된 것이다.

인도나 중국에서 면화로 면직물을 만드는 작업은 초기에는 주로 가내수공업 형태로 이루어지다 대규모 공장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14세기 명대에 ‘도시직소조’라는 면방직 공장이 출현했다. 직소조에는 수천명의 노동자가 집단 고용되었다. 인도에서도 직업 방직공이 출현해 무굴 궁정은 물론 해외에 수출할 고품질의 모슬린을 생산했다. 1750년경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되는 면화는 세계 생산량의 70%에 육박했다.

목화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지리상의 발견은 면화 산업의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 무역상들은 인도 벵골만의 다카항으로 몰려와 면직물 교역을 요구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621년 5000여필의 인도 면직물을 수입했는데 40년 뒤에는 수입량이 5배 늘어났다. 특히 영국이 네덜란드와의 향신료 전쟁에서 패배한 뒤에는 인도산 면직물이 동인도회사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이 되었고 1776년에는 전체 무역량의 75%를 차지했다.

유럽의 무역상들은 인도에서 바니아라는 현지 무역상인을 고용해서 내륙의 농민이나 방직공장에서 면직물을 확보했다. 1676년 동인도회사의 다카 상관은 직물의 구매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이에 따르면 영국 상인들은 무역선이 도착하기 6개월전에 바니아와 도급 계약을 맺고 자신들이 원하는 물량과 디자인, 가격, 배송일자를 상세히 지정해 물건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바니아들은 그 아래 또 여러 명의 중개인과 계약을 맺었고 이들이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개별 농민이나 방직공과 계약을 맺고 직물을 납품받았다.

유럽 수출물량이 늘어나면서 인도 대륙의 면직물 생산도 늘어났다. 하지만 생산 방식의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방직업 종사자들만 늘어났다. 방직공들은 수세기 동안 해오던 방식을 고수했다. 수요가 증가해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에 새로운 생산 방식을 도입할 필요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도산 면직물이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자 이 수입품을 대체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적인 욕망이 영국에서 꿈틀댔다. 특히 1600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네덜란드인들이 영국의 여러 도시에서 면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물론 인도산 면직물과 비교하면 품질이 조악한 수준이었다.

영국 정부는 자국의 면직물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호무역 조치들을 내렸다. 1685년에는 ‘인도산 켈리코와 그 외 인도산 리넨, 세공비단’에 10%의 관세를 부과했고 1690년에는 20%로 올렸다. 1701년에는 염색 면직물 수입을 금지했고 1721년에는 인도산 캘리코의 착용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자국의 유치산업 육성을 위해서 보호무역의 장벽을 높이 쌓는 것은 자본주의 종주국 영국에서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이다.

보호무역 장벽 안에서 영국의 직물업자들은 생산방식의 혁신을 시도했다. 1784년 맨체스터 변두리의 조용한 계곡에 새뮤얼 그레그라는 한 상인이 수력방적기로 리는 최신식 기계를 이용한 공장을 세운 것이다. 그레그가 이 공장에 투자한 금액은 3000파운드 정도였는데 이 돈이 바로 산업혁명을 촉발시키는 시드머니가 됐다.

2000년을 이어온 인도와 중국의 면방직업이 일부 도구의 발명이 있기는 했지만 기술적 혁신이 거의 없었던 반면 영국의 면화산업은 기술의 혁신과 함께 시작됐다. 이 때를 산업혁명의 시발점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이때부터 테그놀로지가 경제의 발전을 이끄는 핵심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초기 뮬방적기 모습
18세기 인도의 방적공들이 면화 45kg을 방적하는데 5만시간이 소요됐다면 1790년 영국의 방적공들은 뮬방적기 한 대로 1000시간만에 생산할 수 있었고 5년 후인 1795년에는 300시간으로 줄어들었고 1825년에는 리처드 로버트의 자동 뮬방적기로 135시간이면 가능해졌다. 불과 30년만에 생산성이 370배나 증가하면서 영국의 노동비용이 인도보다 낮아졌다. 이에 따라 영국산 면사의 가격이 하락했고 얼마 안 가서 인도에서 제조된 제품보다 더 저렴해졌다.

1830년 후반부터는 인도에서도 자국산 면직물 대신 영국산 면직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면방직 산업의 경쟁력이 완전히 역전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770년대 영국 경제에서 부가가치 기준으로 고작 2.6% 수준이었던 면방식 산업은 1831년 22.4%까지 증가했다. 6.7%를 차지한 철강 산업이나 7%를 차지한 석탄 산업을 앞질러 영국 경제의 중심산업이 됐다. 페르낭 브로델이 주장했듯이, 면산업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국가경제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수치상으로 보면 19세기 중반까지는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여전히 면산업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영국의 면화공급지가 된 미국 남부
면방직 산업이 영국의 중심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영국 본토에는 사실상 면화 재배지가 없었다. 당시 최대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면화가 가장 많이 생산됐지만 면방직 산업 강국이었던 인도는 원료 생산부터 완제품까지 자국내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다른 원료 공급지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중심지였던 카리브해 지역이 먼저 목화로 재배 작물을 바꾸기 시작했다. 1760년 서인도제도에서 영국으로 수출되는 면화가 약 300만 파운드 규모였는데 30년만인 1790년 1300만 파운드로 4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영국내 공장들의 목화 원료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흑인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던 미국 남부 지역도 면화 산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남부의 담배 농장들이 적극적으로 목화로 품종을 바꾸었다.

곧바로 미국 남부 지역이 면화 생산의 최적지임이 확인됐다. 강수량과 강수 형태가 적절했고, 서리가 내리지 않는 날 수 역시 최고의 조건이었다.

미국이 영국과 싸운 독립전쟁이 끝나고 2년 후인 1785년 미국산 면화를 실은 배가 리버풀 항구에 들어왔다. 조지 워싱턴 1대 대통령은 “그 새로운 원료(면화)의 증가가 미국의 번영에 무한한 결과를 가져올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목화밭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모습
조면기 발명이 가져온 변화
1793년 엘리 휘트니(Eli Whitney)는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뒤 조지아주 서배너(Savannah)의 목화 농장에서 일을 돕고 있었다. 변호사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필요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목화 농장은 대농장이었지만 일하는 방식은 노예의 노동력에만 의지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목화솜에서 씨를 제거하는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 당시 목화씨 제거에는 회전하는 막대 사이에 목화를 통과시키는 방식의 롤러라는 기계를 사용했는데 능률이 떨어질 뿐 아니라 미국 남부 해안 지역에서 자라던 장모(long staple) 품종의 목화씨만 분리할 수 있었고 내륙에서 재배하는 단섬유(short staple) 품종의 목화씨는 빼내지 못했다. 일일이 흑인 노예들이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휘트니는 간단하게 목화씨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착안하게 됐다. 둘레에 작은 철사 톱니로 덮여있는 실린더를 회전시키면서 목화를 그 사이로 통과시키면, 그 톱니들이 내부 벽의 좁은 홈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씨를 빼내는 방식이었다. 조면기(cotton engine)로 불리는 이 간단한 기계는 미국 역사는 물론 세계 역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휘트니 조면기 모습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는 과정이 일종의 병목 현상을 유발했는데 병목 현상이 풀리니 더 많은 목화 경작지가 필요해 진 것이다. 조면기 발명 후 면화를 재배할 수 있는 토지의 가격이 세배나 급등했고 면화 농장의 연간 수입은 두배나 늘었다.

면화 경작지가 늘었다는 것은 더 많은 흑인 노예가 필요해졌다는 얘기다. 1790년대 조지아주의 노예 인구는 두배로 늘어 6만명에 육박했고 사우스 캐롤라이나 목화 농장의 흑인 노예는 1800년 7만명으로 늘었다.

목화 농장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조지아에서 계속 서쪽으로 확장돼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아칸소, 텍사스로까지 확대됐다. 특히 이와 같은 면화 경작지 확대는 미국의 영토 확장과 함께 이루어졌다. 1803년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로부터 사들이면서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났고, 1819년에는 에스파냐로부터 플로리다를 얻었고 1845년에는 텍사스를 합병했다. 1850년 미국에서 생산된 면화의 67%가 조면기 개발 전에는 미국의 영토가 아닌 곳에서 재배됐다.

휘트니 조면기가 개발되기 전인 1790년에 미국이 면화생산량은 68만kg으로 전세계 생산량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시 대부분의 면화는 인도에서 생산되었다. 미국 면화생산량은 1800년 1655만kg으로 늘었고 1820년에는 7597만kg에 달했다. 1802년 영국 면직물 산업에서 미국은 가장 중요한 원료 공급지가 되었고 1857년에는 면화생산량이 중국과 맞먹었다.

미국 남부의 면화 농장주들이 세계 어느 다른 지역의 면화 재배자들과 달랐던 점은 토지와 흑인노예에 대해 무제한의 장악력을 행사했고, 면화 산업 발전으로 확대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선거제도에 남아 있는 노예제의 흔적
미국 남부의 백인 노예주들은 흑인 노예들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들의 재산권도 인정하지 않았고 어떠한 선택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을 때는 흑인 노예를 ‘인간’으로 대우했다. 정확히는 인간으로 60%만 인정했다. 그것이 이름하여 ‘5분의 3 타협안’이다.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제헌회의가 열렸을 때다. 각주 대표들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안을 수개월동안 논의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북부주 대표들은 투표권을 백인 남성에게만 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백인 인구 숫자에서 북부주와 상대가 되지 않았던 남부주 대표들이 반대했다.

전체 인구의 40%가 노예였던 남부 주들은 흑인 노예 한 명도 백인 한 명의 5분의 3으로 계산해 줄 것을 요구했다. 흑인 노예에게 직접 투표권을 주는 대신 흑인 노예 1명을 5분의 3명으로 계산해 인구에 비례해 주(州)마다 선거인단을 할당하고,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뽑는 간접 투표 방식으로 타협했다.

이 같은 제도를 바꾸기 위한 시도는 몇차례 있었다. 1816년 대통령을 전체 유권자 투표로만 뽑자는 수정안이 의회에 처음 제출됐다. 그러나 남부 주들은 백인 남성 유권자들에 더해, 노예들도 5분의3인으로 계산돼 선거인을 할당 받는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남북전쟁 후 노예해방으로 1870년 흑인이 투표권을 갖게 된 뒤에도, 남부 주들은 ‘선거인단’ 간접 선거를 고집했다. 남부 주들을 장악한 백인 민주당 정부는 흑인의 투표권 행사를 다양한 방법으로 막으면서도, 이제 전체 유권자에 흑인까지 온전한 1인으로 포함돼 할당된 선거인 수는 더 많아졌다. 역설적으로, 남북전쟁 이전보다 오히려 남부주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 커졌다.

이해하기 어려운 미국의 대통령 선거 방식에는 이처럼 미국 남부주 노예주들의 흑인 노예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실제 득표수에서는 이기고도 선거인단 수에서는 뒤져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는 앨 고어나 힐러리 클린턴 같은 사례가 나오고 있다.

면화산업의 번창이 가져온 비극, 남북전쟁
면화 산업의 발전으로 미국 남부의 경제가 흑인 노예의 노동력에 점점더 크게 의지하게 되면서 노예제도 유지는 남부의 농장주들에게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더구나 미국의 영토가 서쪽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새로 편입된 주들에 노예제를 인정할 것이냐고 하는 문제는 남부와 북부가 치열하게 다투는 문제가 됐다. 표면적으로는 흑인 노예에 관한 문제였지만 내용상으로는 정치적 영향력의 문제였다.

1820년 남부와 북부는 미주리협정 (Missouri Compromise)이라는 타협을 통해서 북위 36도 30분의 북쪽에 위치하면 자유주로, 남쪽에 위치하면 노예주로 편입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850년 협정(Compromise of 1850)에 따라서는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유타와 뉴멕시코는 노예주로 구분됐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영화 <노예12년>의 한 장면
자유주와 노예주가 아슬아슬한 균형상태를 유지해 오다가 1850년대 중반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제정되면서 노예 문제가 갈등을 고조시켰다. 이 법은 미주리주·아이오와주 서쪽에서 로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지대를 남북으로 양분해 남쪽에 캔자스, 북쪽에 네브래스카를 조직하고 이 지역에서 노예제도의 인정 여부는 주민 의사에 따라 결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법의 제정으로 ‘미주리 타협’이 무효가 되면서 자유주로 인정된 지역에까지 노예제도가 들어설 가능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후 이 법의 이상과 현실 간 괴리가 표면화하면서 노예제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갈등이 심화했다.

결국 1856년 5월 캔자스에서 두 진영 간에 유혈 충돌사태가 벌어졌고 186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북부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1860년 노예제 폐지를 주창한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측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노예제 문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 근간에 흐르는 것은 남부와 북부의 산업구조의 차이와 노예제 유지와 폐지가 가져올 경제적 이해관계의 문제였다.

역사의 행로를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구 위의 여러 생물들과 자원, 물건들이 결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은 인류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사물들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분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기자 페이지(https://media.naver.com/journalist/009/75254)를 구독하면 빼먹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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