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이라는 이름의 감옥서 10년 유폐…인목대비 “광해군 목부터 쳐라”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1. 1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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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 밖에 세워진 왕실공간, 한양의 별궁(別宮)
경희궁 정문 흥화문. 경희궁은 인조의 부친 정원군의 집이었지만 광해군이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믿고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 고종때 경복궁을 짓는데 경희궁 전각을 가져다 썼으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의 주요 서식지가 됐다. 일제강점기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박문사가 경희궁 흥화문을 매입해 문으로 썼다. 1988년 경희궁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14대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1584~1632)는 광해군(1575~1641·재위 1608∼1623)의 사주를 받은 대북파 모함으로 아버지 김제남(1562~1613)과 외아들 영창대군(1606~1614)이 살해되고 자신도 폐서인이 돼 서궁(경운궁·慶運宮)에 갇힌다. 궁중수필 <계축일기>에 의하면, 서궁생활은 감옥과 같아 의식주 모두가 부족했다. 식량을 주지 않아 수수, 상추, 가지 등을 직접 농사지어 근근히 연명했다. 천을 잘라 일일이 꼬아서 짚신을 대신했고, 나무를 깎아 신을 만들었다. 쓰레기도 내보내지 못해 악취가 진동하고 구더기가 들끓었다.

그렇게 버틴 10년의 세월, 1623년(광해군 15) 반정이 터졌고 이괄, 이덕형이 인목대비를 모시러 갔지만 대비는 믿지못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능양군(인조·1595~1649·재위 1623~1649)이 말을 타고 직접 찾아가 두번 절한뒤 엎드려 죄를 청했다. 대비는 그제야 “그대는 (선조의) 종자이니 대통을 물려받아 마땅한데 어찌 죄를 청하는가”라고 했다. 대비는 “광해군 부자의 목을 쳐 죽은 부모 형제와 아들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했지만 인조는 자기도 뜻대로 못한다고 했다. 인목대비는 능양군을 승인했고 인조는 경운궁 서별당에서 교서를 반포하고 즉위했다.

조선왕실, 도성내 별궁 두고 왕손 거처·혼례·제사공간 등 다양하게 활용
인목대비 애환이 서린 경운궁은 중구 정동 덕수궁을 이른다. 애초 이 곳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 이정(1454~1488)의 사저였다. 선조는 1593년 음력(이하 음력) 10월 3일 몽진을 떠난지 1년 6개월만에 환궁하나 경복궁 등 궁궐과 고위 관료들의 저택이 전쟁으로 모두 불타고 없었다.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 장수들이 주둔했던 남별궁과 남산 기슭의 필동, 정동 일대 집들만 남아 이 중 정동의 월산대군 저택을 임시거처(정릉동 행궁)로 삼았다. 선조는 정궁을 복구하려고 했지만 전후 재정이 여의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608년(선조 41) 2월 1일 행궁의 정전에서 승하했다.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의 이어는 1615년(광해군 7) 4월에서야 이뤄진다. 창덕궁으로 옮겨가며 행궁은 경운궁이라 호칭했다.

조선시대 궁궐은 왕이 공식활동과 일상생활을 하던 법궁(法宮·또는 정궁)과 화재·재난이 발생해 왕의 거처를 옮겨야할 사태에 대비한 이궁(離宮)의 양궐 체제를 갖췄다. 이와 별도로, 궁궐밖 도성에 왕실공간을 뒀는데 이를 “별궁(別宮)”이라고 한다. 별궁은 왕실에서 독립해 나간 왕자나 공주, 후궁의 처소이지만 이는 다시 궁궐이 되기도 하고, 죽은이의 사당, 가례공간 또는 관청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됐다.

경운궁은 왕자의 사저였다가 궁궐로 사용된 사례다. 마찬가지로, 종로 신문로 2가 경희궁도 처음엔 인조의 부친 정원군(선조의 5남·1580~1619)의 집터였다. 광해군은 부왕 선조의 견제와 냉대를 받으며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라 의심병이 도졌다. 즉위후 임해군 옥사, 계축옥사, 김직재 옥사 등 무수한 옥사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했다. 그런 그는 미신을 맹신해 궁궐공사를 남발하고 국고를 탕진했다. 광해군은 경복궁을 대신해 정궁으로 쓰던 창덕궁을 흉궁이라고 여겨 꺼렸다. <광해군일기> 1613년(광해 5) 1월 1일 기록에 의하면, 광해군이 술사를 불러 “창덕궁은 큰일을 두번 겪었으니 있고 싶지 않다”고 고심을 털어놓았다. 두번의 일은 단종과 연산군이 폐위된 사건이라고 실록은 설명한다. 술사는 “(창덕궁의) 기운이 빠졌다”며 “서둘러 옮겨야 한다”고 광해군을 부추겼다.

경희궁은 인조 부친 집터···광해군, 미신에 빠져 강제로 빼앗아
광해군은 창덕궁 옆에 창경궁을 지으라고 재촉했지만 정작 완성되자 멀리했고, 또다시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건설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에 현혹돼 그 자리에 새궁궐을 세우고 경덕궁(慶德宮)이라고 했다. 집을 강제로 빼앗긴 정원군은 송현궁(저경궁·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이사가야만 했다. 광해군은 그러나 경덕궁에 들지도 못한채 반정으로 쫓겨났고 정원군의 장남 인조가 새롭게 등극해 ‘왕의 기운이 깃든’ 경덕궁에서 정사를 봤다. 경덕궁은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이름이 변경된다.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을 위해 훼철되기까지 동궐인 창덕궁·창경궁과 나란히 서궐로서 역할을 했다.

정원군의 집은 경희궁이었지만, 그 아들 인조는 분가해 종로 경운동에서 살았다. 인조의 능양군시절 별궁은 상어의궁(上於義宮)으로, 교동초등 일원으로 추정된다. 인조의 2남 효종(1619~1659·재위 1649∼1659)의 저택 하어의궁(어의동본궁)은 효제초등 자리였다. 이곳은 중종이 진성대군 시절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표] 조선시대 도성 내 주요 별궁
임금이 입궐전 살던 ‘잠저’, 별궁의 전형적 형태
임금이 입궐전 살전 집은 특별히 ‘잠저(潛邸)’라고 한다. 임금과 왕비의 아들로 궁궐 안에서 태어나 제왕학을 공부하며 성장하고 즉위해 임금 노릇을 하다가 언젠가 승하하면 왕실 흉례를 통해 종묘에 모셔지는게 조선 임금의 이상적인 인생 경로다. 그러나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해 궁궐 밖에 거처를 마련해서 살고 있다가 왕위를 계승한 임금이 의외로 다수다. 사실, 잠저는 별궁의 전형적 형태다. 잠저는 “용이 났다”는 뜻으로 용흥궁(龍興宮)이라고도 했다. 중종이나 인조처럼 반정으로 왕위를 차지한 임금들은 인생의 일부를 민간에서 보냈고 당연히 그들의 아들들 역시 궐밖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다. 왕세자 경쟁에서 밀려났다가 나중에 왕위를 차지한 영조의 잠저, 직계 후사가 없어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철종의 잠저 등 그 성격도 가지각색이다. 잠저는 세조 영희전(중구 저동), 선조 도정궁(종로 사직동), 광해군 이현궁(인의동), 영조 창의궁(통의동), 고종 운현궁(운니동) 등 여러 장소가 알려져 있다.

영희전은 수양대군의 잠저이자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셨던 진전(眞殿)이다. 명동성당 동쪽 삼일대로 건너편 지역이다.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은 정희왕후와 혼인하며 출궁해 여기서 의경세자(1438~1457), 예종(1450~1469·재위 1468~1469), 의숙공주(1441~1477)를 낳았다. 의숙공주가 혼인한 후 집을 공주 부부에게 줬다. 1615년(광해군 5) 태조와 세조어진을 모시고 남별전(南別殿)이라 했고 이후 원종(인조 부친 정원군) 영정이 추가됐으며 숙종때 영희전으로 개칭했다. 영조때 숙종어진, 정조 때 영조어진, 철종 때 순조어진이 봉안됐다. 일제강점기 영희전 터에 경성 혼마치경찰서가 들어서 광복후 서울중부경찰서가 됐고, 남은 땅도 영락교회로 바뀌며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영조, 왕자시절 어머니와 창의궁서 거주···재위기간 131회 찾아 고향주민 접대
경복궁 서쪽 창의궁은 효종의 4녀 숙휘공주(1642~1696)의 옛집으로, 숙종이 구입해 4남 연잉군(21대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에게 하사했다. 연잉군은 1712년 대궐을 나가 이 집에서 어머니 숙빈을 모시고 살았다. 영조가 창의궁에 거주한 기간은 12년이었다. 영조는 옛고향인 창의궁에 131회나 행차해 동네주민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창의궁은 1910년 동양척식회사 사택이 지어지며 헐렸다. 운현궁은 고종(1852~1919·재위 1863~1907)의 잠저이자 실질적 권력자 흥선대원군 이하응(1821~1898)의 자택이다. 흥선군은 1840년(헌종 6)께 기존 가옥을 매입해 이곳으로 옮겼다. 이사 당시의 집은 규모가 작고 초라했다. 고종은 1852년 이 집에서 탄생했고 12년 뒤인 1864년 왕으로 등극했다. 운현궁은 대대적 신축을 통해 궁궐에 버금가는 규모와 화려한 의장을 갖춘다.
고종의 잠저 운현궁 中 양관 건물. 1912년 전후로 운현궁(종로 운니동) 동편에 서양식 외관의 양관을 건립했다. 양관은 흥선대원군 손자 이준용의 저택이다. [서울역사박물관(미국 드류대학교 도서관 소장 연합감리교회 아카이브)]
대군, 왕자·군·공주, 옹주 등 왕실자손, 후궁들의 별궁으로는 안국동별궁(인조 딸 정명공주 집·종로 인사동 서울공예박물관), 누동궁(철종의 부친 전계대원군 궁·익선동), 용동궁(명종의 장남 순회세자의 궁·수송동), 창성궁(영조 10녀 화유옹주 집·창성동), 죽동궁(순조 장녀 명온공주 집·관훈동), 자수궁(세종 후궁 거처·옥인동), 순화궁(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 궁·인사동) 등이 있다.

<경국대전>은 왕실자손 집의 규모를 제한했지만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실록에 따르면, 현종대 효종의 4녀 숙휘공주(1642~1696)와 6녀 숙경공주(1648~1671)의 저택을 서촌 인경궁 터에 신축하면서 지나치게 크게 지어 거센 비판을 받았다. 1664년(현종 5) 10월 15일 <승정원일기>는 숙경공주 집안에는 이층의 누각까지 있다고 지적한다.

경국대전은 왕자·공주 집 크기 제한했지만 초호화 건축 논란 거듭
남별궁은 태종이 차녀 경정공주(1387~1455)에게 내려 소공주택(小公主宅)이라고 했다. 소공동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다. 1583(선조 16) 집을 크게 늘려 의안군 이성(1577~1588)에게 주면서 남별궁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명나라 장수 이여송·양호가 머물렀고 인조 때 중국사신 숙소로 썼다. 1897년(광무 원년) 환구단을 세웠지만 1913년에 해체되고 지금은 조선호텔이 서 있다.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빈(공회빈), 혜경궁 홍씨, 신정왕후 속궁이던 용동궁은 민씨 척족의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 (Paul Georg von Mollendorff·1847~1901), 영친왕 모친인 엄비(1854~1911)가 소유하다가 1906년(광무 10) 명신여학교(숙명여대 전신)가 설립됐다.
환구단에서 바라본 남별궁 자리의 조선호텔. 남별궁은 공주와 왕자의 집, 중국사신 숙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1897년 환구단이 세워졌고 1913년 일제의 의해 조선호텔이 지어졌다. [국립민속박물관]
자수궁은 세종의 후궁들, 세조와 예종의 후궁들, 폐비 윤씨, 단경왕후,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 등 후궁들이 살았으며 조선후기 이후 비구니들이 거처하기 시작해 그수가 한때 최대 5000명에 달했다. 종로 옥인동 종로보건소 옆 군인아파트가 자수궁 자리다. 순화궁은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주택이었다가 이완용을 거쳐 1918년에 요릿집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인수해 태화관으로 고쳐 사용했다. 현재 태화빌딩, 하나로빌딩이 자리하고 있다.
왕실사당도 별궁의 일종, 정조 부친 모신 경모궁 336회 참배
임금의 생모 또는 생부라 하더라도 그 스스로 왕비, 왕이 아니었다면 종묘의 부묘(祔廟)는 불가했다. 왕실의 주요 인물이었지만 사후 종묘에 봉안되지 못하면 궁밖에 사묘(祠廟·사당)을 뒀다. 이 역시 별궁이다. 대빈궁(경종 모친 희빈 장씨 사당·종로 낙원동→궁정동), 육상궁(영조 모친 숙빈 최씨 사당·궁정동), 경모궁(정조 부친 사도세자 사당·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뒷편) 등이 궁밖 사묘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해 창경궁 동문을 통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 두차례 아버지를 모신 경모궁을 참배했다. 재위 25년간 정조가 경모궁을 다녀간 것은 무려 336회나 된다. 1924년 경모궁 일원에 경성제대 의학부가 들어섰고 한국전쟁 때 남은 건물마저 불탔다.

종로 옥인동 자수궁 터. 자수궁은 후궁들이 살았으며 조선후기 이후 비구니들도 거처했다. 종로보건소 옆 군인아파트가 자수궁 자리다. [배한철 기자]
별궁은 왕실예식장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혼례는 신부의 집에서 거행했지만 왕비의 친정은 궁궐급 격식을 곧바로 구비하기 힘들어 비어있는 별궁 중 왕실의례를 치를 수 있는 공간(가례별궁)을 미리 확충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에 인접한 효종의 잠저 하어의궁은 인조 계비 장렬왕후 조씨, 숙종 계비 인현왕후 민씨,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씨 등 국왕 혼례 뿐만 아니라 세자빈, 세손빈을 맞는 가례가 연속으로 마련됐다.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1735~1815)는 가례별궁 시절이 무섭고 서러웠다. 그녀가 쓴 <한중록>에 의하면, 혜경궁이 별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고 궁인 둘을 데리고 낯선 곳에서 자려니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왔지만 성격이 엄한 최상궁이 “나라 법” 운운하며 막았고, 어린 신부는 박절하고 서러운 맘으로 별궁에서의 첫 밤을 보내야만 했다.
대형 필지 별궁터, 도시화과정서 우선 개발되며 대부분 훼손
종로 궁정동 육상궁. 청와대 좌측편에 위치한 육상궁은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 사당이다. 1929년까지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6명의 신위가 추가로 봉안되면서 칠궁으로 불리고 있다. [배한철 기자]
오늘날 별궁은 안타깝게 대부분 흔적없이 사라졌다. 별궁은 서울 도심속에 위치하고 면적도 넓었다. 그러다보니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학교, 병원, 관공서, 군부대 등 대형 필지가 요구되는 시설들에 최우선적으로 잠식돼 버렸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2. ‘대궐밖의 왕실, 한양의 별궁’. 서울역사박물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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