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날까지···" 명퇴도 정년도 없는 '휠체어 출근' [하상윤의 멈칫]
인권운동가인 이규식씨의 휠체어는 여전히 혜화역 승강장에 멈춰 서 있었다. 지난 8일 오전 6시 40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동대문 방향 승강장 5-2. 중증 뇌병변 장애인 이씨는 출근객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일찌감치 현장에 도착했다. 시민들을 가득 실은 지하철은 주기적으로 역사를 오갔고, 이씨는 말없이 천장을 응시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내내 비었던 승강장은 출근시간을 앞두고 경찰과 지하철 보안관 200여 명으로 채워졌다.
“특정장애인단체의 불법 시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승강장이 혼잡할 수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특정 장애인단체 불법 시위로 인해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지하철이 승강장을 오갈 때마다 "장애인 단체의 불법 시위에 의해 승강장이 혼잡하다"는 안내 방송이 역사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내용의 안내가 되풀이될수록 ‘장애인들이 구태여 아침 일찍 나와서 ‘선량한 일반 시민’의 출근을 방해하고 있다’는 인식은 강화되는 듯했다.
까치발을 세워 지하철 보안관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기자 혼잡을 야기하는 존재로 지목된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날 지하철 선전전에는 이씨를 포함한 휠체어 장애인 둘과 비장애인 활동가 네댓 명이 참여했다. 승강장을 채운 대부분은 경찰과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들이었다. 오전 8시를 넘기자 압도적인 수의 지하철 보안관들이 ‘방패’를 앞세워 이씨와 동료들을 에워쌌다. 보안관들이 든 방패는 사실 안전매트이다. 애당초 이 장비는 휠체어 장애인이 안전하게 지하철에 탑승할 수 있도록 지하철역 곳곳의 틈을 메우는 등의 용도로 제작됐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엉뚱하게도 안전매트는 장애인의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틈을 막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공권력은 특정 조건에서 더욱 강하게 작동하곤 한다. 그 대상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이거나, 지켜보고 감시하는 눈이 적을 때 그러하다. 지하철 보안관들 뒤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유독 고성을 내지르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는 서울교통공사에서 고객안전지원센터장을 맡고 있는 인물인데, 준공무원임에도 장애인 활동가들을 향해 삿대질을 해가며 "뗑깡(뇌전증, 간질) 부리지 말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말미엔 용산(대통령실)이나 광장으로 나가라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그가 계속해 소리치는 동안 언어장애를 가진 이씨의 목소리는 묻혔다. 이씨와 활동가들은 이날 특별교통수단(장애인콜택시) 예산 증액 건과 '서울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노동자 해고 건으로 선전전을 진행하고자 계획했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인 이씨는 이날도 경찰에 의해 혜화역에서 강제 퇴거당했다. 시민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현장을 지켜온 이씨에게 혜화역은 특별한 공간이다. 그는 1999년 6월 승강장으로 가는 계단 경사면에 설치돼 있던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다 추락사고를 당했다.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공사 측은 장애를 가진 이씨에게 책임을 돌렸다. 1년 넘는 공방 끝에 법원은 이 대표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혜화역에는 전국 최초로 양방향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와 바닥을 보면 이곳이 이동권 투쟁의 현장임을 알리는 동판이 설치돼 있다.
이 대표는 20년 넘게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저항하는 동안 사람들 인식이 많이 변했다고 했다. 그는 “예전엔 ‘왜 병신들이 나와서 싸우고 있어. 집에나 있을 것이지’라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면, 요즘은 ‘아... 장애인들이 나와서 싸우는구나, 무슨 일이지’라고 받아들이는 시민들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보통사람들이 일상에서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차별과 착취일지도 모른다”며 “그 차별을 드러내고 저항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지난 2일부터 일주일에 걸쳐 이규식 대표의 휠체어를 따라 함께했다. 마지막 날 밤 문득 이 대표에게 은퇴에 관한 생각을 물었다. “나의 운동(저항)엔 은퇴가 없을 것 같다. 집회에 나가야만 싸움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엘리베이터만 타도 차별을 마주하고 싸움을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언제쯤 안 싸워도 존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해봤다. 결국 내가 죽어야 은퇴다.” 나의 어리석은 질문에 그는 간명하게 답했다.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하상윤 기자 jony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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