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주역들 권세 누리고… 참군인·가족은 비극적 삶 [심층기획]

이강은 2024. 1. 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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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실제 인물 ‘극과극’ 삶
사리사욕만 채운 반란군
전두환·노태우, 박정희 비호 아래 ‘펄펄’
10·26 사태 이후 반란… 최고권력 탈취
신군부, 국가요직 차지 ‘부귀영화’ 얻어
반기에 대가 치른 진압군
장태완 사령관, 진압 실패 후 강제 예편
정병주 특전사령관, 야산서 사체로 발견
김진기 헌병감은 군복 벗고 섬에서 농사
최후까지 고통받은 혈연
김오랑 소령 전사 후 노모·형 잇단 비극
남편 명예회복 사활 건 아내마저 의문사
장 사령관 아들, 조부 산소 인근 변사체로

“울분이 치민다.”

지난해 11월22일 개봉한 후 지금까지 130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울의 봄’이 ‘전두환·노태우 신군부’가 주도한 쿠데타의 흑역사를 다시 소환하고 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12일 오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9시간 동안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군사반란을 소재로 만든 영화다. 영화적 상상력이 일부 가미되긴 했지만 사실(史實)에 근거한 것이어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을 순식간에 12·12 군사반란의 현장으로 데려간다.
영화에는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군인의 본분을 저버리고 국가 안보마저 등한시한 ‘정치 군인’들의 뻔뻔한 행태가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반란을 저지해야 할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군 지휘부는 무기력하고 어이없는 대응으로 일관하다 결국 쿠데타 성공에 일조한다. 이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객석에선 분노의 감정이 담긴 탄식과 한숨이 터져나온다. 젊은층에선 이 영화를 관람한 후 스트레스로 치솟은 심박수를 찍어 올리는 ‘심박수 인증 챌린지(심박수로 분노 정도 표시)’까지 유행했다.
무능력한 군 최고 지휘부를 대신해 군사 반란군과 용감하게 맞섰던 소수의 군인은 관객들에게 위안을 준다. 배우 정우성이 맡은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이나 김준엽 헌병감(김성균 분), 공수혁 특전사령관(정만식 분), 오진호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정해인 분)이 그들이다. 이들의 실제 모델은 각각 장태완(육군종합학교 11기) 소장, 김진기(갑종장교 6기) 준장, 정병주(육군사관학교 9기) 소장, 김오랑(〃 25기) 소령이다. 안타깝게도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대장·육사 5기)을 비롯해 군사 반란군과 대척점에 있었던 이들과 그 가족의 삶은 통한과 비극으로 점철됐다. 반면 쿠데타 주역들은 정권을 잡은 뒤 군사반란을 ‘혁명’으로 포장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소장·육사 11기)과 노태우 9사단장(〃) 등 신군부 세력들은 대부분 쿠데타 정당성을 주장하며 역사를 호도하고 있다.
◆쿠데타 진압 군인들은 치욕당하고 비극

12일 진압군 측의 회고록과 평전, 12·12 관련 국회 국정조사, 수사·재판기록 등에 따르면, 장태완 사령관은 진압에 실패한 뒤 보안사 용산 서빙고 분실에서 40여일 고문을 받고 강제 예편됐다. 6개월간 보안사 감시 아래 가택연금도 당했다. 충격을 받은 부친은 곡기를 끊다시피 하다 1980년 4월 눈을 감았다. 2년 뒤에는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입학한 아들마저 할아버지 산소 근처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통한의 심정으로 쿠데타 세력에 대한 처벌운동에 나선 장 사령관은 1993년 김영삼(YS) 문민정부가 쿠데타 세력 단죄에 나서면서 응어리가 가셨지만 이미 심신은 무너져내린 뒤였다. 그는 2010년 79세로 세상과 작별했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부인도 2년 후 ‘미안하다’는 유서를 쓰고 목숨을 끊어 주변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12·12는 어떤 명분도 없이 전두환 소장 개인의 야망과 그를 추종하는 사조직(‘하나회’)의 이익을 위하여 구실을 만들어 일으킨 저질의 반란이었다.” 당시 전두환 체포에 실패한 김진기 헌병감이 1993년 남긴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1980년 스스로 군복을 벗은 김 헌병감은 지방에서 농사를 짓다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의 5공화국이 출범하자 아예 섬으로 들어가 버렸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1월 정병주 사령관과 함께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했다. 그는 노태우 정권이 제안한 이런저런 자리도 거부했다고 한다. 김영삼정부 때 정승화 총장 등과 함께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반란 주도세력 34명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했다. 2006년 74세로 눈을 감았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더프레스 제공
‘특전사의 대부’로 불리는 정병주 사령관은 12·12를 계기로 ‘비운의 사령관’이 됐다. 그는 생전에 “(그토록 아끼던) 부하들이 (쿠데타가 발생한)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하여 반역하거나 피신한 것에 허망함을 느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 사령관이 각각 제1·3·5공수여단장(준장)으로 데리고 있던 박희도(육사 12기)·최세창(〃13기)·장기오(〃12기)가 반란군 핵심으로 가담했기 때문이다. 셋은 ‘별’을 달도록 힘써준 은인이자 직속 상관인 정 사령관보다 육군 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의 우두머리인 전두환의 명령을 따랐다. 정 사령관은 김오랑 소령과 함께 반란군 병력에 저항하다 총상을 입었고,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다음 강제 예편됐다.
한동안 보안사 감시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신군부의 치부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러던 1989년 3월 어느 날 경기도 양주 송추유원지 부근 야산에서 목 맨 사체로 발견됐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관계 당국은 건강 악화와 사업 실패 후유증에 따른 비관 자살로 처리했지만,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의 돌연한 죽음은 ‘자살로 위장한 타살’이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든 그의 묘비에는 ‘육군소장 정병주’라고만 적혀 있다. 한 유족은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전한 바 있다.
12·12 사태와 이후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김오랑 소령(중령 추서). 더프레스 제공
홀로 정 사령관을 지키며 반란군과 교전하던 중 서른다섯 나이에 전사한 김오랑 소령의 경우는 더 비극적이다. 막내 아들의 전사 소식에 충격을 받은 노모는 2년 후 숨지고, 울분 속에 살던 큰형님마저 그 이듬해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순애보 같은 사랑을 나눴던 아내(백영옥)마저 의문사했다.
안구 질환이 있던 백씨는 남편이 숨진 뒤 충격으로 시력이 더욱 나빠졌고, 이듬해 부산 친정으로 가서 지내던 중 실명했다. 시각장애인이 되어서도 봉사단체를 이끌며 남편의 명예 회복에 사활을 걸었고, 1990년에는 야당 김대중(DJ) 총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김 소령 사후 10년 만에 중령 추서를 이끌어낸 백씨는 그해 12월 전·현직 대통령 전두환·노태우와 최세창, 박종규(육사 23기·후배 김오랑과 사이가 각별했지만 반란 당시 최세창 여단장의 명령으로 정병주 체포조를 이끌었다)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에 나섰다. 신군부를 향한 최초의 법적 대응이었다. 하지만 백씨는 1991년 6월 새벽, 봉사단체 건물 아래 주차장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유서도 없는 의문투성이 죽음이었지만 경찰은 실족에 의한 추락사로 결론냈다. 시신은 화장돼 봉안시설에 안치됐다가 연고자의 갱신 요청이 없어 임시보관소로 옮겨졌고, 2009년 부산시립묘지 무연고자 묘역 터에 뿌려졌다.
12·12 사태와 이후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김오랑 소령(중령 추서)의 아내 백영옥. 더프레스 제공
정승화 총장은 12·12 직후 해임되고 서빙고 조사실에서 나체 상태로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이듬해 계급이 가장 낮은 이등병으로 불명예 전역한 뒤 국군교도소(일명 ‘남한산성’)에 수감됐다. 1988년 노태우정부 출범 후에야 사면복권되고 군적을 회복했다.

◆쿠데타 세력과 후손들은 부귀영화

영화에서 전두광(전두환, 황정민 분)은 반란 가담자들을 ‘내 옆에서 떨어지는 콩고물 받아먹으려는 자들’로 규정하며 그들 입에 콩고물을 가득 넣어줄 것이라고 친구 노태건(노태우, 박해준 분)과 약속한다. 실제 그랬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한 전두환과 노태우. 세계일보 자료사진
12·12로 군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이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해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했다. 전두환은 ‘초고속 셀프 진급’으로 대장을 달고 예편한 뒤 그해 8월부터 1988년 2월까지 간접선거로 제11·1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노태우는 내무부 장관과 집권당(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총재를 거쳐 1987년 직선제 대선에서 YS와 DJ 분열을 틈 타 제13대 대통령에 뽑혔다. 하나회를 이끌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한 두 사람이 박정희가 시해당한 10·26사태를 계기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잇따라 집권한 것이다. 그 덕에 신군부 핵심 상당수가 많은 ‘콩고물’을 받아먹었다. 이들은 국회의원과 장관, 합참의장, 육참총장,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 감사원장, 국세청장, 공기업 사장 등 국가 요직과 권력을 차지하며 권세와 부귀를 누렸다.
이들은 김영삼정부 들어 ‘노태우 4000억 비자금’이 폭로되고 12·12와 5·18 관련자 처벌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법적 심판을 받았다. 전두환·노태우·황영시·정호용·허화평·이학봉·이희성·장세동 등 신군부 핵심 16명이 1996년 반란죄와 내란죄, 뇌물수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대법원은 1997년 4월17일 전두환에게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871억원 미납), 노태우에게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완납)을 확정했다. ‘성공한 쿠데타’를 단죄한 것이다. 하지만 YS는 대법원 판결 확정 8개월 만에 ‘국민 대화합’ 명목으로 이들을 특별사면했다. 제대로 된 사과나 반성이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정치사면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결국 전두환·노태우는 12·12 및 5·18 피해자와 유족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은 채 노환으로 숨졌다. 전두환의 손자인 전우원(28)씨와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59)씨가 광주를 찾아 대신 사과했을 뿐이다. 노태우 딸이자 남편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최근 재산분할금으로 2조원가량을 요구하며 이혼소송 중인 노소영(63)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앞서 2016년 4월 총선 때 김문수 새누리당 대구 수성갑 후보 지원 유세 도중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민주화… 더 이상 뒤에서 팔짱끼고 남의 나라 보듯이 하는 게 아니”라고 발언해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배우 정해인이 영화 '서울의 봄'에서 김오랑 소령 모델인 오진호 소령을 연기하는 모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김오랑 중령 추모회’를 이끌며 평전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을 펴낸 김준철(58)씨는 통화에서 “장태완·정병주·김진기·김오랑 이분들과 (육군본부 지하 벙커를 지키다 반란군에 사살당한) 헌병대 정선엽 병장 등은 영웅이 되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소임을 다한 것”이라며 “지금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희도와 장세동처럼 쿠데타 핵심세력 중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전두환·노태우를 대신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진정한 사죄를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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