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내가 네게 패스할게”… 김승현의 ‘어시스터’ 자처한 김병철[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유재영 기자 2024. 1. 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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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단짝 농구스타 김병철과 김승현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은어, 속어죠.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레전드이자 최고의 단짝 파트너로 꼽히는 김병철 전 오리온 코치(오른쪽)와 김승현이 지난해 12월의 어느 날 만나 농구 인생을 추억하며 우정을 쏟아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인생이 술술 풀리고, 하는 것마다 잘 될 때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를 가도 환영 받고, VIP 대접을 받으니 늘 곁에 있는 사람에게 신경이 덜 쓰인다. 나를 최고로 치켜 주면서 온갖 물질적 공세를 펼치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눈을 어둡게 한다.

사람 사는 게 순탄치만은 않다. 순수하게 내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사람도 많다. 내가 유명해질수록, 힘이 있을수록 사람에게 속고 당해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지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그럴 때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옛 사람들의 진가를 깨닫기도 한다.

신기의 드리블과 기상천외한 패스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포인트 가드 김승현(46)에게 1990년대 농구 전성기를 이끈 ‘오빠 부대’의 주역 김병철(51) 전 오리온(현 고양 소노) 코치는 항상 제 자리에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선배다. 온갖 유명세를 치르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던 선배는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둘은 동양(오리온의 전신)에서 10년 가까이 한솥밥을 먹으며 농구 인생 정점에 함께 올랐다.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들의 전성기가 오리온이 가장 흥했던 전성기였다. 김승현은 코트에서 공만 잡으면 김병철을 찾았고, 김병철은 김승현의 패스를 받기 위해 부지런히 빈 공간을 달렸다. 오리온의 연고지였던 대구 팬들은 물론이고, 농구 좀 안다는 팬들은 눈만 마주쳐도 명장면이 생산되는 둘의 콤비 플레이를 아직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 ‘공통 분모’ 하나 없이 ‘우리’가 된 2002년

“나는 승현이가 그렇게 빠른 줄 몰랐어요. 오리온이 승현이가 다니던 동국대하고 연습경기를 몇 번 했는데 나는 승현이를 전담 수비하지 않아서 속도감을 못 느꼈죠. 그런데 승현이가 오리온에 입단해서 연습을 하는데 공을 잡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게 진짜 전광석화였어요. 제가 원래 속공 나갈 때 빨리 안 뛰는데 승현이가 입단한 후로는 정말 겁나게 뛰기 시작했죠.”

5살 차이인 둘은 출신 학교도 다르다. 엮이는 게 하나도 없다가 오리온에서 처음 만나 ‘우리’가 됐다. 김 전 코치는 용산고-고려대 시절 이미 정확한 슈팅과 돌파 능력을 갖춘 특급 슈팅 가드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전, 현직 역대 농구 선수들 중에는 별명, 수식어가 있는 선수들이 몇 명 없다. 중고교 시절 ‘재능 하나는 농구대통령 허재 이후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 전 코치는 간결하면서도 다양한 퍼포먼스가 가능한 농구를 구사해 ‘피터팬’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농구 코트를 거의 콘서트장으로 만든 ‘오빠 부대’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김 전 코치를 김승현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2001년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오리온에 지명(전체 3순위)되고 나서 바로 병철이 형이 생각나더라고요. 포인트가드인 저와 어떤 슈팅 가드가 짝이 될까 드래프트 전에 많이 궁금했는데 형을 만나 무척 영광이었죠.”

김승현이 입단하기 직전 2000~2001시즌에 오리온은 치욕적인 꼴찌(10위)를 했다. 김 전 코치는 상무에서 군 복무를 하고 그 시즌에 팀에 복귀했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경기력과 팀 분위기를 혼자서 수습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일당백이 가능한 김승현이 입단을 했다.

“승현아, 솔직하게 얘기해봐. 꼴찌 팀에 오기 싫었지? 하하.”

“아니에요. 유도 심문하지 마세요.”

동국대를 졸업하고 2001년 오리온에 입단해 데뷔 시즌 엄청난 코트 장악력으로 농구계를 충격에 빠뜨리면서 슈퍼스타 반열에 올라선 김승현. KBL 제공
-오리온에서 만난 게 정말 인연입니다.

“승현이가 워낙 대학 때 잘해서 당시 1, 2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던 LG나 골드뱅크(KT의 전신)에서 지명할 수도 있었죠. 그 때 어떤 감독님이 널 뽑았지?”

“최명룡 감독님이죠. 다들 김진 감독이 저를 뽑은 줄 알고 계셔요, 하하. 형도 있고 해서 지명되고 마음이 편했어요.”

“사실 저는 고려대(92학번) 3학년 때 삼성으로 가는 것에 대한 얘기가 되는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리온이 1995년에 농구 팀을 창단한다고 발표를 했어요. 오리온과 비슷한 시점에 창단한 대우(한국가스공사 전신) 등 두 팀이 창단 프리미엄으로 대학 팀을 우선 지명할 수 있었는데, 오리온이 고려대를 지명하면서 졸업반인 저하고 희철이가 입단을 하게 됐죠. 그러면서 승현이와 같은 유니폼을 입게 됐죠.”

김 전 코치(왼쪽)와 김승현(가운데)은 ‘우리’가 되자마자 오리온을 통합 우승으로 이끌고 둘만의 전성기를 누린다. KBL 제공
둘은 처음 ‘우리’가 되자마자 2001~2002시즌 프로농구에서 팀에 정규리그, 챔피언결정전 통합 우승을 안겼다. 속도를 추진체로 삼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둘의 농구는 외국인 선수들의 정형화된 1대 1에 지배된 당시 프로농구 트랜드를 180도 바꿔 놓았다.

둘 덕분에 ‘만년 꼴찌’ 오리온은 기나긴 암흑기를 뚫고 절대 강호이자 전국구 구단으로 올라섰다. 김승현은 데뷔 시즌에 신인상과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상을 한꺼번에 받았는데, 이 기록은 아직도 프로농구에서 유일하다. 여기에 베스트 5, 어시스트, 가로채기 상까지 휩쓸었다.

김승현은 기세를 이어 2002년 열린 부산아시아경기에서 남자 농구 대표팀에 금메달까지 안겼다. 김승현이 없었다면 중국과의 결승전은 100% 허무한 패배였다. 김승현은 4쿼터 종료 41초 전 81-88로 승부가 거의 넘어간 상황에서 중국 선수의 공을 가로채 83-88로 추격의 불씨를 당겼다.

종료 23초 전 83-90에서는 현주엽에게 절묘한 어시스트 패스를 해줬고, 바로 1초 만에 공을 빼앗아 문경은의 3점포를 만들어냈다. 중국의 자유투 실패로 얻은 동점 기회. 김승현은 종료 14초 전 현주엽에게 빠르게 패스를 연결하면서 수비를 끌고 움직였고, 그 덕에 현주엽이 장신 숲을 뚫고 극적으로 90-90을 만들며 연장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연장전에서 한국은 김승현의 환상적인 리딩으로 중국을 잡아내고,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 이후 20년 만에 금메달을 따낸다.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남을 역사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프로 데뷔 1년 안에 김승현처럼 강한 인상을 남긴 선수, 이룰 건 다 이룬 선수는 없다.

“승현아, 진짜 결승전에서 한국이 이길 줄을 몰랐어. 너가 얼마나 군대를 안 가고 싶었으면 그렇게 죽기 살기로 뛰었겠니. 하여튼 내가 본 너의 경기 중에 제일 강렬했어. 하하.”

“연장전에서 (문)경은 형한테 ‘백 도어 플레이(공을 갖고 있지 않은 선수가 수비를 빠르게 따돌리고 기습적으로 골대를 향해 들어가면서 패스를 받아 득점하는 움직임)’로 패스를 넣어줘서 결정적인 득점을 했잖아요. ‘백도어’는 팀에서 형하고 많이 연습했죠. 눈빛만 마주쳐도 그 플레이를 했는데 결승전 연장전에서 순간 경은 형이 병철이 형으로 보이더라고요. 나는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형과의 연습이 결정적인 순간 인생 패스로 나왔죠.”

“그래. 승현이 너하고 대표팀에서 함께 금메달을 땄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그 때 대표팀에 갈 수 있었는데 당시에 아내가 임신을 하고 있었거든. 한참 아시아경기 대비 훈련할 때 출산할 시기였어. 당시 김진 감독과 박건연 코치께서 의사를 물어보셨는데, 나 대신 조상현(LG 감독)이 엔트리에 들어갔을 거야. 사실 당시 중국에는 ‘한국 킬러’라는 후웨이동에 야오밍까지 있어서 아무리 안방에서 하는 대회지만 쉽지 않다고 봤는데 기적이었지. 후회가 돼.그런데 승현아, 정말 군대 안 가려고 열심히 뛴 거 맞지?”

“형, 하하. 그 때가 일생일대 최고의 컨디션이었어요.”

이후 둘은 한동안 프로농구 흥행 코드 노릇을 톡톡히 했다. 통합 우승을 한 다음 시즌에도 오리온은 둘의 활약으로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을 차지했다. 김 전 코치는 정규리그 MVP에 베스트 5상을 거머쥐었다. 2년 차 징크스라는 말이 무색하게 김승현은 손끝에 공만 걸리면 상상하지 못한 마술을 부렸다. 팀은 이후 4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나갔다.

통합 우승을 차지하고 다음 시즌 정규리그 MVP에 오른 김 전 코치. 김승현은 김 전 코치가 MVP를 받은 것에 자신의 몫이 절대적으로 크다고 한다. KBL 제공
“데뷔 시즌 첫 개막전에서 지고 형 기억나요? 병철이 형이 수비를 못해서 졌거든요. 하하. 두 번째 경기부터 더 공격적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바꿨어요. ‘형, 그냥 달리자’라고 했어요. 내가 무조건 다 뿌려줄 테니까 3점 슛 쏘고, 레이업 슛하라고 그랬어요. 그 때부터 우리만의 뛰고 쏘는, 팬들이 아주 재밌어하는 ‘런 앤 건(Run and Gun)’ 농구가 시작됐죠. 아, 기억해야할 건요. 통합 우승하고 다음 시즌에 형이 MVP(2002~2003시즌 정규리그)를 탄 것도 저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시스트 1위 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나한테 패스 준 게 아니냐? 하하.”

“제가 기록한 어시스트의 4할은 병철이 형 몫인 건 맞아요. 잘 넣어줬죠.”

2006년 농구 월드컵을 앞두고 서울에서 열린 월드바스켓볼챌린지(WBC) 대회에서 르브론 제임스(LA 레이커스)를 비롯해 카멜로 앤서니,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폴(골든스테이트) 등 당대 지구촌 최고의 농구 스타가 포함된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부린 묘기도 김승현 농구 인생의 명장면이다. 월드컵 직전에 몸이나 풀고 경기를 즐겨볼까 했던 미국프로농구(NBA) 대표 스타들이 요리조리 자신들을 빠져 나가면서 얄밉게 재주를 부리는 김승현을 잡으려고 전방 프레스를 가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승현은 미국프로농구 당대 최고 스타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매직’ 농구를 했다. 2006년 월드바스켓볼챌린지(WBC) 대회 한국과 미국 농구 대표팀 간의 경기에서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슈퍼스타 르브론 제임스(위), 크리스 폴(아래)을 상대하고 있는 김승현. 김승현 제공

● “힘들 때 ‘지못미’, 승현아”

프로농구 데뷔 시즌에 농구 선수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영광을 거머쥔 김승현의 인생 앞날에는 탄탄대로만이 깔릴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 빨리 길바닥에 흠집이 생겨 길을 이탈하고 또 이탈하는 불운의 연속이 꽤 길게 그를 덮어버렸다.

프로농구 2007~2008시즌 현대모비스와 개막전에서 경기 도중 극심한 허리 부상을 당하고부터 불편한 일들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심각했죠?

“연습할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4쿼터 막판에 조짐이 이상한 거예요. 허리 쪽에서 뭔가 터진 것 같은,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그 전에 비슷한 부상을 당한 적 없으니 어떻게 된 건지 알 길이 없죠. 경기가 끝나고 대구로 넘어오는데 식은 땀이 나더라고요. 앉아 있기도, 누워있기도 힘들고. 그래서 당시 감독님하고 상의해서 혼자 서울로 올라와 병원에서 MRI를 찍었더니 디스크가 터졌더라고요(추간판 탈출증).”

김승현은 몸을 과하게 쓰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상대가 거칠게 수비를 하기 때문에 부상 위험이 적다고도 할 수 없다. 게다가 데뷔 때부터 매 시즌 거의 전 경기, 평균 33~35분 가까이를 뛰었다. 김 전 코치는 “허리가 다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소모가 많이 된 탓”이라고 했다.

김승현의 허리 부상이 장기화되면서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던 오리온의 2008~2009시즌 경기. 김승현과 김 전 코치의 표정이 밝지 않다. 동아일보 DB.
-수술을 해야 될 상황이었죠?

“팀에서 수술을 안 시키더라고요. 팀이 11연패인가를 하고 감독님이 그만뒀는데 팀에서는 계속 제가 재활하면서 뛰길 원했어요. 디스크가 터졌는데, 할 수 없이 복대를 차고 뛰었죠.”

“나는 승현이가 디스크가 터져 손상됐다고 하길래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요. 점프도 많이 안 하는 얘거든요.”

“형 심각했어요. 다치고 한 달 만에 다시 뛰었잖아요. 말이 안 되는 거죠. 병원에서는 무조건 수술하라고 했어요.”

“승현이 너 그 때, 봉침까지 맞았잖아. 디스크 터지기 전이라면 치료 차원에서 할 수도 있겠지만, 나도 이해가 안 갔지.”

“말도 말아요. 벌 알레르기 때문에 붓고 엄청 고생했었어요.”

그 시즌에 21경기 출전에 그치고, 부상 여파로 2008~2009시즌도 39경기만 나갔다. 김승현의 날개가 완전히 꺾이니 팀은 2007~2008시즌 꼴찌로 추락했고, 다음 시즌도 9위에 머물렀다. 2009~2010, 2010~2011시즌도 내리 꼴찌를 했다. 김 전 코치는 “승현이가 다치면서 나도 인생의 내리막 길을 걷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예기치 못한 허리 부상이 잘 나가던 김승현의 농구 인생 상승세를 잡아 끌어내렸다. 2008~2009 시즌 후 급기야 팀과 연봉 분쟁이 붙었다. 기여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연봉을 깎으려는 팀과 삭감에는 동의하지만 팀에서 수술을 반대해서 도저히 경기에 나설 수 없는 몸 상태임에도 두 시즌을 버텼는데, 이 부분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김승현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의견 충돌이 빌미가 돼 2006년 오리온과 김승현이 FA(자유계약선수)로 5년 계약을 맺을 때 작성, 합의한 별도 이면계약서가 공개되면서 그는 더 큰 파문의 중심에 섰다. 이면 계약은 KBL(한국농구연맹)의 규정 위반 사항. 김승현은 출전 정지 처분(18경기에서 나중에 9경기로 감면)을 받았다. 2009~2010 시즌에 징계를 마치고 팀에 복귀했지만 구단과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이었다.

2007~2008시즌 개막전에서 허리 디스크가 터지는 부상을 당한 김승현은 팀의 반대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정상적이 아닌 몸 상태로 경기에 나섰다가 내리막 길을 걷는다. 무릎 부상까지 당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김승현. KBL 제공
그는 다음 시즌 직전 오리온 구단을 상대로 못 받은 보수에 대한 임금청구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KBL로부터 임의 탈퇴 선수 공시 처분을 받았다. 그러면서 2010~2011시즌을 통째로 날렸다.

이후 김승현은 1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긴 했지만 길고 긴 갈등과 대립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억울한 마음이야 컸지만 막장 폭로, 갈등의 중심에서 슈퍼스타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해를 입은 것도 사실. 어쨌든 논란을 자초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격려보다 비난과 쓴 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코트에 복귀하고 싶어 소송 승소로 얻게 될 돈을 포기할 결심까지 하면서 방법을 찾았지만 한 번 꼬인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숨 막히는 일이 계속 이어졌네요.

“1심과 항소심 둘 다 이겼지만 최선을 다한 선수에게 이런 대접을 할 수 있을까, 정말 끝까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판결이 나고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허리도 아프고 정말 내 농구 인생은 여기까지인가보다 했어요. ‘짧지만 아주 굵게, 화려하게 코트에서 뛰었으니 그만 떠나야겠다’고 결심을 했죠. 그런데 마지막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 찰나에…. 그런데 얘기 다 해도 돼요?”

구단과의 오랜 연봉 협상과 이적 분쟁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김승현의 현역 후반부 농구 인생은 늘 팬에게 사죄하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2011~2012시즌을 앞두고 임의 탈퇴 선수에서 해제돼 코트 복귀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승현. KBL 제공
이 뒤에 벌어진 일은 당사자만 안다. 오래 전 일이긴 하나 터지면 농구계에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만하다. 그래서 김승현을 말렸다. 상대편에게도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할 문제이기도 해서다. 각설하고, 우여곡절 끝에 김승현은 2011~2012시즌 다시 코트에 복귀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순탄하지 않았다. 삼성에서 3시즌 동안 벤치를 지키는 날이 많았고, 팀이 재계약 의사를 보이지 않자 미련 없이 은퇴를 해버렸다. 다른 팀으로도 갈 수 있었는데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해 그냥 농구공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벌어진 일련의 사정들은 무덤까지 갖고 갈 건데, 본인 의사에 관계없이 농구를 그만둔 ‘김승현 커리어 마침표’가 두고두고 아쉽다고 했다. 받아야 할 돈도 증발해 버렸다.
‘사고뭉치’로 낙인이 찍힌 그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삼성에서 재기의 몸부림을 했지만 그야말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코트에서 밀려났다. KBL 제공
영광을 함께 했던 후배의 추락을 지켜보는 선배의 속도 편하지 않았다. 김승현이 2011~2012시즌을 앞두고 임의 탈퇴 제재가 해제돼 잠시 오리온에서 개인 훈련을 할 때 훈련 파트너가 되어 준 사람이 김 전 코치였다. 당시 그는 현역 은퇴하고 오리온의 리틀농구단 감독 신분이었다.

“제가 승현이 사정을 많이 모르고 있었죠. 현역에서 마무리를 잘하도록 도와줬어야 했는데…. 승현이가 한참 팀 옮기는 걸로 힘들 때 ‘같이 뛰자, 같이 있자’라는 말 밖에 하지 못했어요.”

한 번 낙인이 찍힌 김승현은 하는 일마다 그렇게 찍혔다. 다른 사람이면 그냥 넘어갈 일도 김승현이 하면 논란이 됐다. 본인은 현역으로 뛸 때 선배나 동료, 지인들의 부탁을 통 크게 들어주기만 했는데 정작 의리를 저버린 막장 농구 선수가 됐다고 했다. 솔직한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스타일인데,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이면서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코트를 떠나서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①농구 방송을 하다 선수들의 불성실한 팬 서비스를 옹호한 발언 논란 ②친구한테 사업 자금을 빌렸다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사기죄 혐의로 피소.

-①번 논란으로 또 뜨거웠습니다. 이 논란 때문에 농구 해설도 그만뒀잖아요.

“①번은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 게, 방송에서는 저는 ‘100% 선수가 잘못했다, 하지만 ‘학생 팬 부모님이 말렸으면 어땠을까’라고 말을 했는데 앞뒤 맥락 다 자르고 보도가 됐어요. 저는 선수 때 이기든 지든 팬들이 요청하면 전부 사인해주고 사진 찍어드렸죠. 저를 알아봐주시면 제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별 짓을 다했어요. 선수들이 잘못을 했지만 패배를 하고 풀이 죽은 선수들의 마음도 이해한다는 차원으로 언급을 한 게 파장이 커졌죠.”

-악성 댓글도 많았는데, 봤죠?

“‘농구는 잘했을지언정, 인성은 쓰레기네’, 뭐 이런 댓글들이 많았죠. 그런데 저랑 대화 1분도 안 해본 사람들이 어떻게 저의 인성을 평가할 수 있는지 답답했어요. 더 이상 언론에 노출되고 싶지 않더라고요.”

-②번 논란이 터지면서 완전히 치명타를 입었을 것 같아요. ‘원래 김승현은 저래’라는 투의 비아냥도 많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돈을 빌린 친구가 잘 아는 배우의 절친이었어요(김승현이 1억 원을 빌려 투자). 저도 5억 원을 투자를 했거든요. 안 돌려준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저를 고소했죠. 김승현이 ‘1억 원 사기범’이 된 거예요. 나중에 이자 780만 원까지 붙여서 친구 돈을 갚아줬고, 재판에서 판사에게 돈을 갚은 서류 영수증을 보여주고 ‘저 이래도 감옥 가야되나요?’라고 물어봤죠. (재판부는 김승현에게 벌금 1000만 원을 선고)”

-항소하지 그랬어요?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또 언론에 나가면 좋지 않은 얘기들이 들리잖아요. 어차피 항소를 하면 검사가 또 구형을 할테고, 그러면 또 무슨 죄를 지은 줄 사람들이 알잖아요. 그래서 그만뒀죠. 사람이 정말 무섭더라고요. 전화번호를 다 정리했죠. 새로운 사람도 못 사귀겠더라고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농구밖에 없잖아요. 또 사람들한테 당하면 안 되는데 의지할 곳이 병철이 형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SOS를 계속 치고 있는데 형도 내상이 커서, 하하.”

오리온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한 시대를 풍미한 김병철 전 코치. 지금은 캐롯에서 소노로 넘어간 전신 오리온 팀에서의 유일한 영구결번(10)자다. 2001~2002시즌 통합 우승을 달성하고 기념으로 림 그물을 자르는 세리머리를 하고 있다. KBL제공
김 전 코치는 오리온에서 은퇴하고 오리온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원 클럽 레전드’다. 화려한 현역 생활을 마치고 오리온에서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코치, 수석코치, 감독대행을 지냈다. 2019~2020시즌이 끝나고 당시 추일승 감독이 물러나면서 감독으로 내부 승격이 되는가 싶었지만 이뤄지지 않았고, 수석코치로 감독을 보좌하다가 팀이 2022년 고양 캐롯에 인수되면서 약 25년간 정들었던 팀을 떠났다.
2019~2020시즌 중도사퇴한 추일승 감독을 대신해 오리온 감독대행을 맡아 시즌을 치렀던 김 전 코치. KBL 제공
농구계에서는 대방초-용산중고-고려대 등 농구 명문학교를 거친 스타 임에도 특정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농구 색깔과 철학을 찾아가는 스타일로 통한다. 본인은 스스로 늘 “나는 인맥 관리를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못 크는가 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농구 공부를 혼자서 지겹도록 파는 스타일이다. 섬세하게 선수를 입체적으로 분석한 맞춤 데이터가 자기 보물 1호다. 십여 권의 노트에 현재 KBL 대다수 주력 선수들의 패턴, 심리 사용법을 정리해놓고 있다. 선수들 각자에 맞는 지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냉정하게 지도자의 생각과 평가를 전하면서도 시간을 주며 발전을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은근히 ‘츤데레’다. 본인 아들도 용산고에서 꽤 농구를 잘했지만, 지난해 다른 공부에 관심을 갖고 선수 생활에 지쳐하는 기색을 보이자 바로 그만두게 했다.

지도자 경력이 끊긴 것을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돌리지만 한국 농구 전설로 남은 자신의 흔적이 일부 없어진 것에 대해선 본인도 운이 많지 않다고 느낀다. 오리온의 유일한 영구 결번(10번)자인데, 팀이 캐롯과 소노로 연달아 팔리면서 ‘김병철’의 역사가 흐지부지 사라졌다. 대구 오리온의 스타였는데, 은퇴 후 팀이 연고를 고양으로 옮기면서 제대로 은퇴식과 영구 결번 행사를 치르지 못했다.

“형은 그래도 선수 때는 별 일 없었잖아요.”

농담 하는 것을 보니 김승현의 성격 하나는 정말 긍정적이다.
“병철이 형 포함해서 농구계에서 상처를 크게 입은 사람을 하나씩 스카우트해서 팀 하나를 만들어볼까요.”

● 이제 김승현에게 ‘오늘의 운세’ 되고픈 김병철

“더 이상 승현이가 세상으로부터 상처 받지 않도록 이제는 제가 도와줘야 할 것 같습니다.” ‘매직 핸드’ 김승현과 현역 시절 포지션을 바꿔 농구 코트 밖 세상에서는 김승현에게 사는 즐거움을 패스해주는 포인트가드가 되겠다는 김 전 코치.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인간적으로 애가 너무 착해서 바보 같아요. 너무 사람들을 잘 믿어 손해를 봐요. 지금도 승현이가 누구랑 만나 사업 얘기 비슷한 것 한다고 하면 제가 깜짝 놀랍니다. 자기가 나서서 여기저기 끌어다가 남 도와줄 고민을 한다고 해요. 앞으로는 자신을 위한 시간을 써야 한다고 봐요.”

형의 논점은, 남 좋은 일은 조금 자제하자는 얘기다.

-지금까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형한테 의견 구한 적 없죠?

“안했죠.”
“자랑이다.”

신문에 매일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보면 내용이 좋든 나쁘든 하루를 경계하며 조심하게 된다. 김 전 코치는 김승현에게 그런 오늘의 운세가 되고 싶다.

“승현이에게는 ‘의기소침’의 자세가 필요해요. 화가 나도 먼저 나한테 전화해서 욕을 하고, 뭐든지 결정을 할 때 나를 스폰지처럼 생각하고 걸렀으면 좋겠어요. 승현이의 ‘리스크’를 내가 받았으면 해요.”

최근의 생각이 아니다. 예전에도 그랬다. 승현에게 약간의 정적인 면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김 전 코치는 김승현에게 낚시를 가르쳤다. 낚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고 매사에 남들의 감정선이 어떤지 차분하게 짚어보라는 의도였다. 이제는 낚시를 데리고 간 선배의 마음을 동생 후배가 알 것 같다는 김 전 코치다.

● 두 번째 ‘투맨 게임’ 연구하는 ‘우리’

“현역 시절에는 ‘김승현’이 ‘김병철’을 살려줬잖아요. 슈팅 가드로 정말 포인트가드를 잘 만난 거잖아요. 이제는 ‘김승현’을 위해 서로 포지션을 바꾸려고 합니다.”

2번 슈팅 가드였던 김 전 코치는 고려대 시절, 또 프로에서 간혹 1번 포인트가드를 보기도 했으나 전문 포지션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 코트에서, ‘수렁에서 건진’ 김승현을 위해 온갖 삶의 지혜와 사람 볼 줄 아는 시야를 패스하기로 했다.

“김승현의 장점은 상대의 비좁은 틈 사이로 패스를 정말 넣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찰나에 진짜 넣는 거였잖아요. 승현이의 아픈 틈을 제가 비집고 치료하려 합니다.”

시시콜콜한 습관부터 닮기로 했다.

“음양탕 아세요? 승현이가 음양탕을 먹으라고 추천해서 그대로 하고 있어요.”

특별한 보약인줄 알았더니, 뜨거운 물 위에 차가운 물을 부어 섞은 것이다. 섞이면서 발생하는 대류 현상으로 몸에 들어가면 신진대사가 좋아진다고 한다.

“승현아, 너가 하라는 대로 한 달 먹어봤는데 혈액 순환이 잘 되고 피곤함도 없어.”
“먼저 뜨거운 물 120ml를 컵에 넣고, 차가운 물 120ml 정도 넣고 3분을 기다려서 마시죠. 이렇게 또 해보세요.”

서로 바꾼 포지션으로 둘은 인생 두 번째 ‘투맨 게임’을 즐기고 있다. 둘은 지난해부터 정부 중앙 부처가 모여 있는 세종시의 지역 학생들을 위해 농구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이 세종을 스포츠 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마련한 프로젝트인 ‘국대유소년클럽’ 농구교실의 멘토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농구 레전드 둘이 뜨니 교실 오픈과 함께 참가자 접수가 마감됐다. 농구를 하고 싶은 학생들이라면, 또 생각이 있는 학생이라면 기본기와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스킬트레이닝은 ‘겉멋’이라고 것을 알려주고 싶다. 기본기와 체력을 아주 재밌게 둘만의 ‘투맨 게임’으로 알려주고 싶다. 김 전 코치는 KBL의 유소년 유망주 발굴 캠프에서도 총괄 코치를 맡고 있는데 언젠가 김승현이 도와줬으면 한다.

둘은 지난해부터 세종시 ‘국가대표 스포츠 클럽’ 농구교실의 국가대표 멘토로 학생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고 있다. 김 전 코치는 KBL 유스 엘리트 캠프의 캠프장으로 향후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유망주 육성에 큰 힘을 보태고 있다(아래 사진). KBL/주식회사 국대 제공
“승현아, 너 농구 인생 끝나지 않았어. ‘홀로서기’ 하지말고 당당하게 ‘둘이서기’하자. 남한테 이용당하지 말고 나를 이용해.”

“현역 시절에는 북치고, 장구치고 패스만 죽어라 하다가 슛을 쏠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형이 패스 좀 제대로 해줘서 인생의 ‘오픈 찬스’좀 만들어 주세요. 예전에 형의 슛 터치를 보고 따라하기도 했잖아요.”

뛰고 쏘는 ‘런 앤 건’ 농구의 대표 콤비였던 김 전 코치와 김승현은 인생 두 번째 ‘투맨 게임’ 을 하려 한다. 마치 ‘적벽대전’을 치르는 것처럼. KBL제공
“우리 예전 경기에서 2대2 ‘투맨 게임’을 하면 상대가 바꿔 막기나 협력 수비를 못했잖아. 한 명에게 집중할 수 없었으니까. 예전처럼 그렇게 살아보자고.”

둘은 참 오랜 만에, 그리고 계속 같은 곳을 보기로 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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