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와 결혼 할래요"…아들 폭탄 선언에 뒷목 잡은 부모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카미유 피사로
고흐, 고갱, 세잔 가르친
온화한 고집쟁이
“이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 이미 이 사람 배 속에는 애도 있고요.”
아들의 말에 부모님은 뒷목을 잡았습니다. 해외 유학까지 보내 가며 애지중지 키운 귀한 아들이, 하필 주방에서 일하던 하녀랑 결혼한다니요. 아들과 하녀는 집안도, 배경도, 학력도, 종교도 모두 달랐습니다. “결혼하면 분명히 넌 불행해질 거다.” 부모님은 필사적으로 남자를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결국 남자는 “말씀드렸으니 그런 줄 아시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울화통이 터진 부모님. “저놈이 대체 누구 닮아서 저렇게 고집이 세?”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습니다. 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기로는 남자의 부모님이 훨씬 더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사실 시조카와 숙모 사이였거든요.
이게 대체 무슨 얘기인지, 도대체 이 가족은 어떻게 된 건지 지금부터 설명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인상주의의 아버지’ 카미유 피사로(1830~1903)의 가족과 사랑, 그림 이야기.
엄마는 종조할머니?
피사로의 아버지는 원래 프랑스에 사는 평범한 20대 유대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가문의 ‘특명’이 떨어집니다. “네 삼촌이 돌아가셨다. 세인트 토마스 섬에 가서 삼촌이 경영하던 무역 회사를 물려받으렴.” 세인트 토마스 섬은 중남미 카리브해(쿠바, 푸에르토 리코 인근)에 있는 작은 섬. 지금이야 평범한 관광지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유럽과 북·중·남미, 아프리카를 잇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죽은 삼촌은 그곳에서 꽤 잘나가는 무역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좀 당혹스럽긴 했지만 사실 꽤 괜찮은 제안이었습니다. 20대의 나이에 돈 잘 버는 중소기업 오너가 되는 거니까요. 피사로의 아버지는 바로 짐을 싸서 세인트 토마스 섬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사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과부가 된 일곱 살 연상의 숙모를 돌봐줬지요. 그런데 자상함이 과했는지, 둘 사이에서는 사랑이 꽃피어 아이까지 생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1826년 결혼했습니다. 아버지 나이 26세, 어머니 나이 33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숙모와의 결혼이라니, 현대의 상식이나 감각으로는 납득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19세기에는 이런 일이 아주 드물지는 않았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집안 어른들이 시키는 경우도 있었고요. 원론적으로 서로 피가 섞인 사이는 일단 아니니까요. 다만 유대인 율법 상으로는 이런 결혼이 금지였기 때문에, 이들 부부는 지역의 유대인 사회에서 사실상 ‘왕따’가 됐습니다.
피사로는 1830년 이런 상황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왕따인 탓에 부유한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들은 피사로와 형제들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사로는 저소득층 흑인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에 갔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피사로에게 많은 선물을 남겼습니다. 자신감, 서로 다른 모습과 환경의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너그러운 포용력, ‘강철 멘탈’ 같은 것들을요.
어쨌거나 피사로의 아버지는 물려받은 회사를 잘 경영했습니다. 돈도 잘 벌어서, 열두 살을 맞은 피사로를 프랑스의 유대인 기숙학교에 거뜬히 유학 보낼 수 있었습니다. 피사로는 이곳에서 인문학과 종교, 사업을 물려받는 데 필요한 수학을 6년 동안 배웠습니다. 피사로는 이때부터 루브르박물관을 제집 드나들듯 하며 미술에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네가 수학에는 별 관심이 없고 미술만 좋아한다고 해서 걱정이다”라는 편지를 받을 만큼요.
학업을 마치고 청년이 된 피사로는 세인트 토마스 섬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무역 일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사로는 베네수엘라로 훌쩍 떠나 그림을 그리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이런 결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돈이야 충분하고, 사업은 잘되고 있고, 사업을 물려받을 후계자(피사로의 형)도 있었으니까요. 덕분에 피사로는 베네수엘라에서 2년간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신나게 그림을 그렸던 순간이었습니다.
하녀와 사랑에 빠지다
1855년 20대 중반이 된 피사로의 인생에 거대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가족 전체가 태어나고 자란 중남미 지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하게 된 겁니다. 이유는 아버지의 사업 때문. 기술이 발전하면서 바다를 건너는 배의 성능이 좋아졌고, 이 때문에 무역선들은 굳이 세인트 토마스 섬을 거치지 않고 바로 목적지로 직행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세인트 토마스 섬의 항구는 최신 대형 선박들이 머물기엔 너무 적었고요. 섬의 경제가 쇠퇴할 게 뻔한 상황에서, 피사로의 아버지는 사업의 거점을 프랑스로 옮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피사로에게도 나쁠 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6년이나 학교에 다녔으니 프랑스에는 익숙했고, 파리는 당시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으니까요.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파리에 도착한 피사로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 만에 스물 아홉살의 나이로 당시 최고 전시회인 살롱에 풍경화를 걸 만큼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피사로가 평생의 사랑을 만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상대는 어머니가 고용한 주방 하녀, 줄리 벨리. 하지만 피사로가 결혼을 선언하자 부모님의 분노는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하녀라는 신분, 별 볼 일 없는 시골 출신이라는 점, 유대교가 아닌 가톨릭 신자라는 점 등 마음에 안 드는 게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피사로는 꿈쩍도 하지 않고 결혼을 밀어붙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피사로의 이런 결정은 모두 부모님이 뿌린 씨앗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원하는 걸 밀어붙이는 뚝심은 부모님의 유전자 덕분. 신분 차이를 신경 쓰지 않는 포용력은 어린 시절 흑인 하층민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며 키운 거니까요.
확실히 피사로와 줄리는 많이 달랐습니다. 피사로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다니며 프랑스, 영어, 스페인어, 덴마크어 4개 국어를 할 줄 알았고, 그림 외에도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줄리는 프랑스 시골의 농부 집안 출신으로, 그녀가 아는 세상은 고향인 부르고뉴와 하녀로 일했던 파리가 전부였습니다. 읽고 쓰는 것만 겨우 할 줄 알았고요. 하지만 둘의 금슬은 더없이 좋았습니다. 두 사람이 자녀를 여덟 명이나 낳았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결혼 소식이 알려지자 주변 사람들은 “피사로가 손해 보는 결혼을 했다”고 수군댔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조건 좋은 남자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훗날 피사로가 줄리와 결혼한 건 더없이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유망한 화가였던 피사로는 클로드 모네, 폴 세잔처럼 인상주의자라고 불리는 패거리와 어울리면서 ‘안 팔리는 화가’이자 무능한 가장이 되고, 줄리는 그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 살리며 살림을 꾸려나가게 되니까요.
인상주의, 끝없는 시련과 도전
인상주의가 출현하기 전 프랑스 미술계의 키워드는 ‘영원함’이었습니다. 신화와 역사를 주제로, 그 속에 담긴 숭고하고 영원한 섭리를 매끄러운 색과 선으로 표현하는 게 가장 중요했지요. 하지만 피사로는 이런 분위기가 못마땅했습니다. 모네와 세잔을 비롯해 미술학교에서 만난 친구들도 기존의 미술에 지루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피사로와 친구들은 실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을 생생하게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표현 기법도 달라야 했습니다. 매끄러움과 정확함은 좀 덜해도, 그때그때 순간의 빛과 공기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하고 싶었지요. 하지만 이렇게 그린 그림들을 당시 대중과 평론가들은 “저속하다”며 비난했습니다. 주제도 저급하고 붓질도 울퉁불퉁하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화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패거리를 ‘인상주의자’로, 이들의 그림은 ‘인상주의’로 불렀습니다. 그 중심에는 풍성한 수염과 온화한 눈빛을 가진 피사로가 있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개성 강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성질이 괴팍하고 더러운 이들을 한데 묶는, ‘큰형님’ 역할을 한 게 피사로입니다. 화가들이 싸울 때마다 이를 뜯어말리고 달래는 것도 피사로의 역할이었습니다.
피사로의 이런 온화하면서도 뚝심 있는 성격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피사로는 여러 색을 부지런히 반복해 쌓아 올려서 전체 풍경의 색과 모양을 조화롭게 만들어냈습니다. 어떤 유명 평론가는 “가까이서 보면 그림의 색이 이상하다”며 “나무는 보랏빛이 아니고 공기는 버터 색이 아니다”고 비꼬았지만, 피사로는 그런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여러 불행이 그를 덮쳤습니다. 1870~1871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전쟁 때 그가 20년간 그린 작품 1500점가량이 사라진 건 특히 아까운 일이었습니다. 사정은 이랬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피사로는 가족을 데리고 영국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피사로의 집은 프러시아군의 숙소 겸 창고가 됐습니다.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군인들은 피사로의 작품을 바닥 매트나 진흙을 닦는 걸레, 마구간 깔개로 써버렸고, 가치를 알아본 군인들은 작품을 훔쳐 갔습니다. 더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피사로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마을에 돌아왔더니 이웃집 아줌마들 앞치마가 엄청 화려하더라. 자세히 보니 내 그림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거였어. 한 아줌마 앞치마에 내 서명이 있는 걸 보고 알았지.”
전쟁이 끝나도 어려움은 계속됐습니다. 피사로의 청년 시절부터 중년이 끝날 때까지 그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1877년 47세의 피사로는 생활비가 너무 급해 그림을 헐값에 팔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머리를 좀 써서, 그림을 살 수 있는 추첨권을 일종의 복권처럼 지역 주민들에게 여러 장 판매한 후 당첨자에게 그림을 넘기기로 했지요. 하지만 추첨권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추첨을 통해 당첨된 건 어린 소녀. 하지만 그 소녀는 뜻밖의 말을 꺼냈습니다. “저 혹시…. 그림 대신 크림빵으로 주시면 안 되나요?” 결국 피사로는 없는 돈을 털어 소녀에게 크림빵을 사 줬다고 합니다.
월급 70만원에 자녀 8명인데 행복해?
상황이 이 정도로 어려우면 좌절해서 작업을 쉬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분노를 표출할 법도 한데, 피사로는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피사로는 계속 성실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항상 온화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의 구심점으로 계속 활동하며 8번의 인상주의 전시회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화가가 된 게 이를 방증합니다. 동료 화가들은 그를 “아버지 같은 존재”(세잔) “돌한테도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남자”(메리 카사트)라 했습니다.
이는 줄리가 가족을 지탱해준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피사로는 줄리의 초상화를 많이 남기지 않았습니다. 초상화 모델을 서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걸 줄리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줄리를 그린 몇 안 되는 그림에서도 그녀는 항상 아이를 품에 안고 있거나 뭔가 일하고 있습니다.
당시 피사로가 집에 갖다줬던 돈은 80프랑. 지금 화폐가치로 치면 약 70만원에 불과한 돈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결코 굶지 않았습니다. 카미유가 남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돈이 없어서 평소에 맨발로 다니거나 나막신을 신고 다녀. 하지만 아이들은 내 아내가 텃밭을 가꾸고 닭과 토끼를 키우는 덕분에 배불리 먹는다네.”
물론 줄리가 맨날 피사로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림이 안 팔리면 집집마다 찾아가서라도 직접 팔란 말이야!” 이렇게 피사로에게 방문판매를 시킨 적도 있었지요. 물론 이런 방법을 써도 그림이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한 점도 못 팔고 돌아온 피사로가 의기소침해져서 아들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너네 엄마는 그림이 진짜 팔릴 거라고 생각해서 나를 보낸 걸까?”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피사로의 집에서는 항상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돈은 못 벌지만 마음은 따뜻한 피사로, 헌신적이고 억척스러우면서도 현명한 줄리는 환상의 콤비였으니까요. 피사로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 줬고, 다 함께 가족 신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 아이가 가족 신문에 그린 만평 중에서는, 분노한 줄리가 피사로를 주먹으로 때리는 그림도 있었다고 하네요. 가난도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집안 분위기가 격의 없고 유쾌했다는 뜻이겠지요.
아는 건 많지 않았지만, 줄리는 특유의 직감과 현명함으로 피사로의 작품세계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1880년대 중후반 60살이 다 돼가던 피사로가 시도한 신인상주의(후기 인상주의)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피사로는 쇠라의 점묘법에서 영감을 받아 기존의 인상주의보다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작품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외면했습니다.
줄리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 그림에 간신히 익숙해져서 이제 좀 작품이 팔리려나 했는데, 도대체 왜 또 바꾼 거야? 정신 좀 차려! 그리고 내가 보기엔 별로야.”
마침내 성공, 그리고
아내의 말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피사로는 1890년 “나의 도전은 실패했다”며 원래 화풍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평생을 쏟은 인상주의 화풍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했는데, 60살에 이런 커다란 실패를 하다니. 어떻게 보면 이는 재기불능의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하지만 피사로의 세월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피사로의 그림은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합니다. 그 모든 시행착오가 그의 그림에 깊이와 완성도를 더해줬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들은 말했습니다. “피사로의 그림은 전보다 더 세련되고 미묘해졌으며 구성도 단단해졌다.” 피사로 자신도 노년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작업한 뒤에야 비로소 나만의 방향을 찾았다네.”
평생 고생한 피사로의 아내도 마침내 편하게 살 수 있게 됐습니다. 노년의 피사로는 각지로 여행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줄리도 여행에 함께했지요. 피사로는 눈병 때문에 밖에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호텔 객실에서 창밖으로 내다본 풍경을 그렸습니다. 그림 그리기는 어렵지만 눈병은 좀 나아지는 흐린 날씨에는, 간혹 호텔 밖으로 외출할 때도 있었습니다. 기록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수염이 4월의 시냇물처럼 은빛으로 물든 이 멋진 거장이 외출할 때면, 사람들은 존경을 보냈다.”
이렇게 비교적 편안한 노년을 보내던 피사로는 190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들에게 적잖은 유산도 남겨줄 수 있었고, 줄리는 1926년까지 살며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았습니다. 서양 미술사에 남긴 유산은 훨씬 더 컸습니다. 세잔은 피사로를 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피사로에게 배웠습니다. 피사로는 최초의 인상파 화가입니다.” 그의 말대로였습니다. 고흐와 고갱, 세잔, 쇠라 등 근대와 현대를 잇는 위대한 거장들이 모두 그에게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피사로의 작품은 다른 인상파 화가에 비해 특색이나 강렬함이 덜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오래 봐도 질리거나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온화하고 따뜻하면서도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분위기 덕분입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에는, 보면 볼수록 깊은 맛이 있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빛과 같은 디테일, 색과 질감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나타나는 예상치 못한 미묘함처럼, 흘끗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매력 말입니다.
피사로라는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그 성격 안에는 결코 꺾이지 않는 뚝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뚝심으로 그림과 가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지켜냈습니다. 팔리지 않는 그림을 끝없이 그리며 자신을 단련한 것도,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훌륭한 아내와 결혼한 것도,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내거나 피해를 주지 않은 것도 훌륭한 인성과 삶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피사로는 결국 승리를 거뒀습니다.
피사로의 그림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도, 그의 이런 매력과 부드러운 시선이 작품에 잘 묻어나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바로 우리가 피사로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Camille Pissarro: The Audacity of Impressionism'(Anka Muhlstein 지음, Adriana Hunter 옮김), 'Camille Pissaro' (Joachim Pissarro 지음), 'Camille Pissarro: Impressions of City and Country'(Karen Levitov, Richard Shiff 지음), 'Paul Gauguin'(David Sweetman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4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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