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엔 특별한 고시원이 있다 [삶속에서]

이희진 2024. 1. 1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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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반이나 두병이 주량이야. 이제 디데이를 잡았으니까…. 소주를 5~6병 사서 들이마셨지. 그런데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더라고. ‘에휴, 이젠 가자’ 싶어서 난간 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애 엄마랑 딸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여보, 안 돼!’, ‘아빠, 안 돼!’ 이러기에 뒤돌아봤지. 근데 아무도 없어. 환청이었던 거야.”

오윤환(71)씨가 고시원 앞에서 웃어보이고 있다. 오씨는 본인 고시원을 “사회복지시설 아닌 사회복지시설”이라 설명한다.
1998년 한국을 휩쓴 ‘IMF 외환위기’는 오윤환(71)씨 삶도 크게 할퀴었다. 잘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된 그는 한없이 작아졌다. 차마 집에 말할 수 없었다. 출근하는 것 마냥 차를 끌고 나와 한적한 길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앞으로의 삶이 참 막막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998년 어느 날, 오씨는 바닷가에서 삶을 정리하려 했다. 그때 들렸던 환청, 아직 삶에 미련이 있었던 것이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목 놓아 울었다. 오씨는 “태어나서 처음 그렇게 울어봤다”고 그날을 회상했다.

2024년 1월10일 경기 파주의 한 고시원 앞. 점심식사를 마친 오씨는 근처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곳엔 고시원에서 숙식하는 3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원장님, 이 사람 누구예요?” 그중 한 명이 선거 공보물에 적힌 이름을 말하며 물었다. “이번에 선거 있잖아.” 오씨 말에 입에서 물고 있던 담배를 뺀 그는 “아이, 정말 뽑을 사람이 없다”며 공보물을 다시 내려놨다.

죽음을 생각하던 오씨는 파주에 위치한 한 고시원 원장이 됐다. 2002년에 차렸으니 올해로 벌써 23년차다. 꿈을 좇는 학생, 경제적으로 어려운 저소득층 등 고시원엔 다양한 사람이 모이지만 오씨 고시원은 조금 더 특별하다. 돈을 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 물론 돈을 받는 게 원칙이지만 도저히 낼 형편이 안 되면 그냥 살게 해준다. 그래서 오씨는 본인 고시원을 “사회복지시설 아닌 사회복지시설”이라고 부른다.

오윤환(71)씨가 식사를 위해 고기를 구워주는 모습. 원래 꾸준히 요리를 해왔지만 작년 허리를 크게 다친 후 이제 직접 요리를 해주진 못한다. 이젠 고시원에서 숙식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요리를 한다. 오씨는 “밥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등이 나눠져 있다”며 “어찌 보면 하나의 공동체”라고 했다.
처음부터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요량은 아니었다. 그저 제2의 삶을 위해 경매로 나온 터를 낙찰 받아 고시원으로 만든 게 시작이었다.

“2004년인가 2005년쯤 비 오는 날이었어. 밤 12시쯤 아주머니가 애기를 업고 왔더라고. 비를 쫄딱 맞고. 딱 보니까 부부싸움하고 집을 나온 거 같아. 딱해서 수건과 함께 빈 방을 내주며 여기서 그냥 자라고 했는데, 그게 나중에 언론에 난 거야. 그랬더니 전국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다 모여들기 시작한 거지.”

오씨는 일부러 고시원에 찾아온 이들을 차마 내칠 수 없었단다. “막상 왔는데 안 받아준다고 할 수가 없더라고. ‘여기가 사회복지시설도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어. 알코올중독자 등이 와서 살다 보니 직장인 등은 점점 빠져나갔어. 그러다보니 ‘사회복지시설 아닌 사회복지시설’이 되어버린거야.”

현재 고시원에 살고 있는 사람은 25명 남짓. 이들 중 일부는 방값(30만~32만원)을 다 내지만 20만원만 내는 사람, 그것보다 적게 내는 사람이 더 많다. 이곳에서 약 15년째 살고 있는 박모(46)씨는 정부에서 지원받는 돈으로 방값 일부를 치른다. 박씨 역시 집에서 쫓겨나고 갈 곳이 없어 무작정 고시원으로 찾아온 사람 중 하나다.

오윤환(71)씨가 운영하는 고시원 방 내부. 여타 고시원과 다를 바 없는 조그마한 방이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밖에 있다.
“원래 삼촌이랑 살았는데요. 집에서 쫓겨났어요. 일을 안 하니까 나가라고 해서….” 박씨는 어릴 때부터 뇌전증을 앓고 있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쉽지 않다. “뭐, 병이 나았으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되겠죠. 언제 발작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그래도 원장님이 저에 대해 잘 알고 편의도 많이 봐주시니까 좋아요.”

모든 이들이 박씨처럼 오씨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아니다. 주먹을 날리는 등 선을 넘는 행동을 하는 이들 때문에 가슴 속에 ‘참을 인(忍)’을 새긴 날이 셀 수 없을 정도다. “하루는 손님하고 이야기하는데, 페트병에 오줌을 담아 와선 내 머리에 붓는 거야. 그럴 땐 진짜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 ‘왜 그러느냐’ 했더니 나라에서 도움 받으면서 왜 우리한텐 더 잘 안 해주냐는 거야. 나라에서 돈 받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돈 받는줄 알았나봐.”

기독교인인 오씨는 성경에서 답을 찾았다. “성경을 읽다 보니 ‘네가 누구를 도와줄 때 단순히 도와주는 게 아니라 사랑을 더하라’는 말이 있었어. 그걸 읽으니 ‘아 내가 사랑이 없었구나. 밥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담아서 대해야 하는구나’ 깨달았지.”

오씨는 갈 곳 없는 이에게 1~2평 남짓한 방을 내어주는 게 그들 인생에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해고당한 뒤 끝을 생각했던 과거의 본인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는 “고시원 한 평 좁은 방이지만 그래도 이 방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며 “면담도 하고, 같이 외식도 하면 그들도 조금씩 변한다”고 했다.

오윤환(71)씨는 말없이 떠난 이들의 짐을 버리지 않고 모아뒀다. 언제까지 놔둘 순 없는 노릇이지만 일단은 계속 짐을 보관하고 있다.
25명에겐 이 고시원이 전부이지만 오씨가 언제까지 고시원을 운영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4년 전 뇌경색 진단을 받은 이후 건강이 안 좋아진 게 첫 번째 이유고, 돈을 제대로 받지 않아 생긴 적자를 이제는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진 게 두 번째 이유다.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아. 코로나19 전엔 강연 나가서 받은 돈으로 적자를 메꾸고 그랬는데 이젠 돈이 진짜 바닥났어. 계속 적자가 나는데…. 사람이 차면 차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손해야. 그래서 사실 힘들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하시는 이유는요?” 툭 던진 질문에 그가 답했다.

“종교적인 이유가 큰데…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해요. 믿음이지.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 등이 많이 오는데, 이 사람들이 죄인은 아니란 말야. 이렇게 넘어졌으면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줘야 하거든. 사람이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도, 뒤로도 못가는 그런 상황이 반드시 생기거든요. 그때 누군가 벽돌 하나를 놔주면 뛰어넘을 수 있으니까….”

오씨는 올해 2가지 소망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나와 아내의 건강이고, 두 번째는 이분들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근처에 텃밭이나 개울이라도 있으면 자연치유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런 게 가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기도하고 있어요.”

글·사진=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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