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엔 특별한 고시원이 있다 [삶속에서]
“한병반이나 두병이 주량이야. 이제 디데이를 잡았으니까…. 소주를 5~6병 사서 들이마셨지. 그런데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더라고. ‘에휴, 이젠 가자’ 싶어서 난간 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애 엄마랑 딸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여보, 안 돼!’, ‘아빠, 안 돼!’ 이러기에 뒤돌아봤지. 근데 아무도 없어. 환청이었던 거야.”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목 놓아 울었다. 오씨는 “태어나서 처음 그렇게 울어봤다”고 그날을 회상했다.
2024년 1월10일 경기 파주의 한 고시원 앞. 점심식사를 마친 오씨는 근처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곳엔 고시원에서 숙식하는 3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원장님, 이 사람 누구예요?” 그중 한 명이 선거 공보물에 적힌 이름을 말하며 물었다. “이번에 선거 있잖아.” 오씨 말에 입에서 물고 있던 담배를 뺀 그는 “아이, 정말 뽑을 사람이 없다”며 공보물을 다시 내려놨다.
죽음을 생각하던 오씨는 파주에 위치한 한 고시원 원장이 됐다. 2002년에 차렸으니 올해로 벌써 23년차다. 꿈을 좇는 학생, 경제적으로 어려운 저소득층 등 고시원엔 다양한 사람이 모이지만 오씨 고시원은 조금 더 특별하다. 돈을 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 물론 돈을 받는 게 원칙이지만 도저히 낼 형편이 안 되면 그냥 살게 해준다. 그래서 오씨는 본인 고시원을 “사회복지시설 아닌 사회복지시설”이라고 부른다.
“2004년인가 2005년쯤 비 오는 날이었어. 밤 12시쯤 아주머니가 애기를 업고 왔더라고. 비를 쫄딱 맞고. 딱 보니까 부부싸움하고 집을 나온 거 같아. 딱해서 수건과 함께 빈 방을 내주며 여기서 그냥 자라고 했는데, 그게 나중에 언론에 난 거야. 그랬더니 전국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다 모여들기 시작한 거지.”
오씨는 일부러 고시원에 찾아온 이들을 차마 내칠 수 없었단다. “막상 왔는데 안 받아준다고 할 수가 없더라고. ‘여기가 사회복지시설도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어. 알코올중독자 등이 와서 살다 보니 직장인 등은 점점 빠져나갔어. 그러다보니 ‘사회복지시설 아닌 사회복지시설’이 되어버린거야.”
현재 고시원에 살고 있는 사람은 25명 남짓. 이들 중 일부는 방값(30만~32만원)을 다 내지만 20만원만 내는 사람, 그것보다 적게 내는 사람이 더 많다. 이곳에서 약 15년째 살고 있는 박모(46)씨는 정부에서 지원받는 돈으로 방값 일부를 치른다. 박씨 역시 집에서 쫓겨나고 갈 곳이 없어 무작정 고시원으로 찾아온 사람 중 하나다.
모든 이들이 박씨처럼 오씨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아니다. 주먹을 날리는 등 선을 넘는 행동을 하는 이들 때문에 가슴 속에 ‘참을 인(忍)’을 새긴 날이 셀 수 없을 정도다. “하루는 손님하고 이야기하는데, 페트병에 오줌을 담아 와선 내 머리에 붓는 거야. 그럴 땐 진짜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 ‘왜 그러느냐’ 했더니 나라에서 도움 받으면서 왜 우리한텐 더 잘 안 해주냐는 거야. 나라에서 돈 받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돈 받는줄 알았나봐.”
기독교인인 오씨는 성경에서 답을 찾았다. “성경을 읽다 보니 ‘네가 누구를 도와줄 때 단순히 도와주는 게 아니라 사랑을 더하라’는 말이 있었어. 그걸 읽으니 ‘아 내가 사랑이 없었구나. 밥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담아서 대해야 하는구나’ 깨달았지.”
오씨는 갈 곳 없는 이에게 1~2평 남짓한 방을 내어주는 게 그들 인생에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해고당한 뒤 끝을 생각했던 과거의 본인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는 “고시원 한 평 좁은 방이지만 그래도 이 방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며 “면담도 하고, 같이 외식도 하면 그들도 조금씩 변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하시는 이유는요?” 툭 던진 질문에 그가 답했다.
“종교적인 이유가 큰데…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해요. 믿음이지.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 등이 많이 오는데, 이 사람들이 죄인은 아니란 말야. 이렇게 넘어졌으면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줘야 하거든. 사람이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도, 뒤로도 못가는 그런 상황이 반드시 생기거든요. 그때 누군가 벽돌 하나를 놔주면 뛰어넘을 수 있으니까….”
오씨는 올해 2가지 소망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나와 아내의 건강이고, 두 번째는 이분들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근처에 텃밭이나 개울이라도 있으면 자연치유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런 게 가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기도하고 있어요.”
글·사진=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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