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2등, 판 깨고 다시 해!”…1.7조 괌 사업 따낸 집념의 사나이 [떴다 상사맨]

김희수 기자(heat@mk.co.kr) 2024. 1. 1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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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기자의 떴다 상사맨 1회]
돈 되는 비즈니스를 찾아라! 오지부터 마천루까지 세계를 휘젓다. 여러분의 사업가 본능을 깨울 종합상사 이야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사회복지재단>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이 지은 낙화의 문장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구절이지만 사업은 또 다른 영역인가 봅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차명근 현대코퍼레이션 전무입니다. 경쟁사의 로비에 넘어간 괌 전력청을 상대로 양보 없는 이의를 제기해 기어코 6682억원(당시 환율 기준) 규모의 발전용 중유 공급사업을 따냈습니다. 해당 수주는 연장 계약을 통해 누적 1조7000억원 상당의 초거대 사업이 됐죠. 참고로 중유는 원유를 휘발유·등유·경유 등으로 증류하고 남은 잔기름을 말합니다.

억울하면 판을 깨버린다
응답하라 1988에서 고스톱판을 엎는 장면.
2012년 8월 현대코퍼레이션(당시 현대종합상사) 사무실에서 한 통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괌 전력청에서 입찰 공고를 낼 예정인데 함께 참가하자는 현지 한국인 사업가의 연락이었죠. 해당 사업가는 결국 다른 더 큰 회사와 팀을 꾸렸으나 그의 전화로부터 현대코퍼레이션의 괌 석유사업 도전은 시작됐습니다.

사업을 맡은 석유제품팀은 당시 출범한 지 2년이 채 안 된 신생 부서였습니다. 인원은 팀장 포함 세 명에 불과했고요. 반면 사전설명회에 모인 경쟁자들은 모두 명성이 자자한 메이저 업체였습니다.

체급부터 다른 승부에 당시 팀장이었던 차 전무는 “객관적 승률은 1%지만 잘 준비해서 참가하면, 시작이 반이라고 승률은 최소 51%가 된다”는 마음 다짐용 계산법까지 동원하며 입찰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석유제품팀의 간절함이 통했을까요. 최저가 낙찰 방식으로 진행된 입찰 결과 현대코퍼레이션의 가격이 가장 좋았습니다. 계약 성사 고지가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다만 이때 발주처인 괌 전력청의 견제가 시작됐습니다. 협력업체 보증을 둘러싼 시비였죠. 현대코퍼레이션은 끝내 조정에 실패하고 부적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대신 2등 업체가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가져갔습니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2등 업체의 로비력이 상당했다 합니다.

생경한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그것도 공기관과의 마찰, 누구나 포기를 떠올릴 시점에 현대코퍼레이션은 과감히 괌 전력청에 소송 불사를 통보합니다. 이미 끝난 게임 미련 두지 말라는 설득도 많았으나 차 전무와 대면한 정몽혁 현대코퍼레이션 회장이 상황을 정리했다네요. 정 회장은 “차 팀장 눈빛을 보니 될 수 있을 것 같다”며 “다시 해봐”라고 강대강 대치를 허락합니다.

“발주처 마음 돌린 비결은요…”
태평양의 작은 섬, 괌의 해변을 묘사한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마이크로소프트>
결국 2013년 4월 괌 전력청은 재입찰 공고를 냈습니다. 현대코퍼레이션의 강경한 태도에 공급량의 절반만 맡으라는 제안도 했으나 현대코퍼레이션이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차 전무는 “그들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 아니겠느냐”고 회상합니다.

현대코퍼레이션은 소송하는 길도 남아 있었지만 비용·시간 등 변수를 고려해 재도전을 선택합니다. 다만 재입찰 요강을 보니 괘씸죄로 보이는 신규 조건이 추가됐습니다. 신용등급평가를 던앤브래드스트리트(DB)라는 무명 업체에서 받으라는 내용입니다. DB는 현대코퍼레이션의 신용등급을 탈락 기준인 B로 책정하고 있었습니다.

DB에 문의 결과 과거 평가가 갱신되지 않은 점이 낮은 등급의 이유였습니다. 런던 본사의 재심사까지 3~4개월이 걸린다는 것을 현대코퍼레이션은 매일 읍소에 나서 2주 만에 A등급 획득에 성공합니다. 차 전무는 “한국 DB지사도 놀라워했던 속도로 다시 한 번 한국 DB지사의 협조에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현대코퍼레이션은 입찰서류 마감 하루 전 오후 늦게야 서류준비를 끝냅니다. 마감시한에 딱 맞춰 제출한 서류는 2013년 8월 괌 전력청과 6682억원 규모의 중유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2015년에는 6645억원 상당의 연장계약을 성사시켰고요. 2020년에도 3600억원 규모의 동일한 프로젝트를 재수주했습니다. 현대코퍼레이션의 집념이 총 1조7000억원 가량의 장기 중유 공급 성과로 이어진 셈입니다.

현대코퍼레이션은 이제 괌 전력청과 탄탄한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오는 2026년이 만기인 새 석유 공급사업 입찰도 진행 중입니다. 아울러 괌 미군기지에서 쓰일 항공·선박유 수십만t을 미국 군수국에 공급하는 성과도 부수적으로 거뒀죠. 앞으로 괌은 물론 태평양지역 군·민간용 항공유, 경유 등의 수요개발을 지속할 계획입니다.

차 전무는 발주처의 결정을 뒤집은 비결에 대해 “신입사원 시절부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자주 보고있다”며 “‘이봐, 해봤어?’라는 창업주의 말이 가장 감명 깊었는데 이 프로젝트도 자기 확신을 갖고 당돌하게 나선 점이 성공비결이라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다소 싱거운 답변이지만 강력한 동기부여와 추진력은 성공의 선결조건이 분명해 보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에게 실패 앞에서 포기를 고민할 일이 생긴다면 이번 이야기가 작은 용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짧은 요약

1. 현대코퍼레이션은 7000억 규모 괌 석유사업서 발주처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은 바 있다.

2. 불복 소송을 통보해 괘씸죄도 우려됐으나 ‘이봐, 해봤어?’ 정신으로 결정을 뒤집고 계약에 성공했다.

3. 계약은 지속 갱신돼 총 규모가 1.7조원에 달하며 현재 새로운 만기의 공급 계약 입찰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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