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스카이댄서’다. ‘튜브맨’ ‘에어댄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사람이나 원통 모양으로 된 직물 외피에 송풍기를 이용해 바람을 불어넣으면 공기가 빠져나가며 춤추듯이 흔들린다.
지금은 온갖 신장개업 가게 앞에서 불철주야 춤추는 싸구려 광고물로 혹사당하고 있지만, 원래는 올림픽 무대에서 화려하게 데뷔한 작품이었다. 최초의 ‘스카이댄서’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의 예술가 피터 민샬(Peter Minshall, 1941~)과 이스라엘 출신의 도론 가짓(Doron Gazit, 1953~)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영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마스 맨’ 민샬은 1974년 여동생의 카니발 의상을 만들어 준 것을 계기로 고국인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카니발, 그중에서도 마스 밴드(특정 주제에 맞춘 화려한 의상과 가면 등을 쓰고 퍼레이드에서 춤을 추는 것)에 뛰어들게 됐다. 1960년대 초 영국에선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카리브해 지역 이민자들이 고국의 카니발을 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노팅힐 사육제(Notting Hill Carnival)다. 당시 영국에 거주하던 민샬은 당연히 노팅힐 카니발의 마스 밴드 작업에 참여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댄싱 모빌’이라고 부르는 민샬의 마스 의상은 단순히 화려한 옷 수준을 넘어 착용한 사람의 퍼포먼스를 따라 춤추듯 움직이는 거대한 작품이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4년 월드컵 개막식에 잇따라 자기 작품을 선보인 민샬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폐막 행사에 선보일 스카이댄서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풍선을 이용한 작업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 도론 가짓과 협력했다. 1996년 데뷔 당시에는 ‘플라이 가이(Fly Guys)’ 혹은 ‘톨 보이(Tall Boys)’라고 불렀다.
임팩트 넘치는 데뷔 이후 스카이댄서는 발 빠른 사업가들에 의해 설치가 간편하고 가격도 저렴한 옥외 광고 수단이자 이벤트용 설치물로 자리 잡았다. 구하기 쉬운 재료, 송풍기를 활용한 단순한 구조 덕분이었다. 십수년간 온갖 신장개업 가게 앞을 지켜온 스카이댄서지만, 소란스러운 싸구려 광고물로 전락한 지금에 와서는 도통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 텍사스주의 휴스턴에서는 2008년 시 조례를 통해 스카이댄서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도심 환경을 시각적으로 어수선하게 만들고 시민의 안전 및 생활의 질적 수준을 저해한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스카이댄서의 인생 2막은 귀농이었다. 허수아비를 대신해 논밭을 지키게 된 것이다. 예상할 수 없는 움직임과 송풍기 소음은 곡식을 탐하는 사악한 새들을 쫓아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멋진 이름도 얻었다. 에어레인저(Air Ranger)다.
여기까지는 예술 작품이 호객용 수단으로 대중화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지만, 이후부터는 다소 어른들의 뒷사정 같은 전개로 진행된다.
도론 가짓이 스카이댄서에 대한 특허 출원을 해버린 것.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2001년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형상을 위한 팽창 장치’라는 복잡한 이름의 특허를 승인 받았고(플라이 가이®라고 명명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를 통해 스카이댄서 제조업체들에 라이선스 비용을 물리기 시작했다.
가짓의 특허는 공기 송·배출 구멍이 2개 이상인 스카이댄서에만 해당하는 것이었기에 저작권을 우회할 방법은 많았다. 어쨌든 스카이댄서를 디자인하며 순수 예술 작품으로 접근했던 민샬은 가짓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했고 특허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민샬의 측근에 따르면 가짓이 민샬의 아이디어를 몰래 특허로 내고 수익을 창출한 문제 때문에 법정 싸움까지 갈 뻔했지만, 소송에 드는 시간과 비용 때문에 민샬 측이 결국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도 감정의 골이 꽤 깊은 모양인지 2021년 민샬이 본인의 SNS에 1996년 스카이댄서 관련 글을 올리며 디자이너인 본인은 물론, 연출가와 제작자 이름까지 다 올리면서 가짓 이름은 쏙 빼놓기도 했다. 가짓은 이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플라이 가이에 대한) 비전은 민샬이 갖고 있었지만, 풍선 관련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 만든 내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양쪽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고 전제하면 ‘디자인 바이 민샬, 메이드 바이 가짓’인 셈.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발명품이 탄생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가 잉태되고 구체적인 디자인이 도출된 시점일까, 시제품 같은 객관적 실체가 만들어진 시점일까.
전화기 발명가의 업적을 놓고 논쟁을 벌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1847~1922)과 일라이셔 그레이(1835~1901)의 사례를 보자. 둘 다 1876년 2월 14일 미국 특허사무국에 전화기 특허를 신청하러 방문했다. 차이가 있다면 벨의 전화기는 아직 통화에 성공하지 못했고, 그레이는 1874년부터 공개적으로 전화 통화를 시연했다는 것. 하지만 특허사무국 측은 2시간 먼저 도착한 벨에게 전화기 특허를 줬다.
하지만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제3자가 참전한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안토니오 메우치(무치, 1808~1889)다. 벨과 그레이의 영혼의 맞대결보다 무려 20년 앞선 1854년 전화기를 발명한 그는 돈이 없던 탓에 매년 10달러씩 지급해 갱신하는 일시 특허를 얻어둔 상태였다. 운영하던 양초 공장은 파산했고, 모국인 이탈리아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얻으려던 계획도 뒤숭숭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좌초됐다. 전화기의 잠재력을 미처 몰랐던 웨스턴유니언전신회사와의 특허 관련 논의도 불발로 끝났다. 그 과정에서 전화기 시제품과 설계도를 분실했다는 설도 있다. 이쯤 되면 머피의 법칙이 아니라 메우치의 법칙이다.
‘불운의 아이콘’ 메우치가 일시 특허 갱신을 못 한 사이 ‘2시간 빠른 남자’ 벨이 먼저 특허를 얻었고 곧 소송전으로 비화했지만, 결론은 무치의 패소였다. 전화기 발명가가 결정된 해로부터 126년, 메우치 사후 113년이 지난 2002년 6월 미국 하원 의회는 공식적으로 안토니오 메우치를 최초의 전화기 (시제품) 발명가로 인정했다. 더 정확하게는 “전화기 발명에 기여한 메우치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결의문이었다. 편히 잠드소서.
멀리 돌아왔다. 승자독식 패자독박, 발명의 세계는 차갑다. 최후에 웃는 자만이 최초의 타이틀을 거머쥔다. 민샬과 가짓 중 ‘스카이댄서의 발명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자는 누가 될까. 남겨진 사람은 스카이댄서의 춤사위로부터 위무(慰撫)를 받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