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전쟁 같은 정치라고? 다수 국민은 ‘중도파’다
“상대를 죽여 없애야 하는 전쟁 같은 정치를 이제는 종식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0일 서울대병원을 나서면서 내놓은 첫 메시지다. 동의한다(그리고 쾌유를 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만 보면 마치 이재명이 적대적 정치인, 즉 정적(政敵)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것처럼 읽힌다.
물론 이재명은 “이번 사건이 증오의 정치, 대결의 정치를 끝내고 서로 존중하고 상생하는 정치를 복원하는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부산경찰청 수사 발표에 따르면 이재명을 습격한 살인미수 혐의자 김모 씨는 정치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다. 범행을 교사한 배후세력은 현재까지 없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바쁜 독자를 위해 이어질 내용을 세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정치적 양극화는 거대양당 문제다.
② 강성지지층만 보는 정치는 해법 아니다.
③ 무당파를 움직이는 건 결국 대통령이다.
● ‘정치적 양극화’는 정치인 문제
증오의 정치에 대해 우려와 경각심을 갖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냉정히, 객관적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상대를 죽여 없애야 하는 전쟁 같은 정치, 즉 ‘정치 양극화’를 정치학에선 이념 양극화와 정서 양극화로 나눠 분석한다. 이 분류가 중요한 이유는 처방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념 양극화란 단순히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게 아니다. 중도가 줄어들면서 보수집단은 더 보수적으로, 진보집단은 더 진보적으로 쏠리는 걸 뜻한다. 진영 내 딴 목소리가 사라지고 충성심을 보여야 살아남는 거대 양당 정치엘리트들이 여기 속한다. 소금을 더 퍼부어 더 짠 소금물로 만들려는 지금의 민주당이다. 오죽하면 ‘원칙과 상식’ 이란 모임을 만든 의원들이 뛰쳐 나왔겠나.
● 중도-무당파 유권자가 더 많다
이는 갤럽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작년 12월 조사한 작년 말 유권자 정치성향을 보면 중도파(중도적+성향 유보)가 무려 42%다. 스스로 보수적(32%), 진보적(26%)이라고 밝힌 수치를 훨씬 넘는다. 박근혜 탄핵 정국이었던 2017년 1월 중도가 36%(보수 27%, 진보 37%)로 유독 적었을 뿐, 2016~2022년 중도파는 45% 안팎이다.
앞서 ‘정치 양극화’는 이념 양극화와 정서적 양극화로 구분한다고 했다. 즉 이념 양극화는 정치인들 사이에서나 요란할 뿐 유권자들은 중도파가 더 많다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을 더 싫어하는 정서적 양극화는 유권자 사이에서도 진행 중이다. 지난 2022년 대선이 바로 좋아하지 않는 후보를 떨어뜨리려는 ‘비호감 대선’이었다.
● 무당파를 움직이는 대통령 지지율
이념적 양극화와 정서적 양극화를 굳이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해결책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일 유권자가 이념 양극화 경향을 보인다면, 정치는 상대진영 유권자를 설득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고 하상응 서강대 교수는 2022년 논문에서 지적했다.
지금껏 양당이 증오의 정치, 극단의 정치로 달려간 것도 잘못된 분석 탓이었다. 양당 극단적 선수들은 유권자들도 자기네처럼 이념적, 정치적으로 양극화 했다고 믿고 상대진영을 죽일 듯 공격에 골몰했다. 이런 정치가 일부 극단적 유권자에게 영향을 미칠 순 있다. 야권 원로 인사인 유인태는 이재명 피습에 대해 “워낙 우리 정치가 서로 상대를 악마화 하면서 증오만 키워온 업보가 아닌가”하고 말했을 정도다.
지금처럼 유권자들이 이념 양극화 없는 정서적 양극화를 보이고 있을 때는 해법도 달라야 한다. 여야는 극단적 정치를 멈추고, 정부는 더 많은 중도파와 무당파를 보고 정책을 펴야 했다.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는, 그래서 부글거리는 ‘조용한 다수’의 요구를 반영해 대통령 지지도를 높여야 정국이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다. 왜 또 대통령 지지도가 나오냐고? 무당파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대통령 지지율이어서다.
● 무당파, 제3지대냐 여당 지지냐
흔히 선거는 구도싸움이라고 한다. 거대양당의 소금물에서 빠져나온 두 전직 당 대표를 비롯해 양향자, 금태섭, 또 ‘상식과 원칙’ 팀 등이 제3지대 합종연횡을 모색하는 모양이다. 이들이 ‘적(敵)만 아니면 다 우리편’으로 한데 모여 기호 3번을 엮어낼지는 아직 모른다. 이 당, 저 당, 싸움당 싫은 중도파 및 무당파가 제3당을 주시할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다.
이한수 아주대 교수는 2023년 논문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증가하면 여당 대비 야당 비율과, 여당 대비 무당파 비율은 유의미하게 감소한다고 했다(‘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정당 지지 변화에 대한 거시적 탐구’). 대통령에 대한 긍적적 평가를 한 야당 지지자들과 무당파가 여당에 대해 긍정적인 신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2017년 이한수의 연구 결과와 부합한다.
● 어게인 2016년? 어게인 실용주의?
2016년 제3당의 등장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여당인 지금의 국힘, 즉 새누리당은 ‘진박(진짜 박근혜) 대 비박’ 공천으로 대통령당 변신을 꾀해 국민의 실망을 샀다. 운동권 물을 빼는 듯했던 민주당은 비례대표 공천 파동을 겪으면서 ‘도로 친노(친문)당’으로 부활했다. 반면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창당공신들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양당 공천 싸움에 실망한 부동층이 몰려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 일단 성공했다(오래가진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잊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록은 남아있다. 2021년 12월 12일(공교롭게도 12·12다) 국힘 외연 확장 기구로 만든 새시대준비위원회 현판식에서 당시 대통령후보 윤석열은 “국민의힘도 실사구시, 실용주의 정당으로 확 바뀌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선거대책위원회에서 담기가 아직 쉽지 않은 중도와 합리적 진보를 (새시대준비위가) 다 포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때는 그가 대통령 되면 정말 국민통합을 이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 대통령은 과연 무당파를 돌릴 수 있을까
정치 양극화는 정치 엘리트만의 현상이라 해도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기에 심각하다. 민주당 소금기가 묽어질 기미는 단언컨대, 없다. 국힘도 공천관리위원회 구성을 보면 대통령당으로 달려갈 조짐이 보인다. 이 틈을 뚫고 중도·개혁신당의 제3지대가 꿈틀대는 상황이다.
갤럽 최근 조사 결과 4월 총선에서 ‘정부 지원론’이 35%인 반면 ‘정부 견제론’은 51%였다. 보수 유권자 65%가 여당 승리, 진보 유권자 83%가 야당 승리를 기대한 건 당연하다. 그러나 중도층에서 여당 승리(27%)보다 야당 승리(56%) 기대가 많다는 건 정부여당이 가슴을 칠 일이다. 무당층도 마찬가지다. 절반이 신당을 포함한 야당 승리를 원했고 여당 승리를 원한다는 응답은 고작 15%다.
석 달 남은 총선, 윤 대통령의 지지율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한동훈 국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개인기만으론 불가능하다. 대통령은 과연 중도·무당파를 돌려세울 수 있을 것인가.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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