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영상의 울림…1995년 ‘모래시계’, 2023년 ‘경성크리처’ [TV덕후감]
지난 5일 파트2를 공개한 ‘경성크리처’(넷플릭스)는 일제강점기 731부대 생체실험을 전면에 내세웠다. 1945년 경성에 사는 두 청춘의 이야기와 크리처(괴물)라는 장르를 잔혹한 생체실험에 녹여냈다.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료 화면을 활용해 큰 울림을 주기도 했다. 10회에 등장하는 731부대 생체실험 사진은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재현했다. 같은 회차에 나오는 일왕의 태평양전쟁 항복 선언 라디오 방송은 디지털 녹음화 해 공개된 음성을 그대로 썼다. 정동윤 감독은 지난 10일 인터뷰에서 “생체실험 장면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고 했다.
자료 화면이 다큐멘터리처럼 활용돼 감정 기폭제 구실을 톡톡히 한 대표적인 드라마가 ‘모래시계’(SBS)다. 1995년 방영한 ‘모래시계’는 카지노 대부의 딸 윤혜린(고현정)과 조직폭력배 박태수(최민수), 검사 강우석(박상원)을 통해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격동의 현대사를 그린다. 드라마에서는 처음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뤘는데, 실제 영상을 적재적소에 삽입해 당시 상황과 아픔을 잘 묘사했다. 7~8회에는 5·18 광주에서 계엄군에 폭행당하는 시민들의 모습, 10회에는 1980년 9월1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 장면도 등장한다. 6회에는 시민들이 “군부독재 물러가라”고 외치며 행진하는 사진도 나온다. 송지나 작가는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애쓴 이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이 드라마를 썼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7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김종학 피디 10주기 추모 행사에서 “감독님이 내가 다 막아줄 테니 하고 싶은 이야기 마음껏 하라고 해서 쓴 게 ‘모래시계’였다”고 밝혔다.
실존 인물을 등장시켜 아픈 역사의 흔적을 곳곳에 배치해둔 드라마의 시초 격이 ‘모래시계’다. ‘경성크리처’도 역사가 담겨 있는데, 장태상(박서준)이 운영하는 전당포 금옥당에는 시인 윤동주가 맡기고 간 코트가 걸려 있다. “윤동주 선생이 후배들 밥 사 먹이느라 맡겼는데 끝내 못 찾아갔다”고 장태상은 말한다. 옹성병원 생체실험에 동원된 조선인 중에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바로 넘어온” 이들도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형무소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았다는 실제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모래시계’는 “나 떨고 있니”라는 대사가 나오는 사형장 장면이 대표적이지만, 24부 곳곳에 굴곡진 역사가 숨겨져 있다. 1회에서 “대통령이 되어 쓰레기들을 없애겠다”던 고교생 박태수는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이유로 육사에 지원했다가 떨어진다. 2회에서 대학생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수업을 거부하고, 6회에 나오는 정일방직 여공들의 야당 당사 점령 사건은 1979년 8월 와이에이치(YH)무역회사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에서 가져왔다. 7회 1980년 광주 한국방송(KBS)과 문화방송(MBC) 방화 사건과 11~12회 삼청교육대 이야기 등 매회 먹먹한 역사를 기록했다.
‘모래시계’는 이미 촬영이 완료된 장면을 다시 찍는 등 고증에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신영균 전 에스비에스프로덕션 대표는 지난해 김종학 피디 추모 행사에서 송지나 작가가 집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주도 개인 별장을 빌려준 일화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모래시계’는 이런 노력으로 한국 드라마의 새 역사를 썼다. 김종학 피디와 송 작가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과감하게 현대사를 다루기로 마음먹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나 등장한 ‘경성크리처’는 ‘모래시계’가 던진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모래시계’ 9회에서 윤혜린은 학생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된 뒤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학내 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후 그는 자폐증세까지 보일 정도로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수많은 윤혜린과 그런 그를 비판했을 사람들한테 ‘경성크리처’는 말한다. 모진 고문을 겪으면 “사람이 사람일 수가 없는 거”라고. “그런 상황에서 배신한다 해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모래시계’ 마지막 장면에서 강우석은 “남은 사람에겐 남겨진 이유가 있을 거”라고 되뇌었다. 그 답을 찾아 드라마는 ‘미스터션샤인’(tvN·2018)과 ‘오월의 청춘’(KBS2·2021)을 지나 ‘경성크리처’에 이르렀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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