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30억 명이 올해 선거…민주주의는 괜찮을까?
우리나라 총선이 석 달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올해 중요한 선거를 치르는 나라는 우리뿐만이 아니다. 2024년에 대선이나 총선을 치르는 나라는 모두 50여 개 국, 인구로는 전 세계 절반인 32억 명 수준이고, GDP로는 전 세계 41%에 해당한다. 2024년은 민주주의 역사상 최대 선거의 해로 꼽힌다. 2048년까지는 수적으로 이에 필적할 해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선거를 치른다'는 건 통상 민주주의의 징표로 받아들여진다. 선거조차 치르지 않는 나라에 비해 민주주의적일 것이라는 예상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선거를 치른다'는 것 자체는 민주주의를 담보하지 않는다. 북한조차도 선거를 치른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이번 주말 대만을 필두로 러시아, 이란, 미국,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베네수엘라, 유럽연합의회,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올해 큰 선거를 치른다. 각각의 사정을 뜯어보면, 내용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오히려 후퇴할 것으로 우려되는 경우가 많다.
비민주적 성향의 후보가 이길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미국), 전체주의 또는 포퓰리즘 성향의 지도자가 권력을 더욱 다지거나 연장하는 절차로 선거가 이용되는 경우(러시아, 인도), 강력하고 인기 있는 지도자가 겉보기엔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후계자를 내세워 '왕조 계승'을 하는 경우(인도네시아, 멕시코), 선거의 장을 활용해 극단주의자들이 세력을 넓히고 국가의 시스템에 뿌리를 내리는 경우(유럽) 등이다.
선거는 확대되는데 민주주의는 퇴보?
각국에서, 사람들은 왜 언론의 자유나 사법부의 독립 등 어렵게 쟁취한 시민적 자유의 보루를 스스로 포기하는 투표를 할까. 유권자들은 왜 개인의 자유를 증진하는 게 아니라 자유를 억압하는 지도자에게 표를 던질까. 세계적인 국제정치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신년 특집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
이 특집에서 추출해 낸 한 마디의 키워드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민족주의'로 번역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내셔널리즘은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민주의, 국수주의, 자국우선주 등을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어서, 이 기사에서는 그대로 '내셔널리즘'이라고 쓰고자 한다.
대표기고자로 나선 인도의 정치학자 프라탑 바누 메타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소수의 목소리도 존중하는 관용적 민주주의로서의 리버럴리즘이 2024년에 이르러 중요한 변곡점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내셔널리즘이 불편한 동거를 이어왔지만, 둘 간의 긴장관계가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을 유권자 장악의 도구로 쓰는 정치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2024년은 과연 내셔널리즘이 가하는 위협으로부터 각국 유권자들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지 판가름 나는 해라는 것이 그의 관측이다. 여기서 내셔널리즘이란, 쉽게 말하자면, 나라와 민족의 차원에서 나와 남을 가르고 대립시키는 정치다.
'나라와 민족의 적' 활용하는 정치가 민주주의 위협
1) 누가 '우리'에 포함되는가 (국민의 범위/자격 문제)
2) 어떤 버전의 기억을 국민의 역사로 공인할 것인가
3) '국민의 뜻'을 누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4) 글로벌화(세계화)의 힘과 부작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1990년대 이후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각국의 빈부격차가 커진 가운데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다. 각국 경제가 마비되면서 난민과 불법이민 문제도 심각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등이 일어나면서, 각국은 조화롭고 자유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각자도생'을 시도한다.
[ https://premium.sbs.co.kr/article/ZndgelifKn ]
이런 맥락 속에 각국에선 '우리 국익 우선', '우리 민족/국민의 순수성을 지키자' 등의 구호를 내세운 정치인들이 더 많은 표를 얻는다. 내셔널리즘과 포퓰리즘을 결합한 전체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이 '스트롱맨'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 인도의 모디 총리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시진핑 중국 주석도 비슷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누가 우리 국민 또는 민족인가 / 우리 국민 또는 민족은 어떤 역사를 믿어야 하는가 / '국민의 뜻'은 무엇이며, 이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인가 등을 결정하는 칼자루를 독차지하고 마구 휘두른다. 선거에서 진 소수라도 입장을 존중하는 다원주의 따위는 무시하고, 의견이 다른 자를 '국가의 적' '민족 반역자'로 몰아세워 탄압하는 정치를 펼친다. 이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가 희생되고, 개인의 헌법적 자유와 권리가 제약당하기 일쑤다. 시진핑이나 푸틴이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이 딱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 지도자 또는 정치세력 다수가 올해 선거를 통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거나 후계자를 통해 세력을 이어가게 될 예정인 것이다.
필리핀 언론인으로서 202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리아 레싸는 이렇게 갈파했다.
"우리는 자유를 억압하는 지도자를 민주적 방식을 통해 선출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살지 죽을지, 2024년 말이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내셔널리즘-포퓰리즘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문제는 한 나라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지도자들은 인접국 또는 경쟁국의 존재를 '적'으로 부각시키고, 적과의 대결을 주도할 강력한 지도자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면 그 상대국가에서도 거기에 맞서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2024년은 내셔널리즘과 비민주적 민주정치의 폐해가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은 나라를 위협하는 해가 될 거라는 우려가 나온다.
선거로 집권한 권력자가 정권 연장을 추진하는 나라들을 보면, 많은 경우 이웃나라 또는 세력을 잘 활용(?)하고 있다. 교묘한 방법으로 국민을 자극해 사법을 정치에 복속시키고, 반대여론에 재갈을 물리고, 아예 미디어가 국가권력에 종속되게끔 소유구조를 바꾸는 등등의 조치를 한다. 이런 조치들의 효과가 결합되어, 선거를 치르지만 민주주의가 질적으로는 퇴보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선거 제도 자체는 민주주의의 실질을 보장하지 않는다. 히틀러의 나치도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사법을 장악해 독재권력을 굳혔다.
러시아와 중동부유럽 역사를 연구하는 티모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이런 얘기를 한다. 1920~30년대 독일 등 중부유럽 사람들은 의회가 난장판이 되어 제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차라리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우리의 감정을 반영해 싹 쓸어버리고 일이라도 화끈하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 결과가 나치의 집권이었다는 것이다. 스나이더가 이 얘기를 한 맥락은 공화당 하원의원들이 국정을 분탕질치던 2022년,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교훈의 유용함은 미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이고 싸워야 그 실질이 유지되는 시스템이다. 민주주의의 형식과 절차를 악용해 비민주적인 정치를 하려는 자들은 언제나 있었고, 어디에나 있다.
이제, 올해 선거를 치르는 주요 국가들의 사정을 짚어보자.
미국 - 2024년 세계 최대의 불안 요인
트럼프는 자신의 혐의를 다루는 각종 재판의 법정을 오히려 정치홍보의 장으로 적극 활용하는 중이다. "내가 당선될 것 같으니까 바이든이 검찰과 사법부를 앞세워 나를 탄압한다. 나는 당신들을 대리하여 박해받는 존재다. 내가 쓰러지면 그다음엔 당신들이 당할 것이다." 트럼프가 지지자들에게 반복 주입하는 메시지다.
트럼프는 공화당 내부적으로는 각 주별 경선의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물밑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자신에게 걸린 재판들이 본격화되어 유죄판결이 나오기 전에 공화당 대선후보로 조기 추대되려는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이 다시 대통령이 될 경우 펼칠 '복수의 정치'에 행정부와 사법부, 심지어 군대까지도 마음껏 활용할 것임을 공언하고 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퇴조하고,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 몰라라 하는 세력이 백악관을 차지하게 된다면 전 세계가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2024년 세계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사안으로 '미국의 혼돈'을 꼽는다.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서방의 침탈로부터 어머니 조국을 지켜내는 전쟁'으로 포장하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내셔널리즘적 전체주의와 포퓰리즘의 요소를 다 갖고 있다.
인접 친러국가 벨라루스는 푸틴의 하수인 격인 루카셴코가 대통령으로 앉아있다. 벨라루스도 2월 25일 의회선거를 치른다. 루카셴코 역시 반대파를 강력하게 탄압해 감옥으로 보내거나 외국으로 쫓아낸 상황이다.
우크라이나는 원래 3월 말에 대통령선거를 치러야 하지만,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연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격전에서 별 진척을 거두지 못한 우크라이나의 여론상황은 매우 복잡한데, 러시아가 여론조작을 시도한다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우려는 개연성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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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 hyunsi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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