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향적봉, 산 이름처럼 넉넉하게 베푸는 마음 채워오다 [ESC]
2024년 새해가 밝았다. 1월은 수많은 ‘결심’이 모이는 달이다. 단단한 눈뭉치처럼 결심을 다지기 위해 길 떠나는 이가 많다. 허튼짓 같지만, 상징적인 공간에서 다짐을 하면 왠지 한 해 소망이 이뤄질 듯하다. 각오가 선명할수록 결심에 근접한다고 느낀다. 새해 첫날 해맞이를 하기 위해 전국에 내로라하는 일출 명소를 찾았던 이들의 마음도 같으리라.
ESC가 새해맞이 최적화된 ‘결심 장소’로 덕유산 향적봉을 골랐다. 예부터 새해 이 산에 올라 지난해 온갖 일을 비워낸 이는 산이 ‘넉넉하게 베푼다’는 이름 뜻처럼 그 빈자리에 ‘덕과 여유, 삶의 기쁨과 희망’ 등을 채워준다고 했다. 새해 결심 다지기용 여행지로 이만한 데가 없다.
설천봉-향적봉, 도보 왕복 1시간
덕유산은 197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으로 경남 거창군·함양군, 전북 장수군·무주군에 걸쳐 있다. 남한에서 네번째로 높은 산이다. 구천동계곡, 칠연계곡 등 단풍 명소로도 유명한 계곡을 품은 산은 계절마다 다른 빛깔로 사람들을 맞는다. 특히 겨울에는 꽃처럼 화려한 상고대(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가 지천으로 깔린다.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은 해발 1614m로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다. 곳곳에서 해발 700m 이상에서만 자라는 주목을 발견한다. 아무리 풍광이 빼어나도, 새해 결심이 중요하다고 해도 등산 초보자에게 설산 최고봉은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덕유산은 초등학생도, 노인도 쉽게 오를 수 있는 마법이 작동하는 산이다. 지난 5일 이른 아침 향적봉으로 향했다.
“백련사(덕유산에 위치한 사찰·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요? 향적봉에서 가믄 가팔라서, 위험하다니까유! 그냥 향적봉 갔다가 고대로 내려와유! 이것도 음청 좋다니까유!” 무주군청 소속 문화해설사 임옥임 선생이 말했다. 무주에게 태어나 줄곧 무주에서 산 그는 말투가 전라도와 충청도 그 사이 어디쯤 있다.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임옥임인 그를 전날 만나 상의했다. 향적봉을 오를 거라고 했다. 그가 대뜸 물었다. “등산 ‘선수’신가?” 산이라고는 남산 몇 번 오른 게 전부다. 그는 단호하게 “절대 안 돼여!”라고 했다. “근디 더 좋은 방법이 있응께. 애들덜 올라갈 수 있고 노인도 쉽당게. 글고 그게 더 좋아유!” 그가 추천한 방법은 무주덕유산리조트가 운영하는 관광곤돌라를 이용하는 것.
관광곤돌라는 산 아래 무주덕유산리조트 ‘설천베이스’에서 향적봉 아래에 있는 봉우리 설천봉(해발 1520m)까지 운행한다. 편도 기준 20여분 걸린다. 성인 왕복 요금은 2만2천원(편도 1만7천원). 소인(36개월~초등학생)은 왕복 1만7천원(편도 1만4천원). 2월까지는 주말과 공휴일의 경우 사전예약이 필수다. 평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운행한다. 토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운행한다(하행 기준). 하지만 날씨에 따라 운행 시간은 바뀔 수 있다. 덕유산리조트 관광곤돌라 탑승장(무주군 설천면 만설로 185·063-320-7381)에 문의해 확인하는 게 좋다. 관광 곤돌라는 요즘 하루 3천명이 몰린 정도로 인기다.
오전 10시, 곤돌라 탑승장에 도착했다. 임 선생이 물었다.
“아이젠은 준비하셨지유?”
“장갑만 준비했는데요, 향적봉까지 편도 20여분밖에 안 걸린다고 아는데, 아이젠 없이 올라가지요.”
“워메! 클날 소리! 절대 안 돼유. 갔다가 내려오는 데 1시간은 넘게 걸리지여. 허지만서리, 방법은 또 있지유! 일단 가봅시다!”
곤돌라를 탔다. 찌직찍 움직였다. 곤돌라는 초속 15m 이상 강풍이 불면 운행을 중단한다고 한다. 설천봉에서 향적봉까지 거리는 600m. 곤돌라가 올라갈수록 시야에 설탕 같은 흰 눈을 머리에 얹은 나무들이 보였다. 덕유산에는 총 898종의 식물과 33종의 포유류, 122종 야생 조류, 2206종의 곤충류, 9종의 양서류, 13종의 파충류 등이 산다. 서어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노간주나무, 개비자나무, 털윤노리나무 등 이름도 낯선 나무들도 서식한다. 개불알꽃, 박새큰앵초 같은 야생화도 자란다.
“워매! 갑자기 안 보이네·!” 곤돌라 유리창 네 면이 갑자기 흰 보자기를 씌운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운무다. “무섭지예! 난 괜찮지만!” 임 선생이 여행객을 걱정한다. 하지만 공회전하며 부질없는 지난 한해를 버터냈다고 생각하는 여행객들에게 운무는 신선한 자극이다. 산에 오르는 보람이다. 이윽고 도착하자 임 선생은 한옥으로 지어진 기념품숍 상제루로 갔다. “여거, 아이젠 빌려준다니깡요. 어여 골라보쇼.” 한 벌당 5천원이다. 상제루를 나서자 아이젠의 효용을 절감했다. 땅은 꽝꽝 언 눈과 얼음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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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등반객들 서로 “새해 복 많이” 인사
설천봉도 운무가 점령했다. 운무 때문에 솜사탕 한가운데 박힌 것 같았다. 풍경이 달달해서다. 그 사이로 한명 두명 세명, 사람들이 조금씩 형체를 드러내며 나타났다. 에스에프(SF) 영화 저리가라다. 그들은 크게 소리쳤다. “예쁘다! 멋지다!” 30대 직장인 이예림씨도 그들 사이에 있었다. 인천, 청주, 울산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직장 동기 3명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에스엔에스(SNS) 보니, 이 산이 너무 예쁘고, 새해라서 왔다”고 했다. 임 선생이 손가락으로 주목을 가리켰다. “요기가 사진 포인트랑게요. 잘 찍어보세요. 용이 여의주 문 사진이 나오지라유.” 그의 말대로 가지가 부러질 듯 휘어진 주목을 자세히 보니 가지 몇 가닥이 마치 용 머리처럼 보였다. 그는 안타까워했다. “운무만 아니면 산 아래가 다 비는데. 겁나 아름다운디. 운무가 출동하믄, 이것이 다시 오라는 소리여. 일부러 안 비주는(보여주는) 거지유.”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각오를 단단히 할 필요는 없었다. 덮인 눈이 꽝꽝 언 나무 데크길은 고불고불 잘 정돈되어 있었다. 두 사람 겨우 지날 갈 정도의 폭인데, 여행객들은 서로 “새해 복 많으세요”라는 인사를 나누며 스쳐 갔다. ‘확증편향’ ‘편 가르기’ ‘혐오와 광증’ 등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문명의 오류를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데크 길 오르자마자 왼쪽으로 꺾인 길에 접어들었다. 임 선생이 왼쪽 난간 밖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요거 찾아내면 돈 많이 번다 안 하요.” 한참을 보다가 웃고야 말았다. 나무 아래쪽에 돼지 코 모양의 구멍이 있었다. 돈 대신 마음의 평화와 근근이라도 버틸 기운을 빌었다.
걸을 때마다 자박자박 대신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데크 위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나무는 서로 엉겨 아치를 만들었다. 눈꽃 궁전이다. 데크 왼쪽 밖과 오른쪽 밖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서로를 탐하듯 반대편으로 가지를 뻗쳤다. 곳곳엔 자연이 만든 포토존이 있었다. 상고대도 반겼다. 바람은 일렁였다. 찬 뺨에 닿자 박하사탕처럼 기분이 상쾌해졌다. 땀도 났다. 그리고 올라온 길을 돌아봤다. 뿌듯했다. 지나온 그 길이 과실 같았다. 한해 농사에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또, 단순해졌다. 명료해졌다. 머리와 몸에 빈 공간이 생겨났다. 거기에 덕유산이 ‘넉넉하게 베푸는’ 마음을 심었다. 세상 살아갈 힘은 아량에서 나온다. 이윽고 도달한 향적봉. 많은 이들이 운무와 한몸이 되어 셔터를 눌렀다. 해발고도가 적힌 돌 앞에 긴 줄이 섰다. 진풍경이다. 그들 사이로 운무가 느리게 더 느리게, 스며들어 갔다가 나왔다 했다.
하산 길에 아이들을 만났다. 경상도 상주에서 왔다는 11살 이서하양과 6살 홍주은양. 아이들은 눈 집게 도구로 눈사람이나 러버덕을 만들어 데크 난간 모서리에 올렸다. 홍양은 “매년 오는데, 이번에 네번째다. 눈으로 놀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이들 어린이의 어머니인 최정원·박공진씨는 “상주에선 눈을 못 본다. 매년 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오르기 어렵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어디선가 쿠킁 소리가 들렸다. 산이 크게 웃고 있었다.
무주/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겨울철 설산 등반 이것만은 준비하자
기상 정보를 제일 먼저 체크한다. ‘기상청 날씨누리’를 활용하면 좋다. 겨울 등산용 등산화, 사이즈가 넉넉한 양말, 방수나 방풍 되는 등산복, 보온용 속옷, 아이젠, 장갑 등은 필수 품목. 초콜릿, 사탕 등 비상식량과 뜨끈한 물 담은 보온병, 소형 조명, 핫팩, 우의 등도 기본 준비물이다.
돌짬뽕·오리구이 먹고, 맛 좋은 디저트까지
새해 결심도 식후경
‘새해 결심’도 식후경이다. 지역민들이 잘 가는 맛집과 여행객들이 환호하는 카페를 소개한다.
무주짬뽕 : 두꺼운 돌판에 지글지글 익혀 나온 짬뽕이 대표 메뉴. 4년 전 이 메뉴를 개발한 주인 겸 요리사인 양진호씨는 온도 유지를 위해 돌을 생각했다고 한다. 한식당을 운영했던 모친 손맛을 이어받았다. ‘돌짬뽕’의 넉넉한 양과 매콤한 맛 때문에 젊은 층에게 인기가 많다.(무주군 무주읍 주계로8길 12)
무주미향 : 10년 전 문 연 무주 대표 맛집이다. 호텔 요리사 출신 박병진씨와 그의 아내 유진아씨가 운영한다. 오리찰흙구이가 대표 메뉴. 박씨가 개발한 메뉴로 20여가지 견과류 등을 오리 배에 넣고 토기에서 4시간 동안 익혀 만든다. 유씨는 “무주는 나물 요리 집이 많아서 좀 다른 것 해보자고 만들었다”고 말했다.(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723-3)
전북제사 1970 : 1970년대 잠사 공장이었던 터에 만든 카페로, 요즘 인기 많은 ‘인더스트리얼 카페’다. 카페 자체가 관광지다. 서바이벌 게임장도 있다. ‘불멍’하기 좋은 시설을 갖췄다. 누에에서 실 뽑는 공장이었어서 초장기엔 ‘뽕다방’이라고 불렸다. 사과청과 우유를 섞은 ‘눈 덮인 사과’가 인기 메뉴다.(무주군 무주읍 오산리 1050-1)
무주창고 : 젊은 층이 무주여행에서 꼭 찾는 카페. 본래 쌀 창고였다. 옛 모습 그대로인 천장, 세련된 계단식 좌석, 수준급 빵맛 등이 인기다. 천마가 유명한 지역 특색을 살려 만은 ‘마밤라떼’와 ‘육쪽크림치즈’ 빵이 시그니처 메뉴다.(무주군 적상면 사신리 502)
술고지 : 1994년에 개업한 덕유양조가 문 연 카페로, 와인 족욕 체험(40분·1만6천원)을 할 수 있다. 와인 시음도 가능하다. 이재국 대표는 한국와인사에 대부 같은 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행사에 술을 납품한 적 있다. 1999년엔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무주군 안성면 장무로 1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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