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하면 죽여라”… 종교범죄 고발했다가 30년째 ‘망명’중인 이 작가 [나쁜 책]
종교 광신도 젊은이들이 들이닥칩니다. 폭력배는 말 한마디 없이 테이블, 의자, 텔레비전, 책장을 부수더니 여동생을 끌고 나갑니다. 여동생이 사라진 거리엔 어머니 비명이 남았습니다.
타슬리마 나스린의 소설 ‘LAJJA(라자)’에 적힌 실화입니다. 이슬람교가 국교(國敎)인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힌두교 학살’을 고발한 가슴 아픈 금서입니다.
이 책 때문에 작가 타슬라마 나스린은 1994년부터 30년째 정치적 망명 중이며, 검거되면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한국 미번역서인데, 해외배송으로 원서를 구해 며칠간 숙독했습니다. 한 인간의 평생에 걸친 영혼의 도정과 같은, 매캐한 비극 속으로 안내합니다.
먼저, 국경을 마주 보는 인구 14억의 인도와 1억7000만명의 방글라데시는 국제관계에서 앙숙 중의 앙숙입니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인도는 힌두교이고,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슬람 사원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asjid)’ 철거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원은 인도 북부도시 아요디아에 건립된 이슬람 종교시설이었습니다. 한 종교에서 추앙하는 건물을 타 종교인이 부수는 건 분명히 야만적입니다. 그런데 바브리 마스지드는 위상이 특이했습니다. 힌두교인들이, 바브리 마스지드가 세워진 위치를 힌두교의 신(神) 람의 출생지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무굴제국 황제이자 무슬림인 바브르(Babur·1483~1530)가 부하를 시켜 이 자리에 사원을 세웠습니다. 땅을 점령한 뒤, 이슬람교 사원을 건립한 것이지요. (바브리 마스지드도 ‘바브르의 이슬람 사원’이란 뜻입니다.)
인도 내 힌두교 광신도들이 바브리 마스지드를 파괴하자, 인도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습니다. 인도 전역에서 2000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사건 발생지 인도를 넘어, 옆나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벌어졌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①인도와 방글라데시가 앙숙이란 점, ②1992년 바브리 마스지드가 강제 철거됐다는 점, 이 두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자, 이제 소설로 들어가 볼까요.
힌두교 집안에서 태어난 남성 주인공 수란잔은 바브리 마스지드에서 ‘난동’을 피운 힌두교 광신자들에게 분개합니다. 권총 한 자루만 주어진다면 “세계 각지의 모든 종교 광신자를 총으로 쏴버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혐오의 감정조차 사치였습니다. 국교가 이슬람교인 방글라데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폭력배로 둔갑했던 겁니다. 수란잔은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벌어진 약탈과 방화, 강간과 살인의 ‘인간 사냥’ 풍경을 실시간으로 관찰합니다.
◎ ‘수란잔이 더 큰 거리로 들어서자 한 무리의 (무슬림) 소년들이 소리쳤다. “저 자를 잡아라. 그는 힌두교도다.” 소년들은 이웃이었다. 7년 동안 그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 그들을 만났다. 그들은 수란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수란잔은 소년들에게 노래를 가르쳤고, 무료로 치료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힌두교’란 이유로 위협하는 것이다. (중략) 수란잔은 불에 타들어가는 여러 채의 집을 보았다. 수란잔이 자주 책을 사던 서점도 있었다. 발치에 불에 탄 책이 놓여 있다는 생각에 그는 몸을 떨었다.’ (27~28쪽)
◎ ‘수란잔의 어머니 키론모이는 문으로 가서 누구냐고 물었다. 중얼거리는 대답이 들렸고, 키론모이는 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7명의 청년이 들이닥쳐 키론모이를 옆으로 밀쳤다. (중략) 마야(수란잔의 여동생)는 침대기둥을 붙잡았지만 청년들은 잔인했다. 그들은 마야가 잡은 침대기둥을 부서뜨린 다음 마야를 끌고 떠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뒤쫓았다. 두 남자가 키론모이를 밀쳐냈다. 사라진 딸을 쫓아가는 것은 헛되고 헛된 일이었다.’ (148~149쪽)
‘종교 훌리건’이 된 종교 극단주의자들이 난입해, 수란잔의 여동생 마야를 데려간 겁니다.
◎ ‘집에 돌아온 수란잔은 바닥에 쓰러져 다리를 쭉 뻗었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이 동생 마야를 집단 성폭행했을 게 틀림없다고 수란잔은 생각했다.’ (152쪽)
바브리 마스지드에서 자행된 극단주의자 폭력이, 옆나라에 살던 선량한 가정의 어린아이를 납치 강간하는 결과로 이어진 겁니다. 종교를 빙자한 폭력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수란잔에게 믿기 어려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마야처럼 생긴 소녀가 다리 아래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강물에 뜬 시체는 수란잔의 여동생 마야가 맞을까요.
1993년 2월 출판된 뒤, 작가 나스린을 둘러싼 후폭풍은 대단했습니다. 소수자 박해, 종교적 불관용, 인간 악의 기록물이었던 이 책이 신성모독 논란까지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고국 방글라데시에서 ‘타슬리마 나스린’이란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5개월 만에 ‘LAJJA’를 금서로 지정하고 회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책은 이미 6만부가 판매된 후였습니다.
그녀의 목에는 ‘무제한적인 거금’이 걸리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나스린은 여권을 빼앗겼고, 그녀가 참가 중이던 도서박람회장에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쳐들어와 모조리 부수기도 했습니다. 무슬림 공개집회에서 “종교적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요구당했고, 처형을 요구하는 총파업까지 벌어져 방글라데시가 마비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았고, 망명 생활과 함께 수십 권의 작품을 써냈습니다. (모두 방글라데시에선 금서였지만 말이지요.)
스웨덴으로 망명했던 그녀는 미국으로 재망명했고,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며 방글라데시에 입국했다가 테러단체의 제1 표적이 되자 프랑스로 떠나는 등 평탄하지 않은 시간을 겪었습니다.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렇게까지 협박했다고 합니다. “그녀를 산 채로 불태워버리겠다.”
2010년 들어 그녀는 인도에 거주하는데, 다행히 인도 정부는 “나스린은 자신이 선택한 국가에 남을 권리가 있다”고 허가해줍니다. 2023년 최근 ‘Burning Roses in My Garden’이란 제목의 신작 시집을 출간한 걸 보니, 아직 생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구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기독교식 원리주의뿐 아니라 타 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교 근본주의로 인한 대부분의 모든 불행은 ‘내가 믿는 신의 경전에는 절대 오류가 없다(무오주의·無誤主義)’는 그릇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힌두교 3대 경전이자 힌두교의 신약성경(구약성경은 ‘베다’)으로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 몇 문장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 서점에서도 수십 종의 판본을 판매 중이기 때문에 독서가 어렵지 않습니다.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위 문장은, 왕위 계승을 위한 전쟁을 거부하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가 참전(參戰) 당위성을 설득하는 대목입니다. 몸이 죽는다고 해도 자아(본래의 나이자 불멸의 자아, 즉 아트만)는 불멸하며, 인간의 몸은 윤회의 과정을 거치는 중인 껍데기이고, 진짜 아트만은 따로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윤회의 측면에서, 불교와 대단히 유사하지요?)
그런데 ‘아트만(인간의 본래 자아)’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전해지는 저 문장을, 2023년 현대사회에서, “죽여도 죽인 게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니, 싸워서 죽이고 죽어라”라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어찌 될까요.
무슬림 절대 경전인 쿠란의 몇 문장은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오인되어 세상에 떠돕니다. 이는 무슬림 극단적 혐오의 근원인데, 일부를 옮겨 적어 봅니다.
(※쿠란은 옮겨 적는 일이 금지되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이니 양해 바랍니다.)
◎ ‘그리고 금지된 달들이 지나갔을 때 너희가 우상숭배자들을 보는 대로 죽이고 포로로 잡고 공격하라. 그리고 모든 매복처소에서 엎드려 그들을 기다리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기도를 준수하고 쟈카트를 지불할 때 그때는 그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라. 실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시니라.’(쿠란 9장 5절, 안동훈·박병현·성하창의 번역, 사우디아라비아에 위치한 아하마디야 무슬림협의회에서 발행한 쿠란을 저본 삼았음.)
위 쿠란 9장 5절의 앞 문장만 보면 마치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라는 호전적인 문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5절 뒷부분과, 이어지는 6절을 읽어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 ‘만약 우상숭배자 가운데 어떤 자라도 너희로부터 보호를 구하거든 그를 보호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그를 안전한 그의 처소로 옮기라. 그것은 그들이 무지한 백성이기 때문이니라.’(쿠란 9장 6절)
이슬람교도 충분히 관용의 종교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경전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악용하거나 오독(誤讀)했던 인간이 문제였던 건 아닐까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벌어진 ‘학살’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힌두교인의 바브리 마스지드의 철거도, 무슬림들의 방글라데시 다카에서의 학살도 종교적 관점에서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타슬리마 나스린은 저 당연한 사실을 지적했는데, 그녀는 삶의 모든 걸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 작가 나스린이 유죄로 선고되는 세상에선 어떤 종교적 화합도 불가능할 겁니다.
진정한 종교란 타 종교와의 관용 위에서 세워지는 게 아니었던가요. 불화했던 타인과의 화해가 종교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할 테니까요. 그러나 그건 너무 멀고 먼 이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 ‘무슬림 폭력’을 다뤘다고 해서, 그녀가 힌두교의 바브리 마스지드 철거를 옹호했던 것도 아닙니다. 책 ‘LAJJA’에서 그녀가 힌두교 광신도들의 폭력을 날선 문장으로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힌두교 옹호가 아니라 양비론, 나아가 인간이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광기를 고발한 것이지요. 종교적 이상과 정치적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녀는 성찰합니다.
◎ ‘너무나 많은 불안과 결핍이 있었다. 많은 피를 흘렸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20세기 말에도 우리가 이런 잔혹행위를 목격해야 했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종교의 깃발을 휘날리는 것은,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 정신을 무(無)로 만드는 쉬운 방법임이 항상 입증되어 왔다.’(36쪽)
인간이 인간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폭력 전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임을 타슬리마 나스린은 폭로합니다. 폭력 앞에서 두려움보다 부끄러움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이룬 성취입니다.
이슬람교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로 파트와가 내려진 뒤 실제로 한쪽 눈을 잃은 세계적인 거장 살만 루슈디는, 과거 타슬리마 나스린에게 보낸 공개서한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죽는 것을 기쁘게 바라보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라.”
악(惡)은 선(善)의 반대말이 아니라, 어긋난 믿음이 종교를 잘못 이해하는 순간 잉태되는 하나의 가혹한 현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교적 이상과 우둔한 현실은 늘 불화합니다. 소설가 타슬라마 나스린은 그 사이를 문학으로 메꾸려 했던 중재자로 기억되어야 할까요. 원래 저 중재는 신(神)이 맡았어야 했던 역할이란 생각이 뒤늦게 들지만 말입니다.
※다음주에는 조지 오웰 ‘1984’를 다룹니다. 너무 유명한 작품이지만, 친(親)러시아 국가 벨라루스가 2022년에도 금서로 지정했을 만큼, 영원한 논쟁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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