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하면 죽여라”… 종교범죄 고발했다가 30년째 ‘망명’중인 이 작가 [나쁜 책]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1. 1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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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26] 타슬리마 나스린 ‘LAJJA’
[금서기행, 나쁜 책]은 전 세계 현대의 금서를 여행합니다. 국가가 발행을 중단시킨 문학, 좌우 논쟁을 촉발한 논픽션, 외설의 누명을 쓴 예술, 동서고금의 필화 스캔들을 다룹니다.

종교 광신도 젊은이들이 들이닥칩니다. 폭력배는 말 한마디 없이 테이블, 의자, 텔레비전, 책장을 부수더니 여동생을 끌고 나갑니다. 여동생이 사라진 거리엔 어머니 비명이 남았습니다.

타슬리마 나스린의 소설 ‘LAJJA(라자)’에 적힌 실화입니다. 이슬람교가 국교(國敎)인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힌두교 학살’을 고발한 가슴 아픈 금서입니다.

이 책 때문에 작가 타슬라마 나스린은 1994년부터 30년째 정치적 망명 중이며, 검거되면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한국 미번역서인데, 해외배송으로 원서를 구해 며칠간 숙독했습니다. 한 인간의 평생에 걸친 영혼의 도정과 같은, 매캐한 비극 속으로 안내합니다.

방글라데시 작가 나스린은 이슬람 최고 법률(파트와)에 의해 사형 명령이 떨어진 논쟁적 작가입니다. 31세 때 쓴 소설로 올해 나이 61세가 되도록 30년째 망명 중입니다. 사진은 나스린이 2017년 연설하는 모습. [나스린 공식 홈페이지]
소설책 ‘LAJJA’를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예습
타슬리마 나스린의 소설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두 가지의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전혀 어렵지 않으니 함께 따라가 보시지요.

먼저, 국경을 마주 보는 인구 14억의 인도와 1억7000만명의 방글라데시는 국제관계에서 앙숙 중의 앙숙입니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인도는 힌두교이고,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교이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교의 나라입니다. 두 나라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국경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2021년 인도-방글라데시 국경의 모습. [Dibakar Sanju]
영토가 인접한 두 나라가 불화하는 건, 전 세계 보편 현상입니다. 한일관계, 한중관계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두 나라는 현재도 특히 관계가 매끄럽지 못합니다. 1992년 12월 6일 오후 2시경 벌어졌던 역사적인 사건 때문입니다. (미국 CNN이 사건을 생중계했을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슬람 사원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asjid)’ 철거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원은 인도 북부도시 아요디아에 건립된 이슬람 종교시설이었습니다. 한 종교에서 추앙하는 건물을 타 종교인이 부수는 건 분명히 야만적입니다. 그런데 바브리 마스지드는 위상이 특이했습니다. 힌두교인들이, 바브리 마스지드가 세워진 위치를 힌두교의 신(神) 람의 출생지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무굴제국 황제이자 무슬림인 바브르(Babur·1483~1530)가 부하를 시켜 이 자리에 사원을 세웠습니다. 땅을 점령한 뒤, 이슬람교 사원을 건립한 것이지요. (바브리 마스지드도 ‘바브르의 이슬람 사원’이란 뜻입니다.)

인도 아요디아의 모스크 ‘바브리 마스지드’가 철거되기 전의 모습. 1863~1887년 사이에 촬영된, 현존 유일 사진입니다. 힌두교인들은 이슬람 사원이 건립된 이 자리가 힌두교 최고의 신(神) 람의 출생지에 세워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악감정이 쌓인 힌두교인들 가운데 극단주의자들이 1992년 12월 6일 오후 몇 시간 만에 바브리 마스지드 돔 3개를 완전히 파괴해 버립니다. [Samuel Bourne]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400년 넘은 타 종교의 사원을 일순간 부순다는 건 비(非)문명적이지요.

인도 내 힌두교 광신도들이 바브리 마스지드를 파괴하자, 인도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습니다. 인도 전역에서 2000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사건 발생지 인도를 넘어, 옆나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벌어졌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①인도와 방글라데시가 앙숙이란 점, ②1992년 바브리 마스지드가 강제 철거됐다는 점, 이 두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자, 이제 소설로 들어가 볼까요.

빨간 원이 바브리 마스지드가 위치했던 인도 북부 도시 아요디아이고, 파란 원이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입니다. 인도 내 힌두교 광신자들이 바브리 마스지드를 철거했는데, 엉뚱하게 불씨가 방글라데시 다카로 옮겨붙었습니다. 아요디아에서 힌두교 광신자들이 벌인 일 때문에 다카에서 집단 강간, 강도, 살인이 시작됩니다. ‘LAJJA’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을 고발합니다. [구글 지도 캡처]
“납치된 여동생이 강물에 떴다는 말을 들었네”
작가 타슬리마 나스린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적힌 이 소설 ‘LAJJA’에서, 20대 남성 주인공 수란잔의 입을 통해 그날 이후의 일들을 사유하기 시작합니다.
타슬리마 나스린의 소설 ‘LAJJA’의 모습. 세상이 좋아졌는지 아마존닷컴 클릭 몇 번으로 책이 도착했습니다. 신간은 구하기 어렵고 중고판입니다. [김유태 기자]
인도에서 이슬람 종교시설 바브리 마스지드가 철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방글라데시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힌두교인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또 전쟁이었으니까요.

힌두교 집안에서 태어난 남성 주인공 수란잔은 바브리 마스지드에서 ‘난동’을 피운 힌두교 광신자들에게 분개합니다. 권총 한 자루만 주어진다면 “세계 각지의 모든 종교 광신자를 총으로 쏴버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혐오의 감정조차 사치였습니다. 국교가 이슬람교인 방글라데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폭력배로 둔갑했던 겁니다. 수란잔은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벌어진 약탈과 방화, 강간과 살인의 ‘인간 사냥’ 풍경을 실시간으로 관찰합니다.

◎ ‘수란잔이 더 큰 거리로 들어서자 한 무리의 (무슬림) 소년들이 소리쳤다. “저 자를 잡아라. 그는 힌두교도다.” 소년들은 이웃이었다. 7년 동안 그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 그들을 만났다. 그들은 수란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수란잔은 소년들에게 노래를 가르쳤고, 무료로 치료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힌두교’란 이유로 위협하는 것이다. (중략) 수란잔은 불에 타들어가는 여러 채의 집을 보았다. 수란잔이 자주 책을 사던 서점도 있었다. 발치에 불에 탄 책이 놓여 있다는 생각에 그는 몸을 떨었다.’ (27~28쪽)

방글라데시 무슬림들에게 공격을 받아 집이 무너진 방글라데시 거주 힌두교인들의 모습. 사진은 소설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 없음. [globalvoices.org]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전역을 장악한 악마의 노크가 수란잔 집의 대문까지 두드립니다. 지금까지의 비극은 곧 벌어질 일에 비하면 비극도 아니었습니다.

◎ ‘수란잔의 어머니 키론모이는 문으로 가서 누구냐고 물었다. 중얼거리는 대답이 들렸고, 키론모이는 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7명의 청년이 들이닥쳐 키론모이를 옆으로 밀쳤다. (중략) 마야(수란잔의 여동생)는 침대기둥을 붙잡았지만 청년들은 잔인했다. 그들은 마야가 잡은 침대기둥을 부서뜨린 다음 마야를 끌고 떠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뒤쫓았다. 두 남자가 키론모이를 밀쳐냈다. 사라진 딸을 쫓아가는 것은 헛되고 헛된 일이었다.’ (148~149쪽)

‘종교 훌리건’이 된 종교 극단주의자들이 난입해, 수란잔의 여동생 마야를 데려간 겁니다.

◎ ‘집에 돌아온 수란잔은 바닥에 쓰러져 다리를 쭉 뻗었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이 동생 마야를 집단 성폭행했을 게 틀림없다고 수란잔은 생각했다.’ (152쪽)

방글라데시 다카에 거주하는 소녀들의 모습. 사진은 소설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 없음. 내용상 모자이크 처리함. [Labib Ittihadul]
수란잔의 아버지 수다모이, 어머니 키론모이의 처절한 비명이 집안에 가득찼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민낯은 이토록 비참했습니다.

바브리 마스지드에서 자행된 극단주의자 폭력이, 옆나라에 살던 선량한 가정의 어린아이를 납치 강간하는 결과로 이어진 겁니다. 종교를 빙자한 폭력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수란잔에게 믿기 어려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마야처럼 생긴 소녀가 다리 아래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강물에 뜬 시체는 수란잔의 여동생 마야가 맞을까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외곽에서 열린 ‘세계 이슬람 집회’에 참석했던 수천 명의 무슬림이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려는 모습. 2011년 촬영된 사진으로, 대다수의 종교인은 선량하지만 종교와 역사는 때로 평범했던 인물을 악인으로 돌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타슬리마 나스린은 소설 ‘LAJJA’를 통해 바로 종교의 악순환을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AP·연합뉴스]
‘7일’ 만에 쓴 소설, 방글라데시 민심을 뒤엎다
놀랍게도 이 책 ‘LAJJA’는 작가 타슬리마 나스린이 불과 7일 만에 쓴 책입니다.

1993년 2월 출판된 뒤, 작가 나스린을 둘러싼 후폭풍은 대단했습니다. 소수자 박해, 종교적 불관용, 인간 악의 기록물이었던 이 책이 신성모독 논란까지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고국 방글라데시에서 ‘타슬리마 나스린’이란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5개월 만에 ‘LAJJA’를 금서로 지정하고 회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책은 이미 6만부가 판매된 후였습니다.

작가 타슬리마 나스린의 2013년 모습. 그녀의 책 ‘LAJJA’는 방글라데시의 심각한 논쟁을 불러왔고 금서 조치가 내려집니다. 그러나 금서 조치는 그녀가 겪어야 했던 장기적인 불행의 아주 짧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TRUONG-NGOC]
이슬람교에선 공식적으로 그녀에 대한 ‘파트와’가 내려집니다. 파트와(fatwa)란 이슬람 법률에 따른 종교적 판결인데, ‘파트와가 내려졌다’고 함은 그녀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는 뜻과 같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그녀가 이슬람을 모독했다고 본 것이지요.

그녀의 목에는 ‘무제한적인 거금’이 걸리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나스린은 여권을 빼앗겼고, 그녀가 참가 중이던 도서박람회장에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쳐들어와 모조리 부수기도 했습니다. 무슬림 공개집회에서 “종교적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요구당했고, 처형을 요구하는 총파업까지 벌어져 방글라데시가 마비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았고, 망명 생활과 함께 수십 권의 작품을 써냈습니다. (모두 방글라데시에선 금서였지만 말이지요.)

‘바브리 마스지드 철거를 잊지 말자’는 내용을 담아 무슬림들이 벽에 붙인 포스터. [Kandukuru Nagarjun]
나스린은 자신에게 파트와가 거듭 선언되자 숨어살다가 결국 방글라데시를 떠납니다. 사실상 추방이었고, 동시에 타의에 의한 망명이었습니다.

스웨덴으로 망명했던 그녀는 미국으로 재망명했고,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며 방글라데시에 입국했다가 테러단체의 제1 표적이 되자 프랑스로 떠나는 등 평탄하지 않은 시간을 겪었습니다.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렇게까지 협박했다고 합니다. “그녀를 산 채로 불태워버리겠다.

2010년 들어 그녀는 인도에 거주하는데, 다행히 인도 정부는 “나스린은 자신이 선택한 국가에 남을 권리가 있다”고 허가해줍니다. 2023년 최근 ‘Burning Roses in My Garden’이란 제목의 신작 시집을 출간한 걸 보니, 아직 생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타슬리마 나스린의 2023년 시집 ‘Burning Roses in My Garden’의 표지. [아마존닷컴]
사실 타슬리마 나스린은 장교 출신의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의학학위(MBBS)를 취득하고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틈틈이 시를 쓰는 시인이었지요. 책 ‘LAJJA’ 출간 이후 나스린은 180도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나스린은 자신을 ‘작가, 인문주의자, 페미니스트, 의사’로 소개합니다. 힌두교 여성들이 처한 인권 침해에 대해 목소리를 낸 사회운동가입니다. [나스린 홈페이지 캡처]
“난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종교적 근본주의성서와 경전의 무오함(오류가 없음)을 추종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요.

문구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기독교식 원리주의뿐 아니라 타 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교 근본주의로 인한 대부분의 모든 불행은 ‘내가 믿는 신의 경전에는 절대 오류가 없다(무오주의·無誤主義)’는 그릇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힌두교 3대 경전이자 힌두교의 신약성경(구약성경은 ‘베다’)으로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 몇 문장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 서점에서도 수십 종의 판본을 판매 중이기 때문에 독서가 어렵지 않습니다.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일부. 야자나무 잎에 글을 쓰고 노끈으로 묶은 판본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인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가 바로 바가바드 기타에서 온 문장입니다. [Sarah Welch]
◎ ‘바라타의 아들이여, 싸우거라. 육신을 입은 자아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 죽임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옷이 낡고 닳으면 그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육신을 입은 자아 또한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입는다. 자아는 불멸하여 도처에 흐르는 견고한 부동의 영원성이다. 태어나는 모든 것들의 죽음이 확실하듯이, 죽음을 알아버린 것의 탄생 또한 확실하다.

위 문장은, 왕위 계승을 위한 전쟁을 거부하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가 참전(參戰) 당위성을 설득하는 대목입니다. 몸이 죽는다고 해도 자아(본래의 나이자 불멸의 자아, 즉 아트만)는 불멸하며, 인간의 몸은 윤회의 과정을 거치는 중인 껍데기이고, 진짜 아트만은 따로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윤회의 측면에서, 불교와 대단히 유사하지요?)

그런데 ‘아트만(인간의 본래 자아)’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전해지는 저 문장을, 2023년 현대사회에서, “죽여도 죽인 게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니, 싸워서 죽이고 죽어라”라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어찌 될까요.

아르주나의 모습을 상상한 동상. 아르주나는 힌두교 대서사시에 나오는 중심인물입니다. 아르주나는 전쟁을 하면 사촌을 죽이게 된다는 점 때문에 왕위를 포기한 뒤 산에 들어가 살았지만, 전차를 모는 마부였던 크리슈나에게서 ‘우주의 원리(불멸의 자아)’를 들은 뒤 전쟁에 참여합니다. 위 인용문은 제가 알기로 힌두교 경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문장입니다. [Illusion]
이슬람교를 둘러싼 종교 근본주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슬림 절대 경전인 쿠란의 몇 문장은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오인되어 세상에 떠돕니다. 이는 무슬림 극단적 혐오의 근원인데, 일부를 옮겨 적어 봅니다.

(※쿠란은 옮겨 적는 일이 금지되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이니 양해 바랍니다.)

◎ ‘그리고 금지된 달들이 지나갔을 때 너희가 우상숭배자들을 보는 대로 죽이고 포로로 잡고 공격하라. 그리고 모든 매복처소에서 엎드려 그들을 기다리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기도를 준수하고 쟈카트를 지불할 때 그때는 그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라. 실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시니라.’(쿠란 9장 5절, 안동훈·박병현·성하창의 번역, 사우디아라비아에 위치한 아하마디야 무슬림협의회에서 발행한 쿠란을 저본 삼았음.)

위 쿠란 9장 5절의 앞 문장만 보면 마치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라는 호전적인 문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5절 뒷부분과, 이어지는 6절을 읽어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 ‘만약 우상숭배자 가운데 어떤 자라도 너희로부터 보호를 구하거든 그를 보호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그를 안전한 그의 처소로 옮기라. 그것은 그들이 무지한 백성이기 때문이니라.’(쿠란 9장 6절)

이슬람교도 충분히 관용의 종교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경전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악용하거나 오독(誤讀)했던 인간이 문제였던 건 아닐까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벌어진 ‘학살’처럼 말입니다.

이슬람교 경전 ‘쿠란’의 모습. [Cezary Piwowarski]
경전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근본주의 광신도가 출몰하기 마련이고, 그건 비(非)종교인이 종교와 신앙을 경멸하는 치명적인 근거가 되곤 했습니다. 경전은 그 문구가 집필됐던 당대의 시대상과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해석되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것이 경전을 대하는 바람직한 독법(讀法)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힌두교인의 바브리 마스지드의 철거도, 무슬림들의 방글라데시 다카에서의 학살도 종교적 관점에서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타슬리마 나스린은 저 당연한 사실을 지적했는데, 그녀는 삶의 모든 걸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 작가 나스린이 유죄로 선고되는 세상에선 어떤 종교적 화합도 불가능할 겁니다.

진정한 종교란 타 종교와의 관용 위에서 세워지는 게 아니었던가요. 불화했던 타인과의 화해가 종교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할 테니까요. 그러나 그건 너무 멀고 먼 이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타슬리마 나스린 서명. [Wikimedia Commons]
‘나’의 죽음을 기쁘게 바라보는 자들이 있다면
작가 나스린은 원래 산부인과 의사 출신으로, 힌두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현재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 ‘무슬림 폭력’을 다뤘다고 해서, 그녀가 힌두교의 바브리 마스지드 철거를 옹호했던 것도 아닙니다. 책 ‘LAJJA’에서 그녀가 힌두교 광신도들의 폭력을 날선 문장으로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힌두교 옹호가 아니라 양비론, 나아가 인간이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광기를 고발한 것이지요. 종교적 이상과 정치적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녀는 성찰합니다.

◎ ‘너무나 많은 불안과 결핍이 있었다. 많은 피를 흘렸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20세기 말에도 우리가 이런 잔혹행위를 목격해야 했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종교의 깃발을 휘날리는 것은,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 정신을 무(無)로 만드는 쉬운 방법임이 항상 입증되어 왔다.’(36쪽)

타슬리마 나스린이 출간한 책들. 그녀의 책은 ‘LAJJA’(1994)를 비롯해 ‘Amar Meyebela’(1999), ‘Utal Hawa’(2002), ‘Ko’(2003), ‘Dwikhandito’(2003), ‘Sei Sob Ondhokar’(2004) 등이 전부 금서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선 읽을 수 없고, 인도 서부 벵골 지역에서도 금지됐습니다.
책 제목인 ‘LAJJA(라자)’는 부끄러움 혹은 수치심을 뜻하는 힌디어라고 합니다. 작가 나스린은 수란잔의 입을 통해서 끊임없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폭력 전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임을 타슬리마 나스린은 폭로합니다. 폭력 앞에서 두려움보다 부끄러움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이룬 성취입니다.

이슬람교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로 파트와가 내려진 뒤 실제로 한쪽 눈을 잃은 세계적인 거장 살만 루슈디는, 과거 타슬리마 나스린에게 보낸 공개서한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죽는 것을 기쁘게 바라보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라.”

타슬리마 나스린을 그린 그림. [Dr. ashok shukla]
우리에겐 생소한 그 이름 ‘타슬리마 나스린’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곧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인간의 선량한 마음을 ‘보호’하는 일이기 때문일 겁니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니까요.

악(惡)은 선(善)의 반대말이 아니라, 어긋난 믿음이 종교를 잘못 이해하는 순간 잉태되는 하나의 가혹한 현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교적 이상과 우둔한 현실은 늘 불화합니다. 소설가 타슬라마 나스린은 그 사이를 문학으로 메꾸려 했던 중재자로 기억되어야 할까요. 원래 저 중재는 신(神)이 맡았어야 했던 역할이란 생각이 뒤늦게 들지만 말입니다.

이 기사는 다음 책과 논문, 외신기사를 참고했습니다 ◎ Taslima Naslin, 『LAJJA』, A Penguin Book, 1994. ◎ 타슬리마 나스린 홈페이지 (taslimanasrin.com) ◎ 존 바우커, 박규태·유기쁨 옮김, 『종교문화총서04: 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 청년사, 2005년.

※다음주에는 조지 오웰 ‘1984’를 다룹니다. 너무 유명한 작품이지만, 친(親)러시아 국가 벨라루스가 2022년에도 금서로 지정했을 만큼, 영원한 논쟁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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