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김수한 음악감독 “1년3개월간 총 180곡 작업, 역대 가장 길었고 오래 기억될 작품”
[스포츠서울 | 박효실 기자] ‘2023 MBC 연기대상’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연인’이었다.
2023년 하반기를 애절한 멜로로 물들인 ‘연인’은 대상(남궁민), 올해의 드라마상, 최우수 연기상(안은진) 베스트 커플상(남궁민 안은진) 남자 조연상(조연상) 남자 신인상(김무준, 김윤우) 여자 신인상(박정연) 등 7개 부문을 휩쓸며 명실공히 2023년 최고의 드라마로 우뚝 섰다.
터진 드라마는 3박자가 잘 맞는다. 작가의 필력, 연출의 감각, 배우의 연기, 여기에 시청자의 심박을 쥐락펴락하는 음악의 힘이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연인’은 시시각각 휘몰아치는 줄거리, 고조되는 배우들의 감정에 ‘착붙’ 음악으로 귀를 파고드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음악CD가 빽빽하게 꽂힌 고양시 원흥동 작업실에서 만난 ‘연인’의 김수한(54) 음악감독은 6년의 공백기를 지나 오랜만에 작업한 드라마의 ‘대박’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연인’은 처음 시놉시스를 건네받은 때로부터 마지막 21회가 방송되는 날까지 꼬박 1년 3개월을 매달린 그의 20년 경력 중 가장 오래 작업한 드라마이기도 했다.
이번 드라마에 사용된 곡은 무려 180곡, 2022년 8월에 곡 작업을 시작했고 지난해 4월 멀리 헝가리, 오스트리아까지 날아가 녹음을 마쳤다. 그 후에도 준비된 곡들을 매회 차마다 화면에 하나하나 입히는 믹싱 작업까지 지난한 작업이 이어졌다.
김 감독은 “시놉시스랑 대본이 1~2부 정도 나왔을 때 줄거리만 보고 상상해서 음악을 만들었다. 그걸 외국에 가서 녹음하고 나니 20부 전체를 관통할 음악으로 맞을지 불안했다. 그래서 청음회도 열었다”라고 말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담당 PD와 작가, 연출 스태프 등 30여명을 모아놓고 진행한 청음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는 “황진영 작가님이 너무 좋아하셨다. 김성용 감독도 속으로 ‘아, 이 드라마가 음악으로 완성이 됐다’ 싶었다더라”라며 미소 지었다.
황 작가와는 지난 2017년 방송된 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하 ‘역적’) 이후 두 번째 만남. 김 감독은 “그때도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 주셨다. ‘대본이 감독님 음악을 못 따라간다’라고 까지 하셨다. 음악 들으면 대본이 잘 써진다고 하셔서 작곡하는 대로 보내 드리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연인’에 음악이 어쩜 이렇게 착착 붙나 했더니 대본과 음악이 처음부터 한배의 쌍둥이처럼 만들어진 작품이었던 셈이다.
‘연인’의 스토리와 캐릭터 면에서 가장 변곡점이 된 회는 4부였다. 철부지 애기씨였던 길채(안은진 분)가 오랑캐를 피해 피난을 떠나고, 겁탈당할 뻔한 은애(이다인 분)를 구하려다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벼랑에서 밀어버리는 장면은 ‘연인’이 그려갈 길채의 혹독한 성장 서사의 시작이었다.
김 감독은 “휘몰아치면서 달려가는, 스케일 있는 음악이 붙어간 게 4부였다. 김성용 감독과 본방송을 같이 봤는데, 수백번을 본 장면인데도 울컥해서 눈물이 맺히더라. ‘이제 됐다’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4회 방송 이후 시청률이 2배 상승한 ‘연인’은 파트1의 최종회인 10회에서 12.2%(닐슨코리아 기준)의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한달 뒤 방송된 파트2에서 최종 12.9%로 종영하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고생 만큼이나 뿌듯함도 많은 드라마였다. ‘연인’을 꼼꼼히 뜯어보고 분석하는 드라마팬들이 생겨나며 그의 음악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김 감독은 “예전보다 음악을 더 집중해서 듣고 찾아보는 분들이 늘어난 것 같다. 김성용 감독이 캡처해서 보내주는 시청자 반응들이 신기하고 놀라웠다”라고 말했다.
그의 기사에는 “세상에 누가 경음악을 외국에서 녹음하나요. 계속 보게되는 힘이 무게감 있는 음악이었어요. ‘연기대상’에 음악상이 있었으면 받았을 텐데 수상 못하셔서 속상해요” “‘음감님은 내 마음의 히사이시 조’라는 말은 누가 먼저 했으니 난 ‘내 마음의 엔니오 모리코네’라고 하겠어요” 등의 댓글이 달렸다.
사실 그는 “드라마에서는 음악을 최대한 들리지 않게끔 하는 게 맞다”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시청자들의 몰입을 위해 더하기보다는 덜어내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다.
그는 “예를 들어 ‘전원일기’같은 드라마의 경우 방송시간 50분 중에 음악은 1~2번 밖에 안 들어갔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는 비중이 점점 늘어나서 60분 중 45분간 음악이 나오기도 한다. 선택이 쉽지 않지만, 음악이 끌고 가는 장면 외에는 최대한 들리지 않게 하는 게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선택 같다”라고 말했다.
드라마 음악은 저 혼자 잘났다고 튈 수 없는, 영상에 종속되는 숙명을 가졌다. 태생이 기능적인 드라마 음악을 조금은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미묘하고 어려운 작업이 그의 일이다.
사전제작과 52시간 근무제 등이 도입되며 드라마 촬영 현장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그렇다고 후반작업 시간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다. 언제나 제일 마지막에 음악을 입혀야 하는 그에게는 촌각을 다투는 마감이 일상이다. 게다가 김 감독은 오퍼레이팅까지 직접 하는 드문 감독이다.
그는 “내가 만들고 콘티를 붙인 음악을 사실 나보다 잘 알 수는 없다. 오퍼레이터를 두고 일해도 되지만, 믹싱을 직접 하는 것만은 못하다. 그래서 드라마 하는 동안은 밤샘이 허다하다. 그런 숨 가쁜 작업을 즐기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안은진이 부른 OST 파트3 ‘다만 마음으로만’도 작곡했다. 김 감독은 “이 노래가 굉장히 어려운 노래다. 호흡이 달릴 텐데 잘하더라. ‘가사를 마음을 담아서 부르면 좋을 것 같다’라고 주문했더니 연기하듯 진정성 있게 너무 잘 불러서 녹음이 금방 끝났다. 깜짝 놀랐다”라고 감탄했다.
배우 안은진의 영민하고 근성 있는 태도는 드라마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김 감독은 “드라마가 끝까지 힘이 떨어지지 않았던 데는 길채라는 캐릭터의 힘이 컸던 것 같다. 장현(남궁민 분)도 멋있는 역할이지만, 길채는 그동안 정말 보지 못한 캐릭터였다. 드라마 안에서 안은진 배우가 성장하는 게 느껴지더라”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홍익대 예술학과 출신으로 음악과 전혀 상관 없는 미술관 큐레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바둑잡지, 월간미술 기자 등을 거쳤다. 그는 “아마 바둑 잡지가 폐간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기자를 하고 있었을 거다. 일이 정말 재밌었다”라고 말했다.
갑작스레 실직한 뒤 아는 드라마 PD의 추천으로 음악감독 어시스턴트 일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방송계에 발을 디뎠다. 그는 “방송국 장비가 다 고가다. 어디서 이걸 가르칠 데가 없다. 무조건 감독 밑에서 도제식으로 6~7년씩 배워야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봉에 시달리던 그는 1년 만에 일을 관두고 화면에 음악을 붙이는 오퍼레이터로 전업했다. 음악감독으로서 데뷔작이라 할 MBC ‘다모’(2003)도 오퍼레이터 경력이 빛을 발했다.
그는 “드라마 1~2부가 나가고 나서 갑자기 음악감독이 나갔다. 6일 안에 3~4부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이 없으니 내가 긴급 투입된 거다. 나로서는 최고의 기회였다. 드라마를 해석하고 읽어내는 능력을 오퍼레이터를 하면서 익힌 게 도움이 됐다”라고 말했다.
당시 ‘다모’는 ‘다모 폐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다모’의 음악감독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그는 이후 ‘킬미힐미’(2015)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2017) 등 숱한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수십 년째 고질적인 문제인 음악감독의 운영방식이 그를 멈춰 세웠다. 통상의 드라마 제작에서는 드라마 제작사가 스태프와 계약을 하는 방식이지만, 음악감독은 드라마제작사와 별개로 OST 제작사와 계약을 맺는 방식이다.
드라마의 완성도가 중요한 음악감독으로서 판매 수익이 목적인 OST 제작사와 숱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가 떠났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둥지를 튼 그는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단골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뮤직바 사장님으로 변신했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6년, ‘연인’ 덕에 그는 길었던 외유를 끝낼 수 있었다. 김 감독은 “최근에 아내가 ‘그러게 진작 이 일 했어야지 왜 딴데 가서 그랬어?’라더라”면서 웃었다. ‘음악밖에 모르는 바보’ 남편의 외유가 답답했던 아내의 묵은 타박이었다.
6년간 쌓은 내공과 에너지를 힘 삼아 그는 다음 작품에 들어간다. ‘킬미힐미’ ‘역적’으로 인연을 맺은 김진만 PD의 신작 MBN‘세자가 사라졌다’(가제)로 이번에도 사극이다.
엑소 수호, 홍예지, 명세빈, 김민규 등이 출연하는 로맨스 코미디로 올 상반기 방송 예정이다. gag11@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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