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동해·호수 품고 ‘낯섦’도 품은 속초···쉬러 갔는데 살고 싶었다
속초는 설악을 등에 업고 바다를 추어올리면서 호수를 품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는 모든 요소를 가진 셈이다. 이 때문에 사시사철 여행객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속초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풍광만이라 할 수 없다. 속초는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한다. 실향민이 터를 잡고 이북의 문화를 속초의 것으로 재탄생시켰듯, 속초는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더 빛나게 만든다. 한때 속초가 국민관광지로 ‘쉼’을 내걸었다면 이제 머물고 싶은 ‘삶’의 공간을 엮어내고 있다.
겨울에 더 빛나는 설악
속초 낮 기온이 영상 9도까지 오른 겨울날 강원도로 향했다. 고속도로 주변의 산들은 낙엽을 떨군 채 누더기처럼 눈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속초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하얀 눈으로 치장한 채 근육질 산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설악산은 돌산, 돌샘이며, 우뚝하게 뛰어나고 깊숙하고도 싸늘하다. 겹쳐진 묏부리와 높은 숲이 하늘과 해를 가린다”고 한 이유를 단번에 수긍하게 만드는 장관이었다.
선조들은 “한가위부터 내리기 시작해 쌓인 눈이 하지에 이르러 비로소 녹으므로 설악(눈 설雪, 큰산 악嶽)이라 한다”(<동국여지승람>)고 기록했다. 속초·양양·고성·인제 등 4개 시군에 걸쳐 있는 설악산국립공원은 면적만 398㎢ 규모에 이른다. 그런데 유독 속초가 설악 비경 명소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무엇일까. 산에 오르지 않아도 속초 시내에 서면 달마봉·울산바위, 그 위로 공룡능선을 비롯한 외설악의 암봉과 준령이 파노라마뷰로 펼쳐진다. 설악케이블카 탑승장이 속초에 있는 점도 설악과 속초를 연관검색어로 묶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설악산에 조금 더 빠르고 가까이 다가가려는 다수가 속초를 거친다.
속초는 설악만 가진 것이 아니다. 속초는 석호(바닷물이 내륙으로 들어왔다가 사취나 사주에 의해 바다와 분리돼 만들어진 호수)를 2개나 보듬고 있다. 동해안 호수가 대부분 석호지만 속초의 청초호와 영랑호처럼 한곳에 나란히 발달한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속초 8경’인 외옹치, 조도를 비롯해 밤이면 속초해수욕장을 밝히는 관람차 ‘속초아이’까지 바다 풍경 또한 빼어나다. 설악·호수·바다는 삼색 보석처럼 겨울에도 속초를 빛나게 한다.
설악 아래, 돌담은 있지만 대문은 없는 마을
그럼에도 속초가 ‘국민관광지’로 떠오른 건 최근의 일이다. 조선시대 속초는 양양도호부에 소속된 작은 동리였다. 설악은 ‘악’ 소리가 날 만큼 산세가 험해 오르기 힘든 산으로 유명했다. 속초와 설악에 다다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한계령과 미시령을 지나는 도로가 열린 것은 각각 1971년과 1989년이다. 설악과 속초가 유명해진 것도 이때쯤이다.
설악을 찾는 이가 늘면서 산 아래 마을로도 외지인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상도문 돌담마을도 그중 하나다. 서산대사가 동해 쪽에서 하도문, 중도문, 상도문을 거쳐 설악을 찾았다는 설에서 유래했다.
상도문일리전통한옥마을로 불리다가 2019년 ‘돌담마을’로 이름을 바꿨다. 낮게 쌓아 올린 옛 돌담길이 미로처럼 펼쳐지는 점에 착안했다. 그런데 돌담은 있지만 대문은 없다. 한옥들은 고스란히 세간을 드러내며 사람을 반긴다. 마을은 오랜 기간 강릉 박씨, 해주 오씨, 강릉 김씨 등이 집성촌을 이뤘고, 굳이 대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돌담은 왜 쌓았을까. 마을 토박이인 김종극씨(72)는 “예부터 설악산 아래 돌이 많았는데 집 짓고 남는 돌을 집 주변에 쌓다 보니 자연스레 담이 생겼다”며 “그런데 서로 의심할 만한 사람도 없으니까 대문은 만들 생각조차 안 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전국적인 관광 열풍이 불면서 상도문 마을의 한옥들도 저마다 ‘민박’ 간판을 내걸었다. 김씨는 “한여름 설악을 찾는 인파가 몰리면서 방이 없어 안방까지 내주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제 마을은 속초에 오시라는 뜻의 체험형 민박 프로그램 ‘속초오실’을 운영한다. 돌담길에는 돌로 만든 개성 넘치는 작품들로 돌담갤러리가 꾸며졌다. 조선 후기 유학자 매곡 오윤환이 마을 아홉 곳에 곡을 붙인 ‘구곡가’ 글귀들의 안내를 받다 보면 함경도식 가옥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오윤환 생가가 나온다. 상도문 돌담마을은 속초도문농요(강원무형문화재)의 발상지로 마을 주민들이 참여한 인형극 ‘도문사람들’도 공연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속초만의 문화로
속초는 강원도에서 가장 작은 땅이다. 전국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홍천군의 17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그런 땅에 2022년 한 해 동안만 1943만명이 방문했다. 인구 8만 도시에 매일 5만5000명 정도가 방문한 셈이다. 속초가 이토록 특별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속초시 문화관광해설사 최돈순씨는 “강릉에서 나고 자라 40년 전 속초로 시집을 왔다”며 “강릉만 해도 대대로 터를 잡고 사는 집안이 많아 외지인이 들어와서 사업을 하기 쉽지 않지만, 속초는 텃세가 없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속초가 기회의 땅이 된 이유는 실향민들이 터를 잡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53년 휴전선이 그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이북 피란민들은 속초에 갇힌 신세가 됐고, 청초호 해안 쪽 모래톱에 움집을 짓고 삶을 일궜다. 현재 아바이마을의 실향민 1세대는 대부분 세상을 뜨고 이 일대에는 실향민 후손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외지인이 운영하는 카페 등이 자리했다.
과거 갯배로 어항에서 시장까지 물건을 날랐지만, 금강대교와 설악대교가 생기면서 차로 쉽게 아바이마을을 오갈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실향민들은 갯배를 운영한다. 갯배는 수로 양쪽에 고정된 철선에 갈고리를 걸어 당기면서 배를 움직이는 무동력 운반선이다. 실향민 2세대인 김명학씨(65)는 “원래 금강대교 밑에 살았는데 마을이 철거되면서 실향민 대다수가 아바이마을 밖으로 나가게 됐다”며 “그래도 옛 문화를 이어야 하니까 후손들이 교대로 나와 갯배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바이순대, 가자미식해 등 이북의 음식이 속초 대표 먹거리가 됐듯이, 속초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속초만의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속초관광수산시장을 찾으면 닭강정, 튀김, 술빵 등 속초의 새로운 먹거리가 관광객을 유혹한다.
대를 이어 변화를 받아들이고 속초의 문화를 진화시키는 곳도 있다. 동아서점과 문우당서림은 속초를 오랜 시간 지킨 서점이다. 참고서를 주로 파는 동네책방이었지만, 이제는 속초의 문화거점이 됐다. 1956년 개점한 동아서점은 당시 동아일보 속초 주재 기자였던 고 김종록 대표가 세운 서점이다. 전쟁 이후 학용품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어린 학생들을 위해 문구사로 시작했다. 현재는 2대 김일수·3대 김영건 공동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직접 큐레이션을 한 책들을 선보이는 점이 독특하다. 인근에 있는 문우당서림은 1984년에 개점했다. 현재 이민호 대표와 가족들이 운영한다. 독립출판물들을 지역에 소개하고 독서 모임방을 무료 대관하는 등 지역 문학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다. 청초호 인근에는 1952년부터 운영하던 조선소를 3대가 이어받아 카페와 뮤지엄을 결합한 문화공간인 ‘칠성조선소’로 재탄생시켰다.
물론 모든 변화가 매끄럽지만은 않다. 속초아이는 운영 1년여 만에 위법사항이 드러나며 철거 위기에 놓였다. 속초 해변을 따라 나날이 늘어가는 고층빌딩을 두고도 시선이 엇갈린다. 속초는 곧 서울과 더 가까워진다. 동서고속화철도가 2027년 개통되면 서울(용산)에서 속초까지 1시간39분이 걸린다. 속초가 워케이션, 속초오실 등을 내세워 여행자들에게 ‘살아보라’ 권하는 이유다. 속초가 변화를 얼마나 맛깔나게 버무려내고 있는지 바라보는 것도 속초 여행의 묘미다.
▲여행정보
·대중교통편: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속초고속버스터미널까지 2시간20분 소요. 버스는 20~30분 간격으로 운영.
·먹거리: 지난해 강원특별자치도 내 가장 많은 방문객을 기록한 관광지는 ‘속초관광수산시장’이었다. 수산물은 물론 아바이순대, 가자미식해, 닭강정, 막걸리빵, 튀김 등 속초의 다채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속초|글·사진 |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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