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체액만으로 용의자 특정…과학수사의 진화
● 사건파일 #1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연초부터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 홀로 오누이를 키우고 있던 39세 여성 임옥례 씨(가명)가 실종됐다. 유력한 용의자는 임 씨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산 어귀에서 어슬렁거리던 호랑이 씨다.
정황을 살펴보면 호 씨가 떡을 팔고 돌아오던 임 씨를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란 말로 꾀어 금품을 갈취했다. 그리고 인적 없는 곳에서 임 씨를 잡아먹은 것으로 의심된다. 하지만 호 씨가 임 씨를 잡아먹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임 씨의 시신도, 임 씨를 살해하는 데 활용된 도구도 찾지 못했다.
당신이 위와 같은 가상의 사건파일 속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라고 상상해보자. 시신도, 흉기도 없는 살인사건을 밝히기 위해서 당신이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은 대검찰청 과학수사부다. 2015년 설치된 대검찰청 과학수사부는 형사사건의 감정물에서 DNA를 감정하는 일부터 디지털 범죄 수사, 사이버 범죄 수사 등 다양한 과학수사 업무를 수행한다.
형사사건 발생 이후 과학수사의 과정은 일반적으로 이렇다. 우선 사건을 접수한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범죄현장에서 얻은 증거물에 대한 감정을 의뢰한다. 경찰은 이 감정 결과를 토대로 수사한 뒤 용의자에게 혐의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검찰에 기소의견을 보낸다.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고 나면 검찰은 경찰의 수사기록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기록을 토대로 수사해 법원에 기소할지 여부를 판단한다.
그런데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후에 간혹 잃어버린 퍼즐이 한두개씩 보이곤 한다. 다시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호랑이가 임 씨를 잡아먹었을 것이라는 정황은 포착되나 살인을 입증할 시신과 살해도구를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럴 때 검사는 대검찰청 과학수사부를 찾는다. 과학수사부에서는 증거물을 더 면밀히, 촘촘히 살펴보며 수사의 마지막 퍼즐을 채운다.
○ 미세조직 DNA로 조직의 출처나이 알아내
“아니, 막말로 그 아주머니가 그냥 어디 여행이라도 잠깐 간 걸 수도 있잖아요? 왜 이렇게 내가 죽였다고만 말씀하는지 모르겠네~.”
천연덕스러운 호 씨의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지만 일단 참아본다. 현재 확보한 증거는 임 씨가 실종된 산 인근에서 발견된 임 씨의 앞치마가 전부다. 여기서 임 씨가 살해당했다는 유의미한 증거를 얻을 수 있을까. 대검찰청 과학수사부로 향했다.
이환영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와 함께 극소량의 조직 샘플로부터 추출한 DNA를 활용해 이 조직이 어떤 인체 조직인지, 이 조직의 주인은 몇 살이었을지 추정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연구결과는 2023년 9월 30일 국제학술지 ‘포렌식 사이언스 인터내셔널: 제네틱스’에 발표됐다. (doi: 10.1016/j.fsigen.2023.102940)
이 연구에 참여한 김종식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연구사를 2023년 12월 11일 오후 대검찰청에서 만났다. 그는 “범죄현장에서 DNA를 발견하고 나면 이 DNA가 DNA 데이터베이스 안에 들어있는지 대조한다”면서 “그런데 DNA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DNA 신원확인정보는 제한적이라 DNA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지점이 아쉬워 연구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대검찰청의 DNA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DNA 신원확인정보는 중대범죄의 수형인과 구속 피의자 등의 것이다. 만약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데이터베이스에 없다면 DNA는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DNA에는 여전히 그 주인에 대한 아주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김종식 연구사는 그중에서 ‘메틸화 패턴’에 집중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심장, 뇌, 근육 등 조직은 모두 하나의 DNA에서 온 정보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같은 DNA를 보고 다른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내는 비법이 바로 DNA 메틸화다.
DNA 메틸화는 DNA 속 사이토신 염기에 메틸기를 붙여 그 부분의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진핵세포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할 때 쓰는 방법 중 하나다. DNA 메틸화 패턴은 같은 사람의 체내에서도 조직에 따라 달리 분포한다. 나이에 따라 메틸화 패턴이 달라지기도 한다. 김종식 연구사는 “사람의 조직마다, 나이마다 달라지는 DNA의 메틸화 패턴을 찾고 이를 토대로 수학 모델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탄생한 DNA 감식 기술로는 살인을 입증할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경우에도 피해자의 사망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범행도구에 묻어있는 아주 작은 조직의 DNA 감정을 통해 해당 조직이 신체의 어느 부위인지 확인하는 식이다. 만약 뇌, 심장 등 주요 장기의 조직임이 판정된다면 대상자가 사망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DNA의 메틸화 패턴을 통해 조직 주인의 나이도 짐작할 수 있다.
● 김종식 연구사의 DNA 연구 뒷이야기
김종식 연구사가 DNA 메틸화 패턴 연구를 시작한 건 작은 증거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정보를 얻기 어려워 버려지는 DNA가 아까웠습니다. 어떻게든 조금 더 쓸 수 없을까 고민했던 거죠.”
담백한 그의 말에서 과학수사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 미생물이 알려주는 체액의 역사
앞치마에 묻어있던 아주 작은 조직에서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DNA의 메틸화 패턴을 분석한 결과 이 조직이 임 씨의 심장 부근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임 씨는 사망한 게 맞았다. 이제 남은 퍼즐은 단 하나. 호 씨가 임 씨를 ‘잡아먹었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타액, 피, 질액, 정액 등 체액은 몸 밖으로 배출되면 그때부턴 미생물의 먹이다. 따라서 시체에 꼬이는 벌레의 수와 종류 등으로 시체 유기 장소를 특정하는 법곤충학과 비슷한 원리로 미생물의 종류와 수를 이용해 체액의 종류를 특정할 수 있다. 대검찰청 과학수사부는 이 점을 활용해 지난 2023년 3월 ‘체액 식별 모델 구축 장치 및 방법과 체액 식별 모델을 이용한 체액 식별 장치 및 방법’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다.
이 연구를 이끈 김성민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연구사는 “법생물 DNA 감정은 인간 이외에 다른 생물을 감정하는 분야”라며 말문을 열었다. 양귀비, 대마, 환각버섯처럼 인터넷에 유통되는 마약생물의 원료를 감정하는 것부터 성폭행, 폭행 등 사건에서 찾은 체액을 감정하는 것까지 모두 법생물학 DNA 감정의 영역이다.
김성민 연구사는 “혈흔의 경우 다양한 미생물 중에서도 슈도모나스(Pseudomonas)가 우세하게 나타나고 질액흔의 경우 락토바실러스(Lactobacillus)가 우세하게 나타나는 등 미생물 분포에 차이가 있다”면서 “체액에서 추출된 DNA를 분석해 체액의 종류와 체액의 주인이 누구인지 신원확인을 한 번에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체액 식별을 위해 기존에 활용하던 방식의 경우, 시료량이 많이 요구됐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환경 미생물 DNA 분석기술을 적용하면 극소량의 증거물로도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김성민 연구사는 이번에 개발된 환경 미생물 DNA 분석기술을 활용했다면 풀어낼 수 있었던 사건에 대해 회상하며 말을 맺었다.
“실제로 검사가 감정을 요청한 사건 중에 창틀에 묻은 혈흔의 주인이 누구인지 추적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피해자는 자신이 치질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 자신의 치질 환부에서 나온 피를 몰래 훔쳐다 묻힌 게 아니냐고 주장했죠.
당시엔 이 주장을 검증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가능합니다. 혈흔을 통해 이 피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낼 수 있고 혈흔 속 미생물의 분포를 분석해 이 피가 항문 근처에서 나온 것인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이게 (이 일을 하는) 재미입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엔 ‘못합니다’ 했던 일도 이젠 ‘네, 됩니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어느 날 새벽,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의 담당 연구사에게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아니 피가 섞인 침이 있더라고요!”라고 했다.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니까 임 씨의 앞치마에서 발견된 체액흔 중 하나에 호 씨의 타액이 섞여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호랑이 침이 떡 파는 이의 앞치마에서 ‘우연히’ 발견될 리 없다. 마지막 퍼즐이 들어맞았다.
● 김성민 연구사의 미생물 연구 뒷이야기
김성민 연구사의 연구 분야는 ‘인간을 제외한 전부‘다. 매머드부터 식물, 어류, 버섯, 그리고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유전정보를 분석해 다양한 생물을 감정해야 하는 그의 무기는 인공지능(AI)이다.
“특히 식물의 동정은 한 가지 유전자 표식으로만 하기 어려워요. 분류군 간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죠. 이럴 때 AI가 활용됩니다. 앞으로 AI를 활용하면 유전자 속 패턴을 더 잘 구별할 수 있게 될겁니다. 그 기반이 될 연구가 이번 (체액 속 미생물 분포)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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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기자 leci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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