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가르침, '이기적 인간' 만든다
<양심은 힘이 없다는 착각>은 인간을 경제적 요인에 반응하는 이기적 존재로 묘사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 모델이 힘을 얻을 때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책이다. 저자 고(故) 린 스타우트 전 코넬대 로스쿨 교수는 '비이기적인 친사회적 행동'으로 정의한 양심 역시 이기심만큼이나 인간의 본성에 각인돼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양심이 언제 발현되는지도 나름의 이론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먼저 일상적 사례를 통해 양심적 행동이 생각보다 흔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할퀴었을 당시 미국인이 낸 구호성금은 8억 달러를 넘었다. 무법지대가 된 피해 지역에서 수백 명의 약탈자 무리가 날뛰었지만, 수만 명의 주민은 약탈에 가담하지 않았다. 양심적으로 행동한 이들이 더 많았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평범하고 흔한 일이기에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실험실 게임'의 결과…'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틀렸다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니라는 점을 더 엄밀하게 주장하기 위해 저자는 여러 실험실 게임의 결과를 꺼낸다.
그 중 하나는 최후통첩 게임이다. 두 명의 피험자가 참가하는 이 게임에서 제안자는 20달러를 받은 뒤 수용자에게 얼마를 줄지를 택한다. 수용자가 제안자의 제시 금액을 거절하면, 제안자도 돈을 받지 못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이 맞는다면, 제안자가 1센트보다 많은 돈을 주는 한 수용자는 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안자가 자신이 받은 돈의 상당량을 떼어주지 않으면 수용자는 제안을 거절한다.
최후통첩 게임의 변형인 독재자 게임의 결과도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독재자 게임은 최후통첩 게임과 같은 구조로 이뤄져 있지만, 수용자가 제안자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이 다르다. 역시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이 맞는다면, 제안자는 돈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3개 문화권에서 이 실험을 한 결과 제안자들은 평균 31%, 20%, 32%의 돈을 수용자에게 줬다.
실험실 게임의 결과를 바탕으로 저자는 인간은 물질적 이득뿐 아니라 복수심이나 양심 같은 비경제적 요인에도 반응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자신이 관심을 갖는 영역은 이 중 더 긍정적인 특질인 양심이라고도 밝힌다.
인간의 양심을 촉진하는 사회적 맥락, 복종·동조·공감
물론 최후통첩 게임과 독재자 게임에서 제안자는 자신의 돈을 다 주지는 않는다. 즉 인간은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듯 양심적이기만 한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양심은 언제 발현될까. 저자의 질문에는 실천적 문제의식이 담겨있다. "모델을 부수려면 모델이 필요하다." 즉, 인간의 양심에 초점을 둔 행동 예측 모델을 만들어야 입법자와 정책가가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간 행동을 관리하는 법·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고, 이때 진정으로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이 무너진다.
저자는 사회심리학적 의미의 사회적 맥락, 즉 "사람들이 타인에게 갖는 인식"을 양심의 "촉매제"로 본다. 이는 "남들이 무언가를 원하리라는 믿음, 다른 이들이 무언가를 필요로 하리라는 인식, 다른 이들이 현재 어떻게 행동하고 있고 혹은 향후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예상 같은 것"이다.
이어 저자는 양심을 발현시키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맥락'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제시한다. "권위자로부터의 지시", "다른 사람들이 친사회적으로 행동하리라는 믿음", "다른 사람들이 받는 혜택의 크기"다. 저자는 이 사회적 맥락들이 각각 "권위에의 복종", "주변 사람의 행동에 따르는 동조", "타인과의 공감"이라는 인간 본성의 세 가지 보편적 특질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강력하며, 입법자나 정책가가 활용하기에도 좋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연구 윤리와 관련해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킨 '밀그램 실험'은 복종의 힘을 보여준다. 피험자는 교사 역할을 맡는다. 연구자의 지시에 따라 피험자는 학생 역할을 맡은 배우가 시험 문제를 틀리면, 전기충격 장치의 강도를 올려야 한다. 이 장치는 가짜지만, 배우는 장치의 강도가 올라갈 때 고통스러워하는 연기를 한다. 이 실험에서 강도를 최고치까지 올린 피험자는 40명 중 27명이었다.
동조의 힘을 보여주는 연구도 있다. 피험자를 방에 혼자 둔 뒤 환기구를 통해 연기를 흘려보내면, 피험자는 밖으로 나가 연구자에게 이상하다고 보고하는 일반적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받은 2명의 배우를 방에 함께 넣고 연기를 흘려보내면, 피험자도 가만히 있는다. 앞서 나왔던 독재자 게임에서는 '다른 독재자 게임의 피험자들은 돈을 나눴다'는 정보를 말해주자 이를 들은 독재자들도 더 많은 돈을 나눴다.
이번에는 공감의 힘을 보여주는 연구다. 역시 독재자 게임에서 상대방에게 나눠주는 돈을 연구자들이 불려서 줄 것이라고 제안자에게 알리면 제안자는 더 많은 돈을 건넨다. 이는 인간이 타인이 받는 혜택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fMRI 촬영 결과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내가 고통 받을 때와 비슷한 활동이 두뇌 안에서 일어난다는 연구도 있다.
책에 복종, 동조, 공감을 입법자가 정책가가 인간 행동을 관리하는 법·제도를 만드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지는 않다. 다만 이미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고 있는 현대의 법체계가 '인간에게 양심이 있다'는 생각과 이를 촉진하는 세 가지 사회적 맥락을 활용해 세워졌다는 점은 미국의 사례를 통해 꼼꼼하게 적혀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의 영향력이 증대된 결과
문제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뒤집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백퍼센트 양심적인 존재가 아니며 백퍼센트 이기적인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권위에의 복종'과 '타인에 대한 동조'는 인간의 이기적인 면을 강화하는 데도 쓸 수 있다.
미국사회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1975년에서 1996년 사이 '좋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자리가 훌륭한 삶의 중요요소'라고 답한 이의 비율은 38%에서 32%로 줄어든 반면, '돈을 많이 버는 일자리가 훌륭한 삶의 중요요소'라고 답한 이의 비율은 38%에서 63%로 늘었다. 타인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본 미국인의 비율도 1950~1960년대 55~60%이던 것이 1990년대에는 30%대로 감소했다.
변화의 원인으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의 영향력 증대가 지목된다. 수십 년 간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을 인간의 행동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으로 여기고 교육과정에서도 강조한 결과 이를 내면화한 사람이 늘었고, 입법자와 정책가, 사업가와 경영자도 물질적 유인책에 의존해 인간의 행동을 관리하는 법·제도를 늘려왔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대한 강조가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작동해 사회 전체를 물들여 사람들의 양심이 줄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런 경향을 돌리기 위해 양심이 "강력한 동시에 일상 곳곳에 퍼져 있는 힘"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키울 방안을 찾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팍팍한 삶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보자는 차원의 제안만은 아니다. 책에 제시된 한 설문조사 연구에 따르면, 사회 구성원들의 남을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경제성장률 및 투자와 유의미한 양의 상관관계를 갖는다. 현실과 다른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이 공리주의적 기대마저 배반한 셈이다.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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