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의 반란, 격변하는 유럽 축구 [경기장의 안과 밖]

배진경 2024. 1. 13.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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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지배하는 축구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상대적 약체로 꼽히던 팀들이 감독과 시스템의 힘으로 좋은 성적을 거둔다. 여러 나라 리그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다.
2023년 12월1일 지로나 FC의 감독과 선수들이 발렌시아 CF와의 경기에서 이긴 후 기뻐하고 있다. ⓒAFP PHOTO

유럽 축구가 자본이 지배하는 체제로 돌아가는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이 경향은 한층 강화됐다. 빅클럽은 대규모 스폰서를 통해 자금력을 확보한다. 그 힘으로 슈퍼스타를 사 모은다. 스타는 관중을 불러 모은다. 팀의 재정 규모 확대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순환구조다. 자금력을 확보한 클럽이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은 것을 갖고 누린다. 중하위권 팀들과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리그 우승 경쟁은 그들만의 꽃놀이다. 유럽 빅5로 분류되는 리그(EPL·라리가·분데스리가·세리에 A·리그1)는 물론 UEFA 챔피언스리그도 이른바 ‘금수저’끼리 펼치는 경쟁 구도다. 챔피언스리그 챔피언을 배출하는 리그만 확인해보자. 20세기에는 FC 포르투, 벤피카(이상 포르투갈), 셀틱(스코틀랜드), 아약스, 페예노르트, PSV 에인트호번(이상 네덜란드),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루마니아), 츠르베나 즈베즈다(세르비아) 등 변방의 강자들이 정상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2004년 단 한 차례(포르투)를 제외하면 5대 리그 안에서만 챔피언이 나왔다.

이 구도를 깨는 성공은 기적 혹은 동화에 비견된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2015-2016시즌 EPL 챔피언에 오른 레스터 시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다시는 레스터 시티와 같은 언더독(상대적으로 열세인 팀)의 반란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2023-2024시즌 다시 ‘뻔한 예측’을 깨는 팀들이 등장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무대는 스페인 라리가다. 익히 알다시피 라리가는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라는 ‘빅3’ 구도가 명확하다. 2012-2013시즌 이후 이 팀들이 번갈아 우승하거나 3위 이내 순위를 차례로 점했다. 무려 11년 만에 그 판을 깨는 도전자가 등장했는데, 지로나가 그 팀이 될 거라고 예상한 이는 없었다. 18라운드 기준 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가장 많은 승점(45)을 챙긴 상태다. 골득실에서 밀려 2위이지만, 17라운드까지는 선두 자리를 유지했다. 팀 득점 기록은 오히려 레알 마드리드보다 3골 더 많다(42득점).

스페인 카탈루냐의 지로나시를 연고로 1930년 창단된 이 팀은 2017-2018시즌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1부 리그에 올랐다. 1부 리그에서 고작 네 번째 시즌을 맞았고, 역대 최고 성적은 10위였다. 국내에는 2부 리그 시절 백승호(전북)가 몸담은 팀으로 이름이 알려진 정도였다. 지로나가 주목받는 이유는 상대적 약체로 분류되던 팀이, ‘공격 축구’로 리그 판도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2021년부터 팀을 이끈 미첼 산체스 감독은 극단적인 공격 전술을 펼치고 있다. 42골을 선수 14명이 나눠 넣을 정도로 공격 루트도 다양하다. 경기 중 포백과 스리백을 오가며 상황과 상대 전술 움직임에 맞춰 능동적으로 변화한다. 시즌 반환점을 돌았는데도 지로나가 선두권에서 경쟁하자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이들을 주시하고 있다.

지로나가 강세를 보인 흐름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다. 지로나는 맨체스터 시티(잉글랜드), 뉴욕 시티(미국) 등이 속한 ‘시티풋볼그룹’이 지분 47%를 가진 구단이다. 시티풋볼그룹은 아랍에미리트의 거부인 셰이크 만수르가 설립한 일종의 지주회사다. 전 세계에 네트워크를 구축해 뛰어난 지도자와 선수를 스카우트하고 있다. 지로나는 구단 운영과 선수 영입 등에 맨체스터 시티와 같은 시스템을 도입했다. 잠재력이 높은 유망주를 수급해 충분한 경험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했는데, 이것이 수년째 진행되다 보니 돌풍을 넘어 태풍 수준으로 커진 것이다.

지로나가 지난여름 선수단 구성을 위해 쓴 이적료는 330억원 규모다. 레알 마드리드가 지난여름 영입한 미드필더 주드 벨링엄의 4분의 1 수준이다. 그렇게 발굴한 선수가 우크라이나 출신 공격수 아르템 도우비크와 빅토르 치한코우, 브라질 출신의 윙어 사비우다. 도우비크는 11골 4도움으로 팀 내 득점 1위, 공격포인트 1위에 올라 있다. 19세인 사비우는 왼쪽 측면을 공략하며 4골 5도움을 기록했다. 일약 빅클럽의 타깃으로 떠올랐다. 맨체스터 시티 이적설까지 나오고 있다. 시티풋볼그룹은 산하 멀티 클럽에서 발굴하고 키운 선수를 ‘본진’ 맨체스터 시티로 보내는 구상을 실현하려 한다.

이제 독일 분데스리가로 시선을 돌려보자. 한때 차범근과 손흥민이 뛴 곳으로 익숙한 바이엘 레버쿠젠이 리그 무패 행진(13승 3무)을 달리며 전반기를 마쳤다. 한 경기 덜 치른 리그 2위 바이에른 뮌헨보다 승점 4점이 높다. 유로파리그를 포함해 시즌 전체 경기로 따져도 25경기 무패(22승 3무) 중이다. 그간의 익숙한 분데스리가 경쟁 구도와는 다르다. 오랫동안 분데스리가는 뮌헨이라는 절대 강자에게 도르트문트, 라이프치히가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에서 우승 없이 준우승만 5회를 기록했다. 만년 2인자 이미지가 강한 팀이다. 최근에는 우승 도전보다 중상위권 경쟁이 더 익숙했다.

젊은 감독들의 전술과 영입 돋보여

레버쿠젠의 운명을 바꾼 이 역시 감독이다. 지난 시즌 도중 부임한 사비 알론소가 이 팀을 지휘하고 있다. 리그 17위까지 추락한 레버쿠젠은 이전까지 1군 사령탑 경험이 전무하던 알론소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현역 시절 리버풀, 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에서 세계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명성을 떨쳤지만 지도자 경력은 미미했기에 도박에 가까운 결정이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알론소 감독은 공격적인 스리백을 기반으로 유연한 축구를 만들어내 우려를 불식시켰다. 스페인의 이름난 미드필더 출신답게 지배하는 경기 운영을 하다가 상대에 따라 뒤로 물러서 공간을 잠식하는 축구도 펼친다. 수적 우위 상황을 만드는 게 핵심이다. 전술 패러다임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시즌 강등권에 있던 팀을 6위까지 끌어올린 알론소 감독은 올 시즌 강력한 창(팀 득점 2위)과 견고한 방패(최소 실점 1위)를 장착하며 1위를 내달리고 있다. 이런 센세이션은 알론소 감독의 주가를 한층 높였다. 1981년생인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차기 감독으로 가장 먼저 언급된다.

EPL에서는 아스널의 강세가 돋보인다. 2023년 12월24일 열린 리버풀과의 원정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아스널은 승점 40 고지를 가장 먼저 밟았다. 2년 연속 크리스마스를 EPL 1위로 보내게 된 것이다. 아스널은 지난 시즌 뒷심이 무너져 맨체스터 시티에 역전 우승을 허용했다. 올 시즌 다시 한번 리그 정상에 도전하는 중이다. 12월28일 기준 한 경기를 더 치른 리버풀에 승점 2점 차이로 뒤져 있다.

아스널을 이끌고 있는 미켈 아르테타 감독. ⓒREUTERS

아스널의 도전 역시 감독의 리더십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켈 아르테타가 그 주인공이다. 에버턴, 아스널에서 선수로 맹활약한 그는 지도자 변신 후 맨체스터 시티에서 과르디올라 감독의 오른팔이 됐다. 아르테타는 과르디올라 감독의 전술적 철학을 기반으로 자신의 방식을 더해 알론소 감독처럼 축구 전술의 ‘트렌드세터’가 됐다. 일종의 청출어람이다. 아스널은 2000년대 초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함께 EPL을 이끄는 쌍두마차로 군림했다. 그러나 거대한 신축 경기장 에미리트스타디움을 짓는 데 많은 자금을 쏟아부었다. 선수단 운영은 위축됐다. 자연스럽게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이런 팀 사정을 잘 아는 아르테타 감독은 적은 이적료로 숨은 진주를 발굴하는 안목을 발휘했다. 2019년 감독 부임 후 젊고 에너지 넘치는 선수들을 영입했고, 이제는 그들과 함께 20년 만의 정상 탈환에 도전하고 있다.

감독의 혁명이 팀의 운명을 바꿔놓은 사례는 최근 국내 축구에서도 보인다. 김기동 감독과 이정효 감독이 대표적이다. 김기동 감독은 포항 스틸러스에서 제한된 예산으로 고효율을 내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선수 인건비만으로는 K리그1 12개 팀 중 9~10위권 수준인 팀이지만, 전술과 경기력은 우승권이었다. 올 시즌 포항은 리그 2위, FA컵 우승,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무패(5승 1무) 행진의 성과를 냈다. 김기동 감독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이번 겨울 국내 프로스포츠 한국인 감독 최고 대우를 받으며 FC 서울 사령탑에 올랐다.

이정효 감독은 ‘흙수저’ 열풍을 일으켰다. 승격 팀 광주 FC를 리그 3위에 올려놨다. 광주는 리그에서 가장 낮은 인건비를 쓰는 팀이다. 선수단은 대부분 2부 리그에서 함께 올라온 이들로 꾸렸다. 하지만 세심하고 변화무쌍한 전술로 울산, 전북 등 몇 배나 예산이 많은 팀들을 무너트렸고 결국 3위로 시즌을 마쳤다. 프로 감독 데뷔 2년 만에 일약 한국 축구 지도자 최고의 기린아가 된 이정효 감독은 “흙수저도 땅을 파면 금맥을 찾을 수 있다”라는 말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자본의 논리를 비트는 시도는 이렇게 짜릿하다.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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