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나도향은 왜 ‘카르멘’ ‘춘희’에 끌렸을까
‘벙어리 삼룡’ ‘물레방아’ ‘뽕’같은 대표작을 남긴 나도향은 1920년대 근대 문학 요람기의 스타다. 5년 남짓 활동하면서 20여편 작품을 남긴 나도향은 스물넷에 요절, 동시대인들에게도 안타까움을 남겼다. ‘벙어리 삼룡’은 1920년대 영화화되면서 대중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카르멘’ ‘동백꽃’같은 소설 번역가로도 활약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나도향은 창간 1년을 넘긴 조선일보에 1921년 11월부터 12월5일까지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을 번역, 연재했다. 당시 제목은 ‘연애소설 칼멘’. 신문에 적힌 연재 횟수는 27회였다. ‘카르멘’은 1925년1월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원작인 ‘동백꽃’(춘희)은 나도향이 타계한 이듬해인 1927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됐다. 나도향은 투르게네프 산문시(12편)와 모파상 단편 ‘추억’을 번역해 각각 ‘백조’, ‘신민공론’에 실었고, 톨스토이 단편(7편)은 1925년7월 박문서관에서 펴냈다. 짧은 창작기간 중 잡지 연재를 제외하고 단행본만 3권을 펴낸 것만 봐도, 번역 비중이 만만치 않다.
◇'카르멘’ 첫 번역한 나도향
‘당신의 말씀은 안될 말씀입니다. 나는 벌써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당신은 아직 나를 사랑하세요. 그런 까닭에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합니다. 거짓말을 하여 당신을 속이랴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은 그러나 나는 그런 긋찮은 일을 하랴고는 하지 않아요. 우리의 사이는 이것뿐입니다. 나의 로미로써 당신의 로미를 죽일 이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칼멘은 언제든지 자유로운 몸으로 있습니다.’(연애소설 ‘칼멘’ 27, 조선일보 1921년12월5일)
‘칼멘’ 연재 마지막은 ‘자유’를 내세우며 돈 호세의 여인이기를 거부하는 카르멘의 저항이 클라이맥스다. 결과는 물론 죽음이다. 카르멘은 순진한 병사 호세를 유혹해 범죄에 빠뜨린 뒤 배신하는 ‘팜므 파탈’(악녀) 전형이다.
비교문학연구자 손성준 한국해양대 교수는 ‘아무도 카르멘을 소개한 적 없던 시기에 홀로 두 차례나 완역을 감행’했다면서 ‘ ‘카르멘’은 나도향 번역의 본령’(‘나도향 소설의 낭만성과 그 문학적 원천-’카르멘’과 ‘춘희’를 중심으로’,2019)이라고 했다. 그는 나도향이 저본으로 삼은 일역본으로 1914년 이쿠다 조코(生田長江, 1882~1936)가 ‘세계문예에센스 시리즈’ 제10권으로 출간한 ‘카르멘’(청년학예사)을 지목한다. 나도향은 저본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쿠다 책의 번역 어휘 및 표현이 나도향 번역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이유다.
나도향이 요약 번역을 신문에 연재한 뒤 재번역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1925년 1월 출간할 만큼, ‘카르멘’에 공력을 쏟았다는 점도 주목한다. ‘카르멘’의 ‘요부’(妖婦) 캐릭터는 1925년 나도향이 발표한 ‘물레방아’, ‘뽕’ 여주인공에 변주돼 나온다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남자는 거부하는 ‘물레방아’ 이방원의 처나 ‘뽕’의 안협집은 자유를 선언하는 ‘카르멘’과 닮았다.
손 교수는 나도향 초기작 ‘출학’(黜學) ‘젊은이의 시절’ ‘춘성’의 등장 여성도 요부 캐릭터가 두드러지는데다 사후 출간된 초기작(1920년경 집필)인 중편 소설 ‘청춘’이 살인과 파국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카르멘’이 나도향에게 미친 영향이 압도적이라는 분석이다.
◇354쪽 대작 ‘동백꽃’
‘동백꽃’ 번역은 나도향이 최초는 아니다.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진학문의 ‘홍루’(紅樓)가 있기 때문이다. 이 번역 소설은 당시 독자 감상문 투고가 줄이을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그런데 나도향이 가장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인 번역 작품도 ‘동백꽃’이다. 우선 분량이 ‘카르멘’의 98쪽에 비해 354쪽으로 훨씬 길다.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인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1848년 쓴 ‘동백꽃 여인’은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원작이기도 하다. 지식인과 화류계 여성과의 사랑을 다룬 ‘동백꽃’은 나도향의 유일한 장편 소설 ‘환희’에서도 그대로 변주된다. 남자 측 가족 반대로 이별하고,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애타게 찾다가 최후를 맞는다는 점이 그렇다.
◇”문학가보다 차라리 음악방면으로 나가고 싶다”
나도향이 번역한 ‘카르멘’ ‘동백꽃’이 지금도 세계 극장에서 가장 많이 올리는 오페라 원작인 점도 흥미롭다. 그가 비제 ‘카르멘’이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를 직접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조선에서 전막 오페라가 공연된 것은 1937년5월 경성 부민관에서 일본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가 주연한 ‘나비부인’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향은 서양 음악 애호가였던 것같다.
노산 이은상은 ‘그는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서 어느 때는 문학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음악방면으로 나가고 싶다고 자기 과거를 고백한 일이 있었다’고 썼다. ‘백조’ 동인들의 비화를 소개하면서 ‘도향은 구노의 ‘세레나데’와 ‘사자수’(四泚水)로 명창’( ‘문단에 사라진 삽화’7.’백조’잡지를 둘러싼 비화, 조선일보 1935년2월26일)이었다는 회고가 있을 만큼 노래도 잘 불렀던 모양이다.
◇ ‘백조’ 창간호 실은 ‘젊은이의 시절’ 음악회 소재
스무살 나도향이 1922년 ‘백조’ 창간호에 실은 단편 ‘젊은이의 시절’이 음악회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나도향은 홍사용, 박종화,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그런데 첫 작품부터 음악회를 주요 소재로 활용할 만큼 음악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남달랐다. ‘젊은이의 시절’은 가짜 예술가에게 농락당한 음악가 누이를 향한 애상적 넋두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음악가 얘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도향 자신의 신변 고백이라는 추측까지 나온다.
◇1920년대 영화 원작료는 초대권 10장
나도향 소설은 일찍부터, 그리고 여러 차례 영화화됐다. ‘벙어리 삼룡’이 대표적이다. 광복 이후 ‘물레방아’ ‘뽕’은 여러 편이 제작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영화계가 출범한 1920년대 원작료를 지불한다는 개념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아리랑’ 감독 겸 주연 나운규는 1929년 나도향 대표작 ‘벙어리삼룡’을 영화화하면서 원작료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소설(小說)을 영화(映化)하는데 종래에 고료(稿料)(?)라할지 촬영료(撮影料)라할지 하는것이 있었는지?춘원(春園)의 ‘개척자’같은 것도 초대권10매로 때웠다 하고 나도향의 ‘벙어리삼룡’이 역시 공자(空字)이었다 한다.’ (‘문단풍문’, 조선일보 1930년6월7일) 춘원 이광수도 영화 초대권 10장으로 원작료를 때울 정도였으니, 나도향이야 오죽했겠나 싶다. 1929년 개봉한 ‘약혼’은 팔봉 김기진 원작을 토대로 했는데, 당시 교사 월급인 50원을 받은 게 원작료의 효시였다고 한다. 이듬해 약간 올라서 최독견이 영화 ‘승방비곡’ 원작료로 80원을 받았다는 게 뉴스가 될 정도였다.
◇한국 오페라의 씨앗을 뿌리다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올린 첫 오페라가 ‘라 트라비아타’와 ‘카르멘’이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테너 이인선이 이끈 조선오페라협회가 1948년 1월16일~20일 명동 시공관에서 올린 ‘춘희’를 한국오페라 기점으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인선은 1950년 1월27일~2월2일 시공관에서 ‘카르멘’을 올렸다.
두 작품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나도향의 공(功)도 무시못할 것같다. 한국 오페라의 씨를 뿌린 나도향은 우리 음악가들이 올린 ‘라 트라비아타’는 물론 ‘카르멘’도 보지 못했다.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의 작가 나도향의 흔적이 한국 오페라의 출발점에 남아있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참고자료
손성준, 나도향 소설의 낭만성과 그 문학적 원천-’카르멘’과 ‘춘희’를 중심으로,코기토 87, 부산대인문학연구소, 2019,2
박진영, 한국에 온 톨스토이,한국근대문학연구 23, 한국근대문학회, 2011 상반기
한상옥, 나도향과 그의 작품세계, 어문연구 24, 어문연구회, 1993,10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음악춘추,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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