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은 왜 일본에 끌리나… ‘평화의 얼굴’을 한 정체된 사회라서
사라진 일본
알렉스 커 지음|윤영수·박경환 옮김|글항아리|400쪽|2만원
이 책이 독자를 유혹하는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는 저자다. 저자 알렉스 커(72)는 미국인이지만 일본어로 글을 쓰고 강의한다. 해군 장교 아버지를 따라 1964~1966년 일본에 처음 살았고, 1977년부터는 교토부 중서부의 가메오카시(市)에 살고 있다. 예일대에서 일본학을, 옥스퍼드에서 중국학을 전공한 동아시아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하다. 1994년 이 책으로 일본어로 쓰인 최고의 논픽션에 부여되는 신초학예상을 받았다. 외국인이 이 상을 받은 첫 사례다. 당시 심사를 맡은 일본 저술가 시바 료타로는 “알렉스 커의 문장은 가부키 배우 다마사부로의 춤을 떠올리게 한다. 모순, 이율배반, 상반된 감정의 양립으로 두 요소가 얽힌 채 나아간다”고 평했다. 이번에 국내에 소개된 책은 2015년 개정해 영역한 판본을 옮긴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1946)을 비롯해 서구인의 눈으로 일본을 바라본 책은 많다. 커의 책 역시 서구의 렌즈로 일본을 파헤치지만, 초점은 애정어린 비판에 맞춰져 있다. 서구인들은 왜 일본에 끌릴까? 저자가 찾은 답은 ‘편안함’이다. 그가 일본학을 전공한 외국인 친구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흥분된 순간을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선종사원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데 스님들이 걸어가면서 은빛 장삼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네.” 이러한 ‘평화’를 ‘정체’ 때문이라 분석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은 50년간 단절 없는 평화의 시대를 보냈다. 그 기간에 일본 사회 시스템과 콘크리트는 빠르고 견고하게 굳었다. 일본은 사회적으로 정체된 나라가 되었고 일본에 끌리는 다수의 외국인은 그런 데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는 일본이 이룬 큰 업적 중 하나지만, 저자는 “엄연히 존재하는 부라쿠민(과거 불가촉 천민의 후손)이나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는 조심스럽게 뒤로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시스템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지 말아야 하는 분위기며, 그 결과 여성이나 생태, 각종 법적 문제, 또는 소비자를 옹호하는 변호 단체의 힘은 형편없이 약하다.”
저자는 “일본은 중국과 달리 항상 다른 나라로부터 문화를 수입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가슴 깊은 곳에서 스스로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린다”면서 “모든 사람을 ‘일본을 때리는 사람’ 아니면 ‘일본을 사랑하는 사람’ 둘 중 하나로 본다”고도 말한다. “세상 그 어느 나라도 일본만큼 자화자찬하는 책이 많지 않다.” 그래서 일본학 분야 외국인 학자는 주장을 펼 때 조심해야 한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일본 넘버원’이라는 책을 써서 명사 대우를 받았다. 반면 언어학자 로이 밀러는 일본어가 타 언어에 비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언어학자들에게 도전하는 책 ‘현대 일본의 신화’를 썼다가 ‘일본 때리기’라며 배척당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학자들은 비판적 시각을 포기한 채 일본에 ‘전향’하는 경향이 있다 “가끔 나는 ‘일본학’을 ‘일본 숭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 문화 전반을 가로지르는 특징을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순간의 미학을 강조하는 간결한 하이쿠나 와카가 발달했지만, 서사나 생각을 길게 풀어낸 시는 아주 드물다는 것이다. 긴 운문은 렌카(連歌)처럼 진주를 하나씩 꿰어 길게 만드는 방식으로 생겨났다. 저자가 도쿄의 부동산업계에서 일할 때도 ‘순간의 문화’가 눈에 띄었다. 상세한 건축 법규가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하나, 건물의 디자인이 거리나 스카이라인과 갖는 미적 관계는 무시돼 “부주의하고 일관성 없고 추한 경관이 탄생했다”는 것. “고가도로 시스템의 안타까운 상황 또한 렌가식 사고방식의 결과다. 마스터 플랜이 없고 한군데의 고속도로 구간을 건설한 연간 예산을 하나씩 꿰어갈 뿐이다.”
특히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일본이 저물고 있다 비판한다. 중국과 달리 일본인이 다도(茶道) 용구를 제외한 자국 전통 미술품에 무관심해 2000년 이후 일본 미술품 가격이 급락하고 있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나의 컬렉션 능력은 오로지 하나의 사실에 기대고 있다. 일본인들의 아시아 미술에 대한 무관심. 이것이 지속되는 한 나는 컬렉션을 늘려갈 수 있다.”
일본 시스템을 선진화되었다고 여기는 우리 눈엔 저자의 시각이 다소 낯설게 여겨지지만 그래서 오히려 일본을 다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중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상가이고, 일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감각적이다” 같은 세련된 문장이 읽는 즐거움을 안기는 지적인 책이다. 원제 Lost Japan.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사생팬’ 그 시절 영광 다시 한 번... 정년이 인기 타고 ‘여성 국극’ 무대로
- 러시아 특급, NHL 최고 레전드 등극하나
- 김대중 ‘동교동 사저’ 등록문화유산 등재 추진
- 국어·영어, EBS서 많이 나와... 상위권, 한두 문제로 당락 갈릴 듯
- 배민·쿠팡이츠 중개 수수료, 최고 7.8%p 내린다
- 다음달 만 40세 르브론 제임스, NBA 최고령 3경기 연속 트리플 더블
- 프랑스 극우 르펜도 ‘사법 리스크’…차기 대선 출마 못할 수도
- [만물상] 美 장군 숙청
- 檢, ‘SG발 주가조작’ 혐의 라덕연에 징역 40년·벌금 2조3590억 구형
- 예비부부 울리는 ‘깜깜이 스드메’... 내년부터 지역별 가격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