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비둘기 멸종을 부른 것도, 막은 것도 인간

장강명 소설가 2024. 1. 13.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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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벽돌책] 100가지 동물로 읽는 세계사

잡학 사전 유의 책들을 좋아해서 종종 읽는 편이다. 그렇게 사이먼 반즈의 ‘100가지 동물로 읽는 세계사’(현대지성)를 집어 들 때에는 이 책도 역사에 등장한 동물들에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 모음집이겠거니 했다. 미국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먹게 된 사연이라든가, 누에나방과 전근대 비단 산업의 성장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728쪽짜리 이 두툼한 하드커버 서적은 그런 일화들을 담은 재미있는 읽을거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한데 그 이상의 깊이도 듬뿍 담겨 있었고, 나는 책장을 넘기며 ‘역사에 등장한 동물들’이라는 생각 자체를 반성하게 되었다. 역사를 오직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것으로, 동물들은 거기에 가끔 식재료나 산업의 도구로 등장한다고 여겼던 거다. 큰 착각이었다.

장강명 소설가

베테랑 저널리스트이자 환경운동가인 저자가 말하는 ‘세계사’는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큰 개념이다. 이 세계사에서 동물은 당당한 주역이고, 때로는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지구의 모습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지렁이는 300만 년 전부터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다른 육지 동식물들이 자랄 수 있었다. 책에 따르면 ‘우리가 먹는 음식의 약 90퍼센트는 지렁이의 도움으로 얻은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해산물과 수경 재배 작물 정도다.’

그럼에도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초점을 맞추는, 목차에 없는 101번째 동물은 역시 인간이다. 갑자기 큰 힘을 얻는 바람에 오만하고 무책임해진 종, 이제는 지렁이 이상으로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종이다. 책에는 인간이 멸종시킨 동물과 인간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빠진 동물들이 숱하게 나온다.

다행히 인간은 지렁이와 달리 자신의 영향력을 자각한다. 마지막 도도새를 죽일 때까지만 해도 인간은 어떤 동물이 멸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하지만 도도새와 마찬가지로 모리셔스 고유종인 분홍비둘기는 멸종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분홍비둘기의 서식지를 파괴한 것도, 그들의 멸종을 막은 것도 인간이었다. 기회는 아직 있다.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균형 잡힌 시선이 신뢰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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