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버려진 아기' 주운 청소부의 선택은…"나약하면 의미 없는 삶인가" [책과 세상]

전혼잎 2024. 1. 13.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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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 장편소설 ‘분지의 두 여자’
생명 탄생·폐기 반복되는 분지 도시서
각자의 이유로 대리모 되려는 여성들
재해 같은 삶 묵묵히 사는 인간 그려
강영숙 소설가. Melmel Chung 촬영

도시 전체가 깊게 잠든 새벽, 공원의 쓰레기를 치우다가 버려진 아기를 발견한 청소 용역업체의 한 남성 직원. 그리고 각자의 이유로 대리모가 되고자 하는 두 여성. 성별도, 처지도 제각기 다른 이들의 교집합은 ‘잉태된 생명’이다. 어떤 생명이 길가에 나뒹구는 쓰레기의 위치에 놓여있을 때 다른 생명은 난자 공여자, 대리모, 또 실제 양육자까지 총 3명의 엄마에 의해 태어날 준비를 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문은 이런 현실에서도 과연 유효한가.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장편소설 ‘분지의 두 여자’를 쓴 강영숙 작가는 “우리의 삶이 삶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대체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상한 징후”에 집중하며 소설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로 살처분된 닭이 볏이 파랗게 변한 채 구덩이에 파묻히고, 강진이 도시를 덮치는 재난과 개인적 불행이 겹쳐지는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의 삶은 그 자체로 재해다. 불가해의 사건 속 실존적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그려온 강 작가는 생명의 폐기와 탄생이 엇갈리는 분지 지형의 B도시를 무대로 인물들의 재난 같은 삶을 촘촘하게 따라간다.


극적이나 ‘보통의 삶’ 사는 인물들

분지의 두 여자·강영숙 지음·은행나무 발행·232쪽·1만6,800원

이야기는 서울에서 생활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 용역 민준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두운 바닥에 놓인 바구니 안 "흰 덩어리", 알고 보니 “진짜 아기”를 발견한 그의 선택은 다소 기이하다. 바구니를 집어 들고 자신의 집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것. “지금 아기를 집에 두고 오면 아무도 모를 거라 확신하면서.” 한국인이지만 샤오라는 이름으로 삼계탕 식당에서 일하는 희선, 수도권 여성전문대학에서 강의하는 진영과 남편 이규, 또 진영을 통해 아이를 낳으려는 여성 희우가 각각 화자가 되어 저마다의 사정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민준은 아버지의 빚과 어머니의 치매로 “거의 바닥까지 밀려난” 존재가 됐고, 진영과 이규는 대학생 딸이 살해되면서 “자식을 잃은 자”로 호명된다. 샤오는 남편에게서 도망치려 딸을 버리고 집을 나와 중국동포 행세를 하며 일용직을 전전하고, 희우는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남편에게 죄인이 된 기분에 시달린다. 책장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삶에선 기시감이 든다. 샤오가 일하는 서울 안국역 삼계탕집, 신도시 크기의 인공호수가 있는 B도시의 무채색 풍경은 현실감을 더한다.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다”지만

지난해 1월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내부 공간의 모습. 이 교회에 따르면 지난 2009년 베이비박스 설치 이후 총 2,076명의 아기가 맡겨졌다. 연합뉴스

딸을 잃고 대리 출산을 통해 “자신에게도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는 약간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된” 진영과 딸을 위해 모아 뒀던 300만 원을 빼앗기고 돈을 위해 대리모가 되려는 샤오는 B도시의 클리닉에서 마주한다. 이타적 출산을 꿈꾸는 진영과 금전적 이득을 원하는 샤오는 극단에 있는 듯 보이지만, 이들은 나란히 모종의 사태에 휩쓸린다. 누구도 태어날 아이들을 원치 않게 된 급박한 상황에서 숨을 쉬지 않는 아기가 든 바구니를 아동병원 응급실에 두고 도망치는 민준의 선택까지 포개진다.

소설은 마냥 희망찬 해피엔딩은 아니다. “어디서 왔든, 어디로 가든,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다”며 “우리는 늘 우리가 태어난 자리의 상식과 인식의 틀 안에 존재할 뿐”이라는 민준의 독백은 운명결정론으로 읽힌다. 2017년 이효석문학상 수상 당시 “인간도 인간의 의식도 의지도 관계도 실은 물질성 안에 갇혀 지배를 받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라는 작가의 인터뷰와도 겹친다.

‘선택권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인간의 삶에는 큰 의미가 없을까. “그런데 있잖아요. 우리가요, 우리가 애를 낳아 키운 건 잘한 일일까요”라는 진영의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낳아서요”라는 샤오의 대답은 무심하나 무책임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소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쉽게 낙관하거나 비관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 그 자체를 조명하고 있어서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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