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어디로... “중국이 편애하는 자” VS “전쟁 불러올 사람”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의 최전선인 대만에서 13일 차기 총통(대통령 격)을 뽑는 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와 세계 안보 정세, 기술·무역 등 경제 지형이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
강력한 친미(親美), 대만 독립 노선을 추구하며 중국과 대립각을 세워온 집권 민진당 차이잉원 현 총통이 3연임 제한으로 불출마하는 가운데, 2인자 라이칭더 부총통이 여당 후보로 정권 재창출에 도전한다. 이에 맞서 친중(親中) 성향으로 중국의 지지를 받아온 제1 야당 국민당의 허우유이 후보는 8년 만의 정권 탈환을 노린다. 앞서 지난해 11월 허우유이는 중도 성향의 제2 야당 민중당 소속 커원저 후보와 단일화를 추진했지만, 선거 후보 등록 직전 협상이 결렬됐다.
지난 2일까지 공개된 여론조사에선 라이칭더가 허우유이를 오차 범위 이내인 3~5%포인트 앞섰다. 젊은 층의 지지세가 강력한 커원저 후보가 얼마나 선전할 것인지, 공개적으로 표심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른바 ‘샤이 국민당’ 지지자가 얼마나 될지가 선거 결과를 좌우할 변수로 꼽힌다. 현지 정치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이번 선거는 20만~50만 표 차이로 결론이 날 초박빙 선거”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입법위원(국회의원)도 함께 뽑는다. 선거 결과는 이르면 오후 8시쯤 발표된다.
선거를 앞두고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은 가열되는 양상이다.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10일 중국을 겨냥해 “대만 선거에 대한 어떤 형태의 외부 개입도 반대하며, 선거 후 대만에 비공식 대표단을 파견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에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1일 “중국의 일부인 대만 지역 선거는 외부 개입이 용납되지 않는 내정 사안이며, 미국의 부당한 관여를 단호히 반대한다”고 했다.
대만 총통 선거 전날인 12일 저녁, 수도 타이베이와 수도권 대도시 신베이에서 열린 세 후보의 마지막 유세에는 총 80만 명이 몰렸다. 반중인 여당 민진당의 신베이 유세 현장에서는 ‘미덕이 대만에서 승리한다(美德贏台灣)’는 문구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소리 내서 읽어보면 ‘메이더 잉 타이완’으로 ‘Made In Taiwan(메이드 인 타이완)’과 거의 비슷하다. ‘메이더(美德)’는 라이칭더(賴淸德)의 이름과, 러닝메이트인 부총통 후보 샤오메이친(蕭美琴) 전 미국 주재 대만 대표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민진당은 대만은 중국과 다르다는 의미로 공식 국호 ‘중화민국’ 대신 ‘타이완(대만의 현지·영어 발음)’을 주로 쓴다.
이에 맞서 친중인 제1야당 국민당은 유세 주제를 ‘중화민국 되찾기’로 잡으며 차별화에 나섰다. 양당은 1.4km 떨어진 신베이의 반차오 제2운동장과 반차오 제1운동장에서 각각 유세를 가졌다. ‘유세 명당’으로 꼽히는 타이베이 총통부 앞 카이다거란 대로는 중립을 표방한 제2야당 민중당이 선점했다.
유세 현장에서 라이칭더 민진당 후보는 “중국이 편애하는 인사가 나의 라이벌. 대만이 다시 중국에 붙으면 우위를 잃게 된다”고 했다. 정권 2인자(현직 부총통)인 그는 중국 본토로부터 ‘차이잉원 총통보다 더한 독립주의자’란 평가를 듣는다. 반면 국민당의 허우유이는 “중화민국의 안보를 지키고, 이 땅이 안정과 번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이곳에 모였다”고 했다. 그는 전날 외신 기자회견에서는 “대만 독립 주장은 전쟁을 불러오는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민중당의 커원저는 청년과 중도층을 향해 “함께 새 정치를 만들자”고 했다.
유세장에서 만난 청중들에게 관점은 달라도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 문제는 주요 관심사였다. 신베이의 교사 차이모(55)씨는 “양안 문제를 논하지 않고 어떻게 대만의 미래와 경제를 말하느냐”고 했다. 타이베이의 택시 운전사 리모(45)씨는 “주변에 30% 정도의 얼간이들은 작년부터 전쟁 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원생 양모(25)씨는 “중국을 무서워하는 놈들이 걸리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국민당 지지자 정모(67)씨는 “진짜 전쟁이 일어나 중국이 타오위안 공항(타이베이 항공관문)만 공격해도 무너질 것”이라며 “순진한 사람들이 대만을 비참한 미래로 이끈다”고 했다.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기 전까지 근소한 열세를 보였던 허우유이 측은 표심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은 이른바 ‘샤이 국민당’ 지지자들의 숫자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막판까지 표심 끌어내기에 주력하고 있다.
선거전의 이슈는 양안 문제만은 아니었다. 올해 선거에서 전례 없이 넓은 ‘중간지대’가 형성됐다. 이른바 ‘먹고사니즘’이 중요하게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런 민심은 설문조사로도 확인됐다. 대만 시사 잡지 ‘천하잡지’가 최근 성인 1만5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차기 총통의 최우선 해결 과제’를 묻는 질문에서 1위는 ‘경제 문제’로 양안 관계(2위)를 앞섰다.
현장에서도 이런 민심을 들을 수 있었다. 궈모(38)씨는 “대만은 과거 ‘돈이 발목까지 차올랐다’는 말을 듣는 땅이었는데, 지금은 연봉 동결과 물가 급등의 땅이 됐다”고 푸념했다. 타이난에서 만난 첸모(24)씨는 “민진당을 찍을까 했는데, ‘분노와 복수심’에 치우친 정책과 늘어난 빈부격차에 실망했다”고 했다. 중년 남성 런씨는 “중년층은 한 명이서 4~5명을 부양해야 하는데 우리 부모처럼 연금을 제대로 누릴 수 있으려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대만의 반도체 일변도 산업 지형과 지나친 중국 자극으로 인한 불만의 목소리도 있었다. 신베이에서 만난 30대 여성은 “양안 전쟁은 대만의 태도에 달린 게 아니라 중국 내부와 국제 정세에 달려 있으니 전쟁 걱정할 시간에 산업 다양화와 국방력 강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쑹청언(宋承恩) 원경기금회 부집행장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민주 환경에서 자랐던 청년층이 장기적인 안보 위협에 질린 탓에 민생 문제로 관심이 옮겨간 것”이라고 했다.
커원저는 이런 민심 파고들기에 주력했다. 이번 선거에서 그는 최대 20%까지 득표해 판세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적지 않다. 그는 청렴·민생을 내세우면서 양안 문제에서는 국민당, 외교 노선에서는 민진당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마지막 날 타이베이 유세 현장에는 3당 가운데 가장 많은 35만 명이 집결했고, 인터넷 생중계도 32만 명이 시청했다. 이 같은 선전의 동력으로 강력한 청년 지지층 ‘새싹 부대’가 꼽힌다. 2030이 주축인 이들은 대만의 새로운 정치의 새싹이 되겠다는 취지로 새싹 모양의 머리 장식을 꽂고 커원저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이들의 최고 관심사는 높은 집값·저임금·저출산·취업난 등이다. 다만 신베이에서 만난 대만 기자들은 “대만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고향(거주 등록지)에서 투표해야 하기 때문에 청년들이 얼마나 불편을 감수하고 투표에 임할지 미지수”라고 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 때문에 일각에선 이번 선거가 ‘외부’의 인식과 ‘내부’의 인식이 크게 다른 선거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외신들은 중국과 대만이 마주보고 있는 대만해협의 안정과 향후 미·중 패권 경쟁의 구도 등과 연관 지어서 보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국내외 현안이 이슈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쑤즈윈(蘇紫雲) 대만 국방안보연구원 국방전략자원연구소장은 “한국의 에너지 62%, 일본의 에너지 90%가 대만해협을 통과하는 등 이곳의 안보는 주요국들의 이익과 직결돼 있다”고 했다. 궈위런(郭育仁) 대만 국책연구원 부원장은 “이번 선거는 양안 관계의 분수령”이라며 “선거 당일부터 5월20일 대만 총통 취임까지 대만해협 정세가 빠르게 요동칠 것”이라고 했다. 김준규 코트라 타이베이무역관장은 “대만은 한국의 6위 교역 상대이고, 반도체 산업의 주요 파트너”라면서 “대만에 어떤 정권에 들어서는 지에 따라 양측의 반도체 협력 수준이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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