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자총액한도제 예외 조항으로 완화, DJ 설득해 관철
손병두의 ‘IMF위기 파고를 넘어’ ⑧ 정부·재계 기업 개혁 줄다리기
“구조조정 열심히 한 것, 칭찬할 일”
기업 개혁은 피해 갈 수 없는 대세였다. 재계에서도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경영 혁신과 자구 노력만이 살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전경련은 2월 12일 정례 회장단 회의를 열고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국제적인 규범과 제도에 맞춰 기업 경영을 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합의했다.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던 기업의 지배구조와 관련해서는 조속한 시일 내에 지주회사제도를 도입해 법적 지위를 가진 경영 조직으로 바꾸는 것이 국제 기준에 부합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이를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 또한 기업의 상호지급 보증 해소에 따른 기업과 금융기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별도로 모색하기로 했다. 이후 재계는 30대 그룹 주요 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이 참석하는 ‘구조조정 협의체’를 운영하는 한편 각 그룹별로 기업 구조조정 실무 대책반을 기동하면서 전경련 기업경영팀과 긴밀히 소통했다.
개혁을 독려하는 정부와 개혁 대상이 된 기업들 간의 조율이 모든 면에서 순조롭게 진행된 건 아니었다. 정부는 각 그룹의 기획조정실을 철폐하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전략을 짜고 수행할 참모 본부가 있어야 하는데 기조실을 없애라는 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이디어를 내길 기조실을 기업구조조정본부로 명칭을 바꾸고 구조조정 업무를 하기 위해 존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부에 납득시키기로 했다. 이때부터 기조실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구조본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부는 구조조정 5대 원칙을 놓고 조목조목 진척 상황을 점검했다. 특히 핵심역량 강화와 재무구조 개선 항목에서 별 진척이 없다고 지적했다. 재계 측에서는 그 부분은 시간이 걸려야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에 겉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내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는 2년의 시한을 정해 놓고 부채비율을 200%로 낮출 것을 요구했다. 재계는 200% 목표의 비현실성과 결합재무제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출금융 확대 등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기업 개혁이란 대원칙 아래 재계가 정부와 협조하면서도 때로는 실랑이를 벌인 일이 적지 않았다. 그 중 특별히 기억 나는 일이 있다. 1998년 2월 DJ 정부가 출범한 뒤 규제개혁 차원에서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 출자총액한도제 규정을 철폐했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난 뒤 전윤철 공정위원장은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출자총액한도제 규정을 철폐하고 난 뒤 재벌의 계열사 수가 더 늘어났다며 이는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막으려는 정부 정책과 정면으로 어긋난다고 했다. 보고 받은 DJ는 출자총액한도제를 다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1999년 8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 간담회에서 DJ에게 출자총액한도제 규제는 현실을 잘 모르는 데서 나온 조처이므로 다시 철폐해 줄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계열사 수가 늘어난 것은 외자유치를 하면서 외국회사와 합작회사를 만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구조조정을 하기 위해 비주력 업종이나 생산라인을 분사시키는 과정에서 새 법인에 출자하다보니 회사 수가 어쩔 수 없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부가 추구하는 외자유치나 구조조정 업무를 열심히 추진한 결과이기 때문에 오히려 규제를 풀어주고 잘 했다고 칭찬해야 합니다.”
장인 별세 소식에 호주서 급거 귀국
그 뒤 DJ는 1999년 9월 12, 13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마치고 귀국길에 호주를 국빈 방문했다. 다른 전경련 회장들은 APEC 총회 후 바로 귀국했다. 나와 박세용 현대 사장은 대통령의 호주 방문에도 수행하게 되었다. 박 사장은 한·호 민간경제협력위원회 한국 측 위원장이었다. 나는 DJ의 캔버라 방문에 맞추어 호주의 6·25 참전 기념비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남았다. 기념비 제작 경비를 전경련에서 부담했고 모든 자재는 한국서 가져가 건립하도록 했다.
DJ와 존 하워드 호주 총리의 정상회담 전날인 9월 16일 캔버라에서 양국 경제장관회의가 있었다. DJ는 박세용 위원장과 나를 배석하라고 했다. 회의가 끝나고 회의장을 나오는데 DJ가 나를 부르더니 “공정거래위원장과 합의를 잘 했다고 신문에 났던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그 기사를 보고 서울의 유한수 전경련 전무와 통화해서 경위를 파악하고 있었다. 유 전무는 “공정위 이남기 부위원장이 은행회관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예외조항을 설명해 줘서 그냥 듣고 왔다. 합의한 적은 없다”고 했다. 나는 DJ에게 “제가 지금 대통령님을 수행하고 있는데 합의할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부위원장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라고 합니다”고 보고했다. DJ는 “서울 가서 잘 논의해서 합의하도록 하세요”라고 재차 말했다.
그날 밤 전윤철 공정위원장한테서 국제전화가 왔다. “지금 미국에 있는데 내일 귀국하니 월요일 아침에 만나서 합의를 보자”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5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과 같이 공정위로 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이튿날 아침 식사시간에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어제 밤에 전 위원장 전화를 받았다”고 했더니 “내가 전 위원장한테 대통령 말씀을 전했다”고 했다. 나는 장인어른 별세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해 공항에서 곧바로 삼성서울병원 영안실로 갔다. 밤 12시쯤 전 위원장이 빈소로 조문을 왔다. 미국에서 귀국해 바로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 공정위로 여러 사람이 오지 말고 손 부회장 혼자서 의견을 수렴해가지고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밤중에 비상을 걸어 5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에게 예외 조항에 들어갈 항목을 급히 보내 달라고 했다. 전경련 이병욱 부장이 이를 밤새 정리했다. 나는 아침 일찍 장인 발인에만 참석하고 이병욱 부장과 함께 공정위로 향했다. 전 위원장과 이남기 부위원장, 국장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서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나는 가능한 한 예외조항을 많이 넣으려 했고 공정위는 그 반대였다. 옥신각신 끝에 어느 정도 합의를 본 내용을 5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한테 설명했다. 모두들 그런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타자를 쳐서 정리한 다음 서로 사인을 했다. 전 위원장은 이를 갖고 청와대로 들어가고 나는 바로 장지로 향했다. 장지로 가는 도중에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렇게 담판은 끝났지만 규제를 풀어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기업의 입장과 규제 감독 권한을 강화하려는 공정위의 근본적인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규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기업 간 풀어야 할 숙제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계속〉
손병두. 동서투자자문 사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 경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강대 총장, KBS 이사장, 호암재단 이사장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상근부회장으로서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절충하며‘빅딜’과 구조조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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