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청과 싸우기도 전에 경복궁 담부터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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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특강] 청일전쟁, 은폐된 진실 ①
130년 전 갑오년은 조선 정부 최대 수난의 해였다. 연초에 전라도 동학 농민군이 전봉준의 지휘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성토하던 끝에 5월 전주 감영을 점거한다. 동학 농민군은 일본뿐 아니라 청나라에 대해서도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청나라 상인들이 위안스카이 위세를 믿고 국내 장시를 휘젓고 다녀 보부상까지 동학군 쪽에 가담하였다. 임오군란 때부터 국왕을 괴롭히던 위안스카이는 병조판서 민영준에게 청나라에 농민군 진압을 위한 군대 파견을 요청하도록 했다. 농민군의 반청(反淸) 기세를 꺾어 기울어가는 영향력을 만회해 볼 속셈이었다.
일본군, 청나라 군대보다 먼저 인천 도착
1894년 6월 7일 도쿄의 청국 공사(현 대사)가 일본 외무성에 출병을 통고하자 히로시마 대본영은 8000여 명의 오시마(大島) 여단에 조선 출동을 명령하였다. 앞서 1885년 4월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북양대신 이홍장은 톈진에서 만나 앞으로 갑신정변처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사건이 생기면 서로 알리고 동시 출병하기로 약속했다(톈진조약). 이 약조에 따라 청나라 정부가 도쿄 주재 공사를 통해 출병을 알리자 그간의 상황을 미리 파악해 모든 준비를 마친 히로시마 대본영은 즉각 대기 중이던 오시마 여단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몇 배나 먼 거리인데도 청군보다 먼저 인천항에 도착했다.
두 나라 군대가 도착했을 때 조선 정부는 동학 농민군과 협상에 성공하여(전주 화약) 농민군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아산만에 상륙한 청군은 진압 대상이 없어져 성환에 진을 치고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서울로 진군했다. 동학 농민군 봉기는 동북아 전체를 불안하게 하는 것으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조선 정부의 ‘내정개혁’이 필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서울로 간다고 했다. 조선 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으로 규탄하고 서양인 고문들까지 나서 길을 막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시마 여단은 용산 효창원(현 효창공원)에 당도하여 야영에 들어갔다.
서울 주재 일본 공사관의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는 조선 정부의 거듭된 항의에 위안스카이 측에 ‘내정개혁’ 공동 추진을 제안해 보기도 했다. 청 측이 동의할 리 없었다. 그래도 일본 측은 개혁을 요구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히로시마 대본영의 현역 최고위 참모차장 겸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는 오시마 여단 출동 후 따로 병참대를 조선에 보내 부산-충주 육로 요지에 병참 부대를 배치하였다. 병참대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설된 조선의 전신선을 장악하고 필요한 곳에 군용 전신선을 추가 시설했다. 청나라와의 일전을 위한 통신시설 장악 작전이었다.
1895년 4월 일본이 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조선 정부는 ‘내정개혁’ 강요에 시달렸다. 이해 1월 일본 정부는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자 조선 정부에 미국 워싱턴 주재 공사관의 업무를 일본 공사관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청나라 퇴치 후 조선을 저들의 보호국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미국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고 일본 정부에 강한 항의 메시지를 보내자 일본 정부는 이를 철회하였다. 뒷날을 기약한 후퇴였다.
정부뿐 아니라 백성이 겪은 고초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일본군의 전신 시설 관리 구축에 스스로 나서 항전하던 수많은 동학 농민군이 대규모로 학살당하였다. 전후에 일본군의 완전 철수 문제를 놓고 벌어진 마찰로 왕실은 왕비가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이 엄청난 사건들은 일본 군부의 은폐 공작으로 한 세기 이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진실 은폐 속에 생긴 역사 왜곡은 한둘이 아니었다. 조선 관군이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1990년대부터 양심적인 일본 역사학자와 재일교포 여류 사학자 등이 일본 군부가 숨긴 자료를 찾아내 은폐의 장막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라여대 나카쓰카 교수, 진실 발굴 선봉
나카쓰카 교수의 제자 김문자는 2009년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일문)을 출간하였다. 1895년 4월 종전 후 일본 측은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포기하면서 권토중래를 위해 한반도 전신 시설 관리를 위한 일본군의 잔류를 희망했다. 그러나 조선 국왕(고종)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비상사태를 일으켜 일본군이 대거 서울로 들어가 친일 정권을 세워 해결하기로 계획하였다. 그 비상사태란 것이 바로 ‘왕비 살해’였다. 이 희대의 만행도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가 지시한 것이었다. 방위청(국방부에 해당) 방위연구소 도서실에서 10년간 쏟은 각고의 노력으로 이룬 또 하나의 진실 발굴이었다.
홋카이도 대학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 또한 1997년부터 갑오 동학 농민전쟁과 일본군의 탄압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일본 근대사 전공이었으나 재직 대학 자료실에 보관된 “동학 농민군 지도자로 추정되는 두개골”에 꽂힌 의문을 풀고자 방위연구소 도서실로 갔다. 그의 업적 가운데 2010년에 발표한 ‘동학 농민군 포위섬멸 작전과 일본 정부·대본영’ (『思想』 1029, 일문)은 가와카미 참모차장의 지휘로 부산-충주 연로에 병참 부대가 배치된 사실을 다루었다. 충청도 동학 농민군 2만은 일본군 병참대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 10월 16일 일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히로시마 대본영의 가와카미 참모차장은 대대 병력을 증파하면서 ‘모조리 살육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하순 공주 우금치 전투 20여 일 전이었다. 일본군 토벌대는 동학 농민군을 소백산맥 이남으로 몰아 전라남도 장흥, 해남, 진도 일원에서 섬멸하였다. 이노우에 교수는 농민군 5만 명이 사망한 이 사건을 일본군 ‘제노사이드’로 규정하였다. 2002년 한국 유학생 강효숙이 같은 주제로 전국적 상황을 정리했지만, 이노우에 교수는 충청도 농민군 항쟁이 그 상황 전개의 핵심인 것을 파악해 냈다.
청일전쟁 중에 은폐된 ‘진실의 역사’는 당대 역사의 성격을 바꾸어 놓을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의 침략주의에 맞서 싸운 역사가 빠트려진 상태에서 이루어진 이 시대사에 관한 지금까지의 해석이나 규정은 재점검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 국내외 관련 연구 성과를 3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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