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흰 결정체의 맵고 쓴 세계사

이후남 2024. 1. 1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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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설탕
윌버 보스마 지음
조행복 옮김
책과함께

“동인도 제도 설탕은 노예가 만들지 않는다(East India Sugar Not Made by Slaves).”

1820년대 영국의 각 가정에서는 이런 문구를 식탁에 붙여놓거나, 이렇게 적힌 그릇에 설탕을 담아 손님에게 내놓았다고 한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한창 높아지고 있을 당시 등장한 이 문구는 요즘으로 치면 ‘개념 소비’나 ‘윤리적 소비’를 떠올리게 한다.

네덜란드 연구자가 쓴 『설탕』은 이를 비롯한 설탕의 세계사를 500쪽 넘는 분량에 상세히 담았다. 소금보다 한결 복잡한 설탕 제조법이 인도에서 중국과 페르시아, 다시 동남아시아와 중동·유럽 등으로 전파된 과정부터 과잉 섭취를 걱정하게 된 현대의 상황까지 고루 전한다.

1915년 무렵 자와의 행상이 거리에서 사탕수수를 판매하는 모습. [사진 책과함께]
그중 가장 비중이 큰 대목은 유럽의 식민지배와 노예제도. 지중해 지역에서 시작된 유럽의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생산이 서인도 제도와 남미 등에서 대규모 농업이자 산업이 된 과정은 노예무역의 급증과 고스란히 맞물린다. 이 쓰라린 역사의 한편에선 혁신의 역사도 전개된다. 열대에서 자라는 사탕수수와 달리 대부분 지역에서 재배 가능한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방법의 개발,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사탕수수 품종의 개발은 대표적인 기술적 혁신이다.

결과적으로 설탕 생산량은 급증하지만 중농주의와 중상주의,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같은 자본주의 역사의 또 다른 면면이 역동적으로 얽혀 든다. 이미 19세기 말 설탕 가격 대폭락을 경험한 각국은 국제적 규제 등의 협의에 나서기 시작한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나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 등이 등장하기 한참 전의 일이다. 저자는 “19세기 중반에 설탕은 20세기의 석유와 비슷했다”고 썼다. 그만큼 중요한 수출품이었고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얘기다.

20세기 중반 액상과당이 발명되고 미국 등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설탕 가격은 또다시 폭락한다. 저자는 정책과 산업의 흐름, 이에 따른 각 생산 지역의 부침과 각국의 정치사도 언급한다. 이를테면 액상과당은 주로 미국에 설탕을 수출하던 필리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저자는 이것이 마르코스 체제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고 전한다.

이 책에는 과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진출했던 현재의 인도네시아 자와 섬(영어식 표기는 자바 섬)이나 인도를 비롯해 설탕 생산과 관련된 세계 곳곳이 등장한다. 아시아에서는 서인도 제도 등의 대규모 플랜테이션과 다른 방식들도 눈에 띈다. 벼농사와 번갈아 사탕수수를 재배해 지력을 보강했고, 소농이 재배한 사탕수수를 사들여 가공하는 방식이 지속됐다.

저자는 노예들의 참혹한 생활과 반란, 이 못지않게 참혹했던 계약 노동자들의 처지는 물론이고 주요 설탕 기업과 기업가도 조명한다. 그중 영국의 대표적 설탕 기업 ‘테이트 앤드 라일’의 헨리 테이트는 테이트 갤러리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이 기업은 나중에는 설탕 대신 이채롭게도 그 경쟁 상품인 인공감미료 산업에 뛰어든다. 책에 따르면, 일찌감치 19세기 후반 발명된 사카린을 비롯해 인공감미료들의 사용이 제한되거나 안전성 공인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설탕 업계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설탕 산업은 자본주의의 양면성을 보여준다”고 썼다. “한편으로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동시에 사업에 해가 되지 않는 한 사회적·생태적 귀결에 냉담하다”면서다. 에탄올 생산 목적의 사탕수수 재배에도 여전히 숲의 파괴가 벌어진다. 저자는 기업만 아니라 국가의 역할, 유권자에 의존하는 정부 권력도 주목한다. 그는 “설탕 자본주의가 산업과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저항이나 소비자 선택에 직면하면 진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었다”고 썼다. 원제 The World of Sugar.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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