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詩의 뜨락]

2024. 1. 12.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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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승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바로 보지 못하는 건 아니야 내 눈길이 네 눈과 마주치지 않는다고 딴 곳을 보는 것이라 단정 짓지 마 어떤 눈의 초점은 한가운데가 비어 있기도 해 집중하면 비고 마는 중심,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는 텅 빈 눈망울, 도넛을 먹을 때 가운데를 먹는 사람은 어떠니 그러니 똑바로 쳐다보라고 하지 마 도넛처럼 타이어처럼 엽전처럼 가운데가 텅 빈, 테두리가 전부인 사람의 중심은 얼마나 투명한지 알기나 한 거니 정말,

지금 너를 똑바로 보고 있는 나의 눈길은 아무것도 볼 수 없어 나는 너를 보기 위해 어깨 너머로 눈길을 옮겨 넌 내 눈을 보고 있지만 나는 너의 얼굴 너머를 보고 있어 거기에는 너도 어쩌지 못하는 들판과 하늘, 내 뒤에도 푸름과 텅 빔, 그곳을 너도 봐 줘 나의 빈 곳이 곧 나이기도 해 그러니 부디,

똑바로 앉아라 똑바로 봐라 똑바로 살아라, 하지 마 똑바로가 똑바로 아닌 것은 똑바로 너머의 푸른 들판과 텅 빈 하늘이 똑바로 알려주잖아 이제 서로 똑바로 쳐다보지 말고 바로 보도록 해 해를 보지 않아도 빛을 볼 수 있잖아 너의 몸이 반사하는 빛을 쫓으면 나는 빛의 중심에 갈 수 있어 똑바로 보지 않아도 들판과 하늘이 만나는 곳을 볼 수 있다면 눈과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빛은 빛 어둠은 어둠이니 제발,

-시집 ‘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타이피스트) 수록

●최규승 시인 약력
 
△1963년 진주 출생. 2000년 ‘서정시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시집 ‘무중력 스웨터’, ‘처음처럼’, ‘끝’, ‘속’ 등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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