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아픈 지구와 어른의 변명

서필웅 2024. 1. 12.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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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지구가 아파서 생긴 일이야." 여름 내내 이어지던 폭염과 폭우, 시시각각 창궐하는 미세먼지, 올겨울 부쩍 많아진 눈 등 이상 기상현상이 있을 때마다 7살 딸아이가 마치 자신이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의기양양해하며 하는 말이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왜 어른들은 지구를 열심히 보살펴주지 못하는지, 어른들은 왜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하는지 설명을 해줘야 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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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지구가 아파서 생긴 일이야.” 여름 내내 이어지던 폭염과 폭우, 시시각각 창궐하는 미세먼지, 올겨울 부쩍 많아진 눈 등 이상 기상현상이 있을 때마다 7살 딸아이가 마치 자신이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의기양양해하며 하는 말이다. 아마도 유치원에서 이렇게 배운 듯하다. 이상 기상현상이 건강을 위협할 만한 수준이 되는 날도 많아 종종 아이가 바깥에 나가 놀지 못한다고 제지해야 할 때가 많다. 유치원 선생님은 이럴 때 ‘지구가 아프다’는 아주 직관적인 설명까지 덧붙여 주셨을 것이다. 사실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최근 지구는 아파서 신음하는 환자처럼 보인다.

아이와 이야기해 보면 아픈 지구를 살리는 방법은 너무도 간단하다. 아픈 친구를 보살피듯 더 아프게 하지 않고 잘 보살펴주면 된단다. 그렇기에 아픈 지구를 위한 행동에도 나름 적극적이다. 플라스틱을 재활용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난방을 지나치게 많이 해 매연을 많이 내뿜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아이는 이렇게 치료하고 푹 쉬게 하면 지구는 곧 나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역시나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아이의 눈으로 보면 세상일이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명료해 보일 때가 많다.
서필웅 국제부 기자
그러나 국제부에서 매일 외신을 돌아보면 이런 명료한 일을 전 세계가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된다. 경제와 안보 등 수많은 상황이 엇갈려서다. 이를 인터넷 등에서는 흔히 ‘어른의 사정’이라고 한다. 각자의 이익이 복잡하게 충돌하며 꼭 필요한 일조차 합의하지 못하는데, 심지어 이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한 대의명분조차 없을 때 동원되곤 하는 표현이다. “어른의 사정이란 게 있지”라면서.

전 세계 국가와 기업들이 지난달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모여 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는 이런 어른들의 사정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회의 내내 심상치 않은 눈치작전이 이어지더니, 결국 최종 합의문에서 막바지까지 관심을 모은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이라는 표현이 빠지고 화석연료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전환’이라는 표현이 포함됐다. 합의문을 함께 만든 국가 중 누군가는 언젠가 지구를 더 아프게 할 행동을 할 테고 이때 이 문구가 변명을 위한 좋은 구실이 될 거다.

지난해 11월에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유엔 국제플라스틱협약 성안을 위한 제3차 정부간협상위원회’가 성과 없이 끝나기도 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대의 속 활발하게 추진되던 국제플라스틱협약 제정도 마침내 공전이 시작된 것. ‘어른의 사정’이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구는 당분간 더 계속 아플 가능성이 크다. 아이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아픈 지구를 열심히 보살펴주었는데 계속 아프니까 말이다. 참 난감하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왜 어른들은 지구를 열심히 보살펴주지 못하는지, 어른들은 왜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하는지 설명을 해줘야 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이 오기 전 아픈 지구가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서필웅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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