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이순신 장군과 노량해전

2024. 1. 12.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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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목숨 바쳐 임진왜란 승전 이끌어

2023년 12월 20일에 개봉한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새해 들어서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1760만 관객을 동원한 2014년의 명량, 726만의 2022년 한산에 이어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 해전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부터 진행된 전투로,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순신이 이 해전에서 전사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1년여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3~4년 동안은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침공을 명해 일어난 전쟁이 1597년 1월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이었다.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597년 7월 22일 삼도수군통세사에 복귀했다. 이해 9월 16일에는 명량해협에서 13척의 판옥선으로 일본 군선 130여척을 물리치는 승전을 이끌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명량해전의 패전 이후 일본군은 울산, 사천, 순천 등지에서 왜성(倭城)을 쌓고 버티었고, 대치와 전쟁 상황은 이어졌다. 1598년 8월 일본군 진영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일본에서는 전군의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울산성,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에 집결된 일본군 병력은 본국으로의 탈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에 조명연합군은 동로, 중로, 서로, 수로의 네 개의 길로 일본군을 공격하는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을 준비했다.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1543~1607)과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 공격에 나섰다. 다급해진 고니시는 진린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퇴로를 열어줄 것을 청했고, 진린도 처음에는 이에 응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강력하게 이를 반대했고, 마지막까지 퇴각하는 일본군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순순히 이들을 보내면 훗날에 반드시 조선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진린도 결국 이순신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결전의 날 현재의 하동과 남해 사이를 흐르는 바다 노량으로 향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판옥선 200여 척과 1만여 명의 병력, 명나라 수군은 300여 척의 함선과 1만여 명의 병력이었다. 일본 측에서는 사천성에서 승리를 거둔 시마즈 요시히로가 500여 척의 함선과 2만여 명의 병력으로 고니시의 지원을 위해 출정했다. 고니시의 전함 300여 척과 1만5000여 명의 병력이 합해지면서 일본군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가장 많은 함선과 병력이 충돌한 해전으로 기억되는 까닭이다.

이순신은 진린이 포위당해 위험에 처했을 때 일본의 대장선을 공격해 포위를 풀게 하는 등 최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격전 중에 일본군의 총탄에 가슴을 맞았지만,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며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전쟁이 바야흐로 급하니 삼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장군의 유언은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징비록’을 비롯해 1795년(정조 20년)에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유명을 받은 장남 이회(李?)와 조카 이완(李莞) 등은 끝까지 전투에 나섰고, 패주하는 일본 함선 200여 척을 격침시키고, 수천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무엇보다 일본이 다시는 바다를 통해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지를 확실하게 좌절시킨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징비록’에는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 군영의 통곡소리는 마치 자신들이 어버이를 잃은 듯했다. 영구(靈柩)가 지나가는 곳곳에 백성들이 제사를 베풀고 따라다니며 ‘공께서 우리를 살리셨는데, 공께서 우리를 버리시고 어떻게 가십니까?’라고 울부짖었다”고 기록했다. 명나라와 조선의 군사, 백성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던 이순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2017년 경남 남해군에서는 관음포 일대에 ‘이순신순국공원’을 조성해 차가운 겨울바다에서 순국한 장군의 마지막 모습을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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