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공연장에서 만나는 알프스
아름다운 기행, 음표로 담아내
태어나 눈 감기까지 인생 비유
예술가의 상상력에 깊은 감동
“마하연, 묘길상, 안문재를 넘어 내려가, 썩은 외나무다리를 건너 불정대에 올라가니, 천 길 절벽을 하늘 가운데 세워 두고, 은하수 큰 굽이를 마디마디 베어내어, 실처럼 풀어내서 베처럼 걸었으니, 도경에서는 열두 굽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더 여럿이라. 이태백이 이제 있어 다시 의논하게 되면, 여산 폭포가 여기보다 낫다는 말은 못 할 것이다.”
사실 이들이 대단했던 건 단순히 자연을 뛰어나게 묘사해서가 아니다. 이들이 정말 대단한 건 자연을 바라보며, 나의 모습을 그곳에 투영하고, 또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까지 작품에 담아내서다. 정철은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의 모습을 성찰했고, 슈트라우스는 ‘알프스 교향곡’을 자신의 인생에 비유했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를 등산과 하산에 빗대었다.
인상적인 대목은 ‘정상에서’다. 마침내 산 정상에 오르고 느낀 감흥을 노래한 대목이다. 슈트라우스는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구스타프 말러(1860∼1911)를 떠올린다. 말러의 음악스타일을 영리하게 묘사해, 마치 두 작곡가가 ‘정상에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또 하산하는 과정에서 만난 ‘폭풍우’는 그에게 찾아온 위기를 떠올리게 하고, 이후 등장하는 ‘노을’은 그의 노년을 비유한다. 슈트라우스 최후의 교향시엔 단지 ‘알프스’라는 부제만 붙었지만, 사실은 그의 인생 전반이 투영된 작품인 것이다. 위협적인 ‘폭풍우’의 주제가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발걸음’의 주제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이 작품 속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알프스 교향곡’은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무대 위 예술일 뿐만 아니라, 알프스의 장대한 모습을 담기 위해선 무려 100명이 넘는 단원들이 무대에 동원되기 때문이다. 글로 만들어진 정철의 ‘관동별곡’은 여러 번 음미할 수 있지만, ‘알프스 교향곡’은 무대에서 1년에 한 번 만나볼까 말까 한 작품이다. 올해는 KBS교향악단이 이번 달 이 작품을 연주한다. 물론 음반으로 발매된 ‘알프스 교향곡’을 들어볼 순 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연주되는 알프스를 직접 느껴보지 않고선 그 맛을 알기 어렵다.
굳이 공연을 통해서 번거롭게 여행의 감흥을 느껴야 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방구석에서도 생생하게 영상을 접할 수 있는 시대다. 글자나 음표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8K 영상들까지 손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관동별곡’과 ‘알프스 교향곡’이 더 깊은 감동을 주는 지점은 따로 있다. 바로 은유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연환경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준다. 그곳에선 예술가의 상상력이 가미되고, 또 우리의 상상력도 발휘된다.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며 무언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무한한 공간이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다. 예술작품에 몰입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 은유의 마법이자 예술작품이 가지는 힘이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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