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피해자’서 ‘가해자’로···76년 만에 국제법정 선 이스라엘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제노사이드(집단 학살)의 비극적 역사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집단학살을 막기 위한 국제협약 제정 76년 만에 ‘가해자’로 지목돼 국제 법정에 섰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집단 학살을 벌인 혐의로 유엔 최고 법정인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피소된 데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은 “우리는 제노사이드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항변했다.
ICJ는 12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스라엘의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 위반 혐의와 관련한 심리를 이틀째 진행했다. 전날 이스라엘을 제소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제소 이유를 설명한 데 이어, 이틀째인 이날은 이스라엘의 변론을 청취하는 자리였다.
이스라엘은 이날 변론에서 가자지구에서의 군사 행동이 지난해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따른 ‘자위권 행사’라고 강조했다.
이스라엘 외무부 변호인인 탈 베커는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겨냥해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를 무기화하고 있다”면서 “어제 남아공의 주장은 지난해 10월7일 발생한 사건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국가가 하마스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남아공은 하마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하마스야말로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면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에 끔찍한 피해를 입혔고, 민간인들을 ‘인간 방패’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그는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측은 하마스가 민간시설을 무기고 등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한 증거라면서 병원과 학교 등에 숨겨진 무기 사진 등을 공개했다. 이스라엘은 지하에 하마스 지휘본부가 숨겨져 있다며 환자와 피란민이 밀집한 가자지구 최대 병원인 알시파 병원 등을 공격해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 이스라엘군이 하마스를 소탕하겠다며 가자지구에서 벌인 군사 작전으로 2만3469명이 숨지고 5만9604명이 부상(11일 기준)을 입었다. 전쟁 발발 이후 채 100일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가자지구 전체 인구의 1%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하마스의 공격으로 살해된 이스라엘인은 1139명이다.
전날 남아공 측은 “어떤 잔학한 공격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국제협약 위반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면서 하마스의 기습 공격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민간인 학살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401111914001
심리가 진행되는 이틀 동안 법정 밖 여론전도 치열했다. ICJ 재판소 주변에는 유럽 전역에서 찾아온 수백여명의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이 ‘정의’를 요구하는 손팻말을 든 채 시위를 벌였고, 이스라엘 측 시위대는 하마스에 납치된 인질 사진을 내걸고 시위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재판소 주변에서 하마스의 범죄 및 인질 관련 전시회를 열었다. 이스라엘은 ICJ 심리를 하루 앞둔 지난 10일에는 하마스의 공격 당시 살해된 이스라엘인들의 영상과 사진을 게시한 웹사이트를 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자국을 제노사이드와 연결짓는 것 자체가 “비열한 명예훼손”이라며 남아공을 “테러리스트의 동조국”이라고 맹비난해왔다. 그러면서도 재판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변론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AP통신은 “이스라엘이 보이콧이 아닌 재판 참여를 선택한 것은 이번 재판이 ‘홀로코스트 피해자’라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제노사이드 협약은 유대인 600만명이 희생된 홀로코스트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유엔은 1948년 인종청소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제노사이드 협약을 체결했고, 이스라엘 역시 이 협약에 가입했다.
이틀간 양측의 의견을 청취한 ICJ는 남아공 측이 요청한 긴급 임시 명령을 발동할지 여부를 먼저 심리하게 된다. 앞서 남아공은 이스라엘을 제소하면서 가자지구 주민들의 추가적인 희생을 막기 위해 군사작전을 중단하는 긴급 명령을 내려줄 것을 ICJ에 요청했다.
외신들은 ICJ가 빠르면 이달 말쯤 이 문제를 결론 내릴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다만 이스라엘군의 제노사이드 혐의와 관련한 본 재판은 길게는 수년에 걸쳐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2019년 잠비아가 이슬람협력기구를 대표해 로힝야족 학살 혐의로 미얀마를 제소한 사건은 현재까지 심리가 진행 중이다.
ICJ가 남아공 측 요청을 수용해 긴급 명령을 발동하더라도 이를 이스라엘이 이행할지는 미지수다. ICJ 판결은 원칙적으로 법적 구속력을 갖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강제할 방안은 없다. 당사국이 ICJ 판결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이를 제재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합의 도달이 쉽지 않다.
앞서 ICJ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한 달여 뒤인 2022년 3월 러시아에 침공 중단을 명령했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이를 계속 무시하고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역시 이스라엘을 두둔하며 재판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어, 안보리가 ICJ 판결에 따른 이스라엘 제재 조치를 합의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국가 간 분쟁을 다루는 ICJ가 군사작전 중단을 명령할 경우 이스라엘에 상당한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국제사회의 휴전 요구에 번번이 제동을 걸며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지원해온 미국 역시 전쟁 지원 명분과 관련해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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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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