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달콤했으나 그 끝은 핏빛 자객 설탕의 800년史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1. 1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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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맛 즐겼던 13세기 인도
사탕수수 즙 끓여 고체로
중국인은 백색 결정 얻어내
유럽자본가, 설탕 노동 위해
아프리카노예 年60만명 동원
도망·반란자는 발목 잘라
"한국인 연 23㎏ 설탕 소비
침묵의 살인자 될 것" 경고
역사 속 설탕은 죽음의 가루였다. 신간 '설탕'은 13세기 인도의 황설탕부터 현대인의 비만까지 설탕의 모든 것을 파헤친다. 게티이미지뱅크

설탕 원재료인 자당(蔗糖)을 들여다보면 흰색 정육면체 입자가 관찰된다. 슈퍼마켓에 가면 1㎏당 1000원꼴에 불과해 쌀보다 저렴한 이 식재료는 천국의 단맛을 인간의 혀에 선물한다. 그런데 저 순결하고 무고해 보이는 설탕의 진짜 빛깔을 역사라는 렌즈로 관찰하면 영롱한 흰빛이 아니라 검붉은 핏빛에 가깝다. 누군가는 고작 설탕 때문에 목숨을 건 탈주를 꿈꿨고, 실패하면 발목이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설탕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이 결코 아니었음을 실증한 걸작이 출간됐다. 신간 '설탕'은 황홀한 단맛의 설탕 입자 하나에서 핏빛 우주를 발견해낸다. 화학기호 'C12H22O11'인 설탕이 '발명'되면서 인간은 지옥을 경험했음을 차분하게 돌아보는 책이다.

설탕이 자본과 만난 건 13세기 인도였다. 인간이 수고하지 않아도 남아시아의 온화한 자연은 사탕수수를 거리와 숲속에 잔뜩 길러냈다. 큰 칼로 줄기를 잘라 입에 넣고 씹기만 하면 단 즙이 줄줄 흘렀다. 단맛은 쾌락의 동의어였다. 하지만 사탕수수 즙을 짜내 단맛을 향유하는 방식은 시간적 한계를 지녔다. 사탕수수는 수확 즉시 발효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신선도는 하루를 못 견뎠다. 인도인은 단맛을 저장하는 방식에 골몰했고, 농부들은 이치를 깨달았다. 즙을 끓이면 고체가 된다는 것을. 수분이 날아가고 남은 자리에 황갈색 덩어리가 남았는데 몇 개월을 두고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았다. 황설탕 결정 '구르(gur)'의 발견이었다. 농부들은 밭일을 시작하기 전 구르 한 덩어리를 꼭꼭 씹어 먹으며 '아침밥' 대용으로 썼다. 고지대 순례객의 입에 넣어준 황갈색 한 조각은 효험을 발휘했다.

설탕 윌버 보스마 지음, 조행복 옮김 책과함께 펴냄, 3만5000원

'사탕수수 즙 응고법'이 인도에서 중국 푸젠성 지역으로 전파된 뒤 설탕은 일대 변혁을 맞이한다. 황갈색 구르는 사탕수수 즙을 짜낸 '이후에' 그 액체를 끓이는 방식으로 생산됐다. 중국의 이름 모를 천재들은 즙을 내지는 않은 상태, 즉 사탕수수를 짓이기기만 한 상태에서 끓여봤다. 그랬더니 설탕 결정이 황갈색이 아니라 백색이었다. 이 작은 변화는 '설탕의 미래'를 결정해버렸다.

인도와 중국이 설탕 산업의 기초를 닦는 와중에도, 유럽에선 여전히 설탕이 진귀한 식재료였다. 잉글랜드의 한 왕은 '설탕 3파운드'를 구해주겠다는 시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책은 전한다. "그렇게 많이 구할 수 있다면 꼭 구해주시오." 3파운드 무게를 ㎏으로 환산하면 1.36㎏ 정도이니, 지금 한화로는 '2000원쯤' 된다. 하지만 당시엔 금덩이를 손에 쥐여줘야 구할 수 있는 사치품이 설탕이었다.

단맛을 향한 인간의 본능은 서서히 유럽 대륙을 휘감았다. 그 결과 콜럼버스는 '설탕 5000t'을 배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 상황이 이쯤 되자 대다수 유럽인은 설탕절임이나 사탕과자에 깃든 단맛에 전염되기 시작했다. 설탕 소비는 지옥문이 열린 것처럼 폭발했다. 그러나 그사이 단맛과 자본을 향한 내면의 욕구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할 것을 소리 없이 종용했다.

유럽 자본가에게 브라질의 긴 해안가는 천금의 땅이었다. 사탕수수 재배에 최적화된 기후였고 유럽까지 '논스톱 선박 배송'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사탕수수 줄기를 베고, 압착기계에 넣어 돌리고, 설탕을 항구로 운반할 노동력 말이다. 그 결과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선박에서 노예 60만명이 하선했다. 설탕 노동에 필요했던 노예의 총 숫자가 아니라 '연평균' 노예 수였다.

노예들은 한때 백인의 총칼에 맞섰던 '전쟁 포로'였으므로, 그들은 전술에 능했다. 노예들은 비밀 조직을 꾸려 대규모 반란을 기획했다. 그들은 한때 유럽의 '식민지 군대'까지 궤멸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저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고, 반란자나 도망자에겐 무거운 형벌이 기다렸다. 바로 '발목'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전체 노예 중 4~6%가 매년 사망한 이유가 고된 노동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순결해 보이는 설탕 위에 무자비한 적색의 피가 흩뿌려졌다. 압착기에 사탕수수를 밀어 넣다 피로에 절어 깜빡 졸아 롤러에 손이 끼는 사고는 흔했다. 보통 이런 경우 근처에 있던 감독이 도끼로 팔을 잘랐다고 책은 쓴다. 롤러 안으로 노예가 완전히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시간이 흘러 이제 설탕은 현대인을 소리 없이 살해하는 침묵의 자객이다. 1990년대 말 기준 중국은 연 7㎏, 인도는 연 15kg의 설탕을 '단 한 사람'이 먹는다.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한국인 1인당 설탕 소비량은 2017년 기준 23kg이다. 짜장면 한 그릇에 각설탕 20개에 달하는 당이 들어간다고 하지 않던가. 저자는 설탕을 둘러싼 자본과 정치의 협잡의 역사를 600쪽 책에서 글로 쓴 다큐멘터리처럼 파헤친다.

설탕 산업은 이제 '고르디아스의 매듭'이다. 도저히 풀리지가 않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단칼로 잘라버렸다는, 도저히 풀 방법이 없던 바로 그 매듭 말이다. 강력한 정책으로 설탕 중독의 역사를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설탕은 영원한 살인자가 되리라고 책은 예언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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