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책에 대한 책] 책은 정신적 티켓이며, 인생 경유지에서 만나는 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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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1986년 사망했을 때, 분개한 팬들은 한림원에 야유를 보냈다.
그런데 앞을 못 보는 보르헤스는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칩거와 은둔으로서의 독서(상아탑의 독자)는 낡아빠졌고,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과식으로서의 독서(책벌레인 독자)는 과욕이다.
책은 그러므로 한 권의 정신적 티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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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1986년 사망했을 때, 분개한 팬들은 한림원에 야유를 보냈다. '보르헤스에게 노벨상을 주지 않은 건 그의 수치가 아닌 노벨상의 수치다.'
그런 보르헤스가 인생 말년에 완전히 실명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유전적 결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앞을 못 보는 보르헤스는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보르헤스는 1964년 한 서점을 찾았다가 직원으로 일하던 학생을 만나게 된다. 노작가는 16세였던 학생에게 부탁했다. "큰 소리로 책을 읽어 달라"고.
나이 차를 초월한 노인과 소년의 만남은 4년간 이어졌고 소년은 수십 년 뒤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된다. 노스승이 오래전에 앉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소년의 이름은 알베르토 망구엘. 그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최고의 다독가(多讀家)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망구엘의 책 '은유가 된 독자'는 책 읽는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눠 사유하는 책이다. 고대 문헌부터 전자책까지 20세기와 21세기의 독서를 성찰한다. 책에 따르면 독자(讀者)는 세 번 진화했다. 첫 번째 유형은 '여행자로서의 독자'였다. 책은 하나의 길이며, 독서는 근원으로의 여행이다. 종이와 잉크로 구성된 세계를 염탐하고 관조하면서 타자와 세계를 바라보는 여행자. 그런 독서는 삶의 길을 도모케 한다.
인류의 두 번째 독서 유형은 '상아탑에 갇힌 독자'였다. 상아탑의 독자는 둘러싸인 책으로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엄폐하는데, 그 결과 칩거한 지식인은 '세상의 의무를 기피하는 자'의 동의어가 됐다.
마지막 유형인 '책벌레로서의 독자'도 이상적 책 읽기와 거리가 있다고 망구엘은 간파한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도 피와 살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칩거와 은둔으로서의 독서(상아탑의 독자)는 낡아빠졌고,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과식으로서의 독서(책벌레인 독자)는 과욕이다. 둘 다 '죽은 독서'다. "세상은 신이 인간에게 읽힐 요량으로 편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독자의 숨결이다"라고 망구엘은 쓴다. 책을 읽는다는 건 나 아닌 타자, 내가 속한 세상이 아닌 이계로의 여행이다. 책은 그러므로 한 권의 정신적 티켓인 것이다.
책도 밥이다. 인간은 식탁 위의 밥만 먹고 살지 못한다. 독서는 지혜를 얻고 영혼을 살찌우는 정신의 섭식행위다. 가려 읽는 것도, 닥치는 대로 읽는 것도 정신의 독서에는 방해가 된다. 단 한 줄을 읽어도 자신의 내부에서 꼭꼭 씹어 소화시키는 독서가 중요하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첫 장을 열어젖힌 책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장악하고야 말겠다는 강박관념도, 한 해에 수십 권 책을 읽겠다는 고집도 헛수고다. 단 한 줄의 언어도 꼭꼭 씹어 삼키기. 그게 독서의 이상이다.
더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모든 걸 보는 중인 노작가가 소년 망구엘에게 이식했던 건 한 줄의 문장을 대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망구엘은 그 마음을 평생에 걸쳐 음미했던 책의 미식가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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