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집요한 연구와 실험...가습기살균제 유죄판결 이끈 ‘키다리 아저씨’
1심서 기각된 과학자들 연구·실험 결과
2심에선 유죄 인정 증거로…”이번엔 과학 오역 없었다”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가습기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 시험이 행해진 사건이다.”
서울고법 형사5부(서승렬 부장판사)는 지난 11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74)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65)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형을 선고했다. 3년전 1심에서 내려진 무죄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이들은 유해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하고 판매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선고문에서 이 사건을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독성시험이었다”며 피고인들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2019년 7월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이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살균제를 사용한 사람 중 공식적으로 98명에게 폐 질환이나 천식이 나타났고 이 중 12명이 숨졌다. 앞서 옥시의 신현우 전 대표는 2018년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성분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이미 징역 6년형이 확정됐다.
PHMG·PGH에 비해 CMIT·MIT 성분은 피해에 대한 인과관계가 확정되지 않아 2016년 첫 수사 때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후 연구와 실험 결과가 쌓이면서 2019년에 관계자들이 기소됐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CMIT·MIT 성분이 폐 질환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검찰의 항소로 이어진 2심에서는 정반대 결과가 나온 것이다.
◇30년 전 위험 경고한 과학, 13년에 걸친 실험으로 입증
CMIT·MIT 성분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드는 건 위험하다는 경고는 30년 전 처음 제기됐다. 1994년 두 성분으로 만든 가습기살균제가 국내에 최초로 출시됐다.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인 유공이 생산한 ‘유공 가습기메이트’가 시초다. 당시 유공 생물공학연구실은 “살균력을 충족하는 최저 농도가 안전배수를 고려하지 않은 CMIT·MIT 성분의 동물시험 무영향 농도값과 일치하므로, 독성 시험을 수행해 안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데이터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유공은 제품 출시 한 달 전 서울대 수의과대학에 ‘마우스를 이용한 가습기메이트 간이 흡입노출시험’을 의뢰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제품을 출시했다. 비극의 시작이다. 서울대 수의과대 연구진은 1년이 지난 1995년 7월 백혈구 수치 감소 등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시험 결과를 유공에 보냈다. 그러나 유공은 판매 중지나 회수 조치를 하지 않았다. 유공의 뒤를 이어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도 가습기살균제를 잇따라 내놨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에도 서울대 실험보고서가 전달되기도 했지만, 역시나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2011년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불거지자 CMIT·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가 폐질환과 천식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실험이 다시 시작됐다. PHMG·PGH 성분의 위해성에 대한 연구는 충분했지만, CMIT·MIT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했다.
CMIT·MIT는 CMIT와 MIT를 3대 1의 비율로 섞어서 만든다. 전자에 끌리는 친전자체 물질인데, 미생물의 호흡이나 생명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에너지를 제공하는 아데노신 삼인산(ATP) 합성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산화 스트레스를 일으켜 살균작용을 한다. 세포독성이 매우 높은 물질이라 세포와 접촉하기만 해도 빠른 시간 내에 독성을 발현한다. 이 때문에 폐 축적 여부보다 폐에 도달하는 양이나 노출기간이 독성 발현에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과학자들은 2011년 이후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CMIT·MIT가 폐에 도달하고 독성을 발현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2011년 입자발생 시험에서는 폐에 도달할 수 있는 100㎚ 이하 크기 범위의 입자가 안정적으로 발생한다는 걸 확인했고,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진행된 동물실험에서 CMIT·MIT가 폐 손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냈다. 2020년 11월 수행된 폐포 내 전달가능성 연구에서는 ‘CMIT·MIT가 마그네슘염 주성분인 에어로졸에 포함돼 폐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고, 2022년 수행된 체내거동평가연구에서는 비강에 노출된 CMIT·MIT가 기도를 통해 폐로 전달되는 것과 시간에 따른 장기별 분포량 등이 확인됐다.
노출재연시험에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2011년 시험에서는 CMIT·MIT 가습기살균제 권장사용량의 10배 조건에서만 CMIT·MIT가 검출됐지만 2019년에 다시 진행된 시험에서는 검출한계를 낮춘 개선된 분석방법을 사용하자 권장사용량 1배와 5배 사용량 조건에서도 CMIT·MIT가 검출됐다. 권장사용량 만큼만 사용해도 인체에 위해를 가하는 CMIT·MIT가 검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피고인들의 변호인단은 전문가 증언이나 연구결과가 편향돼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선고문에서 “전문가들이 행한 연구결과들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론이나 기법으로 이루어졌다고 인정될뿐 아니라, 국내외에 있는 동료 전문가 집단이 승인해 해외 저명 학술지에 등재되기까지 했다”며 “진술이 편향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과학 연구는 축적의 과정…2심 판결에 가슴 벅차”
이규홍 안전성평가연구소 인체유해인자 흡입독성연구단 단장은 2심 재판 이후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과학적인 결과가 법원에서 받아져 가슴이 벅차다”고 소회를 밝혔다. 안전성평가연구소는 화학물질의 안전성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화학연구원 부설로 설립된 공공 연구소이다.
독성물질 전문가인 이 단장은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터진 2011년부터 관련 연구를 꾸준히 진행했다. 이 단장의 여러 연구와 실험 결과는 여러 재판에 증거로 제출되기도 했다. 1심에서 피고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됐을 때, 이 단장은 재판 결과를 비판하는 입장문을 내기도 했다. 재판부가 과학적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 단장은 “과학은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하나씩 축적해가면서 진리를 탐구해가는 과정”이라며 “코끼리 전체를 한 번에 알 수 있는 연구는 없다. 어떤 연구에서는 다리를, 어떤 연구에서는 코를, 어떤 연구에서는 꼬리를 알아내면서 코끼리라는 전체를 찾아가는 게 과학적 연구”라고 말했다. 그는 “1심 재판부는 다리나 꼬리에 대한 연구로는 코끼리를 알 수 없다며 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기각한 것”이라며 “과학이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 대해 1심 재판부가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기각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1심 때와는 달리 여러 연구와 실험 결과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유죄의 근거로 봤다. 2심 재판부는 “원심(1심)은 동물실험결과의 간접적·보충적 성격을 오해해 실험결과로 해석함에 있어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과학적 의미를 간과했다”고 밝혔다.
이 단장은 “이번 일이 CMIT·MIT의 유해성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며 “이 물질은 살균 물질로서 대체제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여전히 많은 곳에 쓰이는데, 이제 많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어느정도까지 안전한 지 정확한 기준치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한국환경보건학회지, DOI : https://doi.org/10.5668/JEHS.2017.43.4.247
한국화학연구원, DOI : https://doi.org/10.23000/TRKO201800023157
Environment International, DOI : https://pubmed.ncbi.nlm.nih.gov/3640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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