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석·박성수 부부 화가 유라시아 횡단 자동차 미술여행-15]
[유라시아=뉴시스] 윤종석·박성수 부부화가 =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무려 15시간의 항해를 거쳤다. 그리스보다 한 시간이 이른 시차다. 한국보다는 8시간 젊게 됐다. 그 긴 시간을 바다 위에서 보내야 했지만, 여행비를 아껴보겠다고 침대칸 대신 좌석을 예약했다. 두 배가 차이 나는 가격이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나름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인생 추억이 생긴 셈이다.
이탈리아 바리(Bari)에 도착한 것은 아침 9시. 아드리아해(海)에 마주한 이탈리아 남동부 해안의 항구도시이다.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풍부한 과수농업지대로 포도와 올리브 등 많은 농산물의 집산·가공 중심지 겸 금속·석유·기계 등의 근대공업도시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배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본격적인 이탈리아 여행의 첫 도시 알베로벨로(Alberobello)로 향했다.
이탈리아 자동차 여행에 앞서 정말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이탈리아는 도시마다 ‘ZTL’이라는 거주자 우선 지역이 있어 그 지역의 승인 없이는 외부 차량 진입이 금지되어 있다. ZTL(Zona Traffico Limitato)의 시작을 알리는 붉은 동그라미 표지판이 나타나면 우회해야 하고, 만약 실수로 들어갔다면 거의 ‘300유로’의 어마한 벌금을 피할 수 없다. 지난 튀르키예 안탈리아에서 다음 여행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이 부분을 제일 신경 써야 했고, ‘Waze’라는 내비게이션 앱으로 ZTL 구역을 피해 길 안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여튼 우리는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반도 뒤꿈치 위치의 알베로벨로에 무사히 도착했다. 안전한 주차장을 찾아 그동안 유럽 여행에서 주차비를 해결했던 ‘EASYPARK’ 앱을 통해 주차등록을 했다. 과거 힘들게 얻은 경험들이 도움이 되니 다시 시작한 여행이 한결 가볍다. 이탈리아 남부 여행에 대한 좋은 정보를 구하던 중 한 지인의 추천으로 선택한 알베로벨로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다. 알베로벨로 도시 이름의 뜻이 ‘아름다운 나무’라니 더욱 정겹다.
특히 독특한 주거 형태 트룰리(Trulli)가 유명하다. 인접 들판에서 수집한 석회암들을 거칠게 가공해 선사 시대의 건축 기술이 아직 이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마치 요정들이 살 것 같은 새하얀 석회벽에 뾰족지붕의 집들이 모여있는데, 정말 생소하고 독특한 너무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나지막한 작은 집들은 골목골목 예쁜 기념품 샵과 호텔, 레스토랑과 카페 등 거리의 사람들과 어우러져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공간에 초대된 느낌이 든다. 이탈리아에 오니 오후 4시 30분이면 해가 뉘엿뉘엿 진다. 이제 다음 도시는 마테라(Matera)다.
이탈리아 도시로 들어가는 도로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12월에 이토록 아름답고 눈부신 초록색을 볼 수 있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다, 우리는 마테라에 도착했다. 마테라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마테라의 중앙으로 들어가 노천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는 것으로 새 여정을 시작했다.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커피 향을 음미하며 도시 골목골목을 걸어 다닐 상상에 젖었다.
이 도시는 고대의 협곡 지형을 따라 굴을 파고 들어가 마을을 형성한 ‘사시 디 마테라 (Sassi di Matera)’로 유명하다. 1980년대부터 지하도시가 지닌 역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늘어나면서 특별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 곳곳에 호텔과 박물관, 레스토랑이 들어서는가 하면 다양한 예술 공동체가 자리 잡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테라의 ‘Casa Grotta’에서 옛 주거 형태를 볼 수 있었는데, 작은 공간에서 9명의 아이와 11명의 가족이 살았다고 했다. 이국적인 도시 마테라를 벗어나 또 다른 작은 도시로 향했다.
다음의 작은 도시 파르델라(fardella).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그냥 지도에서 꼭 찍어 출발했다. 그곳에는 1박에 8유로로 저렴하게 밤을 보낼 작은 캠핑장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둘째 밤을 보냈다. 다음날 부스스한 채 작은 무릎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차에서 나오는 나에게 우리 앞쪽의 캠퍼 이탈리아인 안토니오가 맛있는 에스프레소 한잔을 건넸다.
안토니오는 이곳 파르델라에 부모님이 계시고, 15살에 벨기에로 간 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에서 일하다 은퇴 후 다시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님 집이 아닌 동네 캠핑장의 캠핑카에서 사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안토니오에게 파르델라 사람들은 커피 한 잔 같이하자는 통해 10잔 이상 마시곤 한숨도 못 잤다며 연신 우리를 즐겁게 했다. 크리스마스 과자와 케잌까지 우리에게 나눠준다. 옆 캠핑카 이탈리아 부부도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게 딸기와 오렌지를 한가득 나눠준다.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니 미안한 마음에 ‘그라찌에(Grazie)~’를 연신 외쳤다.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잠깐 마을을 산책했다. 이미 온 동네에 코리아에서 온 우리 소문이 자자한 눈치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기웃기웃 우리 구경을 즐긴다. 예쁜 사람들, 예쁜 마을, 예쁜 이딸랴, 파르델라 캠핑장 건너편 깜깜한 밤, 멀리서 화려하게 불빛을 수놓던 까르몽떼(Chiaromonte)를 들러본 후 두 시간을 달려 코센차(Cosenza)의 내셔널 뮤지엄에 도착했다.
코센차의 미술관에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두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미술관에 대한 갈증을 달랠 만큼 많은 작품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프랑스의 시골 마을 작은 도시의 아름다움 못지않은 이탈리아만의 작은 도시가 지닌 묘미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어서 시칠리아 마피아의 도시 팔레르모, 카타니아 그리고 하얀 절벽의 해변 ‘Scala dei Tuchi’를 가기 위해 우리는 다시 이동했다. 날이 일찍 저무니 저녁 유료주차장 한곳을 찾아 나섰다.
다음 날 아침 한 시간을 달려, 이탈리아 빌라 산 조반니(Villa san Giovanni)의 항구에 도착했다. 페리를 타고 30분 정도 만에 시칠리아의 메시나(Messina)에 닿았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본토보다 더 따뜻한 기온을 느낄 수 있었다. 곧장 메시나의 지역미술관(Interdisciplinary Regional Museum of Messina)으로 향했다. 미술관 외관은 공사 중이었지만, 전시된 작품들은 정말 좋았다.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의 작품들이 일부 전시되어 있었는데, 작품의 강렬함과 무거움이 전해졌다. 그 외에도 많은 작품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여행 중 대부분 많은 시간을 이동하며 여러 생각에 잠기게 된다. 낯선 땅에서 덩그러니 윤 작가와 단둘이 술 한 잔과 작업 이야기를 나눈다. 여행 자체가 자극이고 보는 것이 경험이니, 새로운 것에 대한 결심이 자연스레 생긴다. 오가는 대화나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나는 작품 중에 그동안 풀지 못한 숙제나 고민의 답을 얻기도 한다. 그 순간 피로감은 날아가고 값진 행복의 기운으로 충전된다.
이제 시칠리아의 두 번째 도시 카타니아(Catania)다. 이곳은 큰 해산물 시장으로 유명하다. ZTL 구역을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도시의 중앙에 최대한 가까이 주차한 후 걸었다. 시장엔 해산물뿐만 아니라 과일, 잡화, 옷, 벼룩시장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따뜻한 기온으로 아직 과일과 채소가 풍성했고, 소문대로 해산물들이 어마했다. 작은 가판대에서 만난 에스프레소, 두 잔에 1유로 20센트. 놀라운 가격이다. 커피 맛은 더욱 놀라웠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깨닫는 것 역시 여행의 매력이다. 어김없이 시간은 가고 새날을 맞는다. 다시 두 시간쯤 달려 ‘스칼라 데이 뚜르키(Scala dei Tuchi)’에 도착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하얀 절벽’으로 유명하다. 차를 도로변에 세워두고 표지판을 따라 해안선 아래로 내려가니, 눈부신 장관이 펼쳐진다. 온통 하얀색으로 이어지는 절벽을 맨발로 걸어보면 흰 석회 가루가 발바닥에 묻어나 아주 이색적이다. 길게 늘어선 백사장과 바다, 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멋진 장관을 선사한다.
잠깐의 눈 호강을 뒤로 하고, 드디어 마피아의 도시 팔레르모(Palermo)를 향했다. 깜깜한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이 반기며 신기해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근처 작은 가게를 찾았다. 동양에서 온 이방인이 신기했나 보다. 이탈리안 아이들이 가게 안을 서성이다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예쁜 눈빛에 지친 피로함도 녹아내린다. 밤새 약간의 몸살 기운을 이겨낸 아침, 팔레르모현대미술관(Modern Art Gallery Sant'Anna)을 찾았다.
미술관은 특별하게도 ‘팔레르모의 출입구―Porta Nuova’를 지난다. 많은 볼거리가 있고, 계속 걸어가면 바다도 만날 수 있단다. 미술관에 도착해 프리다 칼로의 사진전과 19세기 회화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전시는 규모와 상관없이 특별히 새롭지 않더라도, 어떤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전해 받는 느낌이 든다. 또 다른 목적지인 팔레르모미술관(Ignazio Mormino Art and Archaeology Museum) 역시 현대미술관 못지않은 기품이 넘치는 예술품들이 맞아 주었다.
처음 계획으로는 시칠리아의 마지막 도시였지만, 우연히 카타니아에서 만난 스위스 캠퍼에게 추천받은 에트나산(Mount Etna) 볼케이노로 향했다. 시칠리아 동북 해안에 있는 화산섬 성층 활화산으로, 높이는 해발 926m로 유럽에서 화산활동이 가장 활발한 축에도 든다. 하이킹도 가능하지만, 분화구 가까이 가보려면 가이드가 필요하다. 분화구에서 멋지게 쏘아 올리는 도넛 모양의 새하얀 연기에 눈길을 빼앗긴다. 문득 거짓말쟁이의 제스처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붉은 마그마의 비밀을 저 밑에 숨겨놓은 어떤 드라마의 이야기라도 펼쳐질 것 같다.
눈 덮인 검은 에트나산을 오르며 스위스의 마테호른과 프랑스의 몽블랑, 슬로바키아의 고타트리 산맥을 함께 떠올렸다. 다시 볼케이노를 뒤로 하고 우리는 시칠리아와 이별을 준비한다. 들어오던 날과 마찬가지로 메시나(Messina)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이탈리아 본토의 빌라 산 조반니(Villa san Giovanni)에 도착했다. 시칠리아의 7일, 잊지 못할 여행의 한 조각이 다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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