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내버려둘 순 없어요…‘우리’가 돌볼게요
동그란의 마음극장은?
어떤 영화는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가 왜 저기 들어 있나 싶은,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드러낸 것 같은, 친구에게 꼭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그런 장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영화칼럼니스트 ‘동그란’이 격주로 마음 속에서 재편집되는 대사, 기억의 영사실에서 계속 반복되는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요 몇 년 사이 전 지구를 휩쓴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지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 중 하나였습니다. 사연을 듣다 보면, 그가 평소 어떻게 생활하는 사람인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요.
코로나에 걸리면 ‘격리’라는 기간을 필수로 거치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사회적·개인적 취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결국 ‘돌봄’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커다란 화두로 떠올랐지요. 세상은 각자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 같아도 인간은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잖아요. 사람이 태어나 한 인간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과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애쓰는 시간은 분리될 수 없는 샴쌍둥이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한 친구는 언제부터인가 가족에 대한 마음의 짐을 스스로 내려놓았고, 이제는 더 이상 어머니와 형제들과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도 가족들과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코로나에 걸리면 돌봐줄 사람도 없으니 너무 조심한 나머지 아직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마빈의 방’을 봤어.”
영화 ‘마빈의 방’은 약병이 가득한 마빈(험 크로닌)의 방 창가를 비추며 시작됩니다. 거동을 못하는 아버지 마빈의 방. 그 방을 매일같이 살피는 건 큰딸 배시(다이앤 키튼)입니다. 고모 루스(그웬 버든)도 한집에 살고 있지만 치매에 걸린 터라 도움이 되진 않았지요. 병든 아버지와 고모를 돌보며 살아온 배시.
그가 18년 만에 동생 리(메릴 스트립)에게 전화를 겁니다. 혈액암에 걸려 골수 이식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집을 떠난 동생과 그의 두 아들 중 누구라도 골수 이식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배시는 희망을 걸 수 있을 겁니다. 리는 언니의 연락을 받고 곧바로 행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찰리(할 스카르티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언니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그동안 소식 한 장 없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야 연락한 언니 배시 쪽이 좀 뻔뻔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같지만-게다가 피를 나눈 자매이니까-거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8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막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건 동생 리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치르는 중인 아들들을 데리고 주거도 직업도 불안정한 상태로 하루하루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리에게는 배시가 지켜온 ‘홈’이라는 공간이 절실했습니다.
자매는 각자 다른 삶을 택해 고독하게 버티다 동시에 절망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 같습니다. 속된 말로 양쪽 다 망했습니다. 하지만 양쪽 다 좋아지는 길은 분명 있을 겁니다. 서로 상관없이 살아온 것 같지만 실은 같은 길을 함께 걸어왔으니까요. 배시는 혼자 집에 남아서 아버지와 고모를 돌봤고, 리는 혼자 낯선 도시에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크게 보면, 각자의 자리에서 가족을 돌봐온 겁니다.
그녀들이 말하는 ‘혼자서’는 정확히 말하면 ‘너 없이’일 뿐입니다. “그 짐을 함께 나눠 질 수도 있었던 ‘너’가 없어 혼자였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일 겁니다. 그런 ‘너’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너’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공간입니다.
들여다볼 용기가 좀처럼 나지 않는 마빈의 방. 그 방이 있는 집에서 빠져나가 1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리 잡지 못한 리에게 세상은 가혹했습니다. 긴 세월 두 노인을 돌보다 정작 자신을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죽어갈 운명에 처한 배시에게도 삶은 전혀 친절하지가 않았지요. 한때 좋은 감정을 가졌던 사람과는 가정을 이룰 용기를 내지 못했고, 동생과 조카들의 골수 조직은 맞는 게 없었어요. 리의 선택이나 배시의 삶이나 어느쪽이 옳고 어느쪽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느 타인보다 더 멀리 존재하던 두 여인이 이제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그 필요를 서로가 채워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뜻밖에도, 이 영화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인 마빈이 가족들의 시선을 하나로 모으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마빈의 방에 모인 가족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이 약한 곳을 향할 때 강하게 연결된다는 걸 보여줘요.
‘마빈의 방’ 자매를 보면서 관객들 의견은 여러 가지로 갈려요. 노인들은 요양원으로 보내고 두 자매가 다 집을 떠나야 했다거나, 함께 노인들을 돌보며 각자의 가정을 꾸렸어야 했다는 등 의견이 분분해요. 그런데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어요. 인생의 여정은 너무도 비가역적인 것이니까요.
분명한 건 집을 지키는 것도, 집을 떠나는 것도 결국은 삶을 이어가려는 몸부림이었다는 거예요. 그 수많은 몸부림들 곁에서, 손을 내밀면 잡아줄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이 절박했지만 청할 데가 없었다는 사실도 분명해요. 자매들의 젊은 시절에는 나름대로 버티고 견뎌낼 힘이 있었을 거예요. 언제고 돌아가 쉴 집이, 보살펴줄 가족이 필요할 때, 기꺼이 그 집이 되고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 ‘우리’를 세심하게 만들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더 이상 가족과 연락하지 않는다는 친구에게, 그런데 ‘마빈의 방’을 보았다는 그 친구에게, 정말 가족이 필요할 때 다시 연락하면 될 거라고, 가족은 언제든지 너의 손을 잡아줄 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마음속에서 가족이 죽고, 집이 폐허가 되었을 때, 그때 손 내밀 수 있는 거리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었으면 해요. 그게 내 친구가 소개한 ‘마빈의 방’을 보고 난 내 마음이에요.
영화 칼럼니스트 동그란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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