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최초 베토벤 소나타 녹음…“선언문이 아닌 존경의 기록” [검은 클래식]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협연 위해 첫 내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하얀 건반 위로 검은 손이 춤을 춘다. 무수히 많은 음표들은 때론 물처럼 흐르고, 때론 바람처럼 어루만진다. 길고 짧은 음표들로 독특한 리듬감을 만들다가도 정적 속으로 밀어넣는다. 정통적이며 모험적이고, 예술적인 창의력이 번뜩이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스튜어트 굿이어(46). 그를 따라오는 수사가 많다.
‘동세대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 한 명’(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이자 ‘하나의 현상’(로스엔젤레스 타임스), ‘아프리카계 음악가’ 최초의 아이콘이기도 한 스튜어트 굿이어가 한국을 찾는다. 로열 콘서바토리 상주예술가(2021년)를 지냈고, 뉴욕 필하모닉, 시카고 심포니, LA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 악단과 협연하는 음악가이지만,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굿이어는 한국 방문을 앞두고 가진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한국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많이 들었다. 첫 한국행이 무척 기대되고, 가능하다면 서울 탐방도 하고 싶다”며 설레는 마음을 들려줬다.
한국 관객과의 만남에선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협연(1월 14일·국립극장)을 통해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들려준다. 그는 “거슈윈의 작품은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대한 존경(homage)을 불러일으킨다”며 “1924년의 뉴욕의 광경과 소리는 거슈윈의 조화롭고 서정적인 언어로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묘사됐다. 작품에 녹아든 젊은 열정, 낙천주의, 에너지가 시대를 초월하게 한다”고 말했다.
굿이어에게 음악은 숙명처럼 찾아왔다. 그의 음악적 토양을 만들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태어나기 한 달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긴 ‘음반 컬렉션’이 그의 우주였다. ‘20세기 최고의 록밴드’ 비틀스를 비롯해 롤링 스톤즈,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부터 베토벤,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집까지. 굿이어는 “다양한 음악적 배경을 갖는 것이 작품을 해석하거나 작곡할 때 많은 영감이 됐다”고 말했다.
“클래식 음악은 언제나 제 마음속 1순위예요. 그런데도 록 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유사성이 많아서 겉보기에 달라 보이는 이러한 음악적 경험이 구분되거나 분리되는 벽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요.”
그는 스스로를 “수줍음이 많았던 소년”이라고 회고한다. 소년에게 ‘감정의 공유’와 ‘소통의 갈망’을 가지게 한 것은 ‘음악’이었다. 굿이어는 “음악은 항상 나의 심장 박동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류에 대한 나의 사랑을 나누는 열쇠”라고 했다.
“늘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것이 힘들었고, 자라면서 극복해야할 부담이었어요. 당시 또래들이 즐겨듣는 음악을 연주하며 새로운 친구와 어색한 순간을 극복했어요.”
음악을 통한 소통은 굿이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다. 그는 “최고의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그 정점에 이르는 길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굿이어가 레너드 번스타인을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작곡가로 꼽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굿이어는 “번스타인은 유능한 소통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 친화적인 방송인(Television personality)이면서 영화, 뮤지컬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작곡가였다”며 “끊임없이 도전했고 안전 구역(comfort zone)에서 벗어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번스타인이 살아있었다면, 그는 바흐를 사랑하듯 BTS도 사랑했을 것”이라고 했다. 장르의 벽을 넘나들며 다양성을 추구하고, 음악적 모험에 두려움 없이 뛰어드는 굿이어와 닮았다. 그는 “나를 굳건하게 만드는 것은 늘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있다는 것, 정복해야 할 과제와 창조해야 할 혁신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겸하는 그는 “작곡가의 시선(lens)과 연주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들여다본다”고 했다. 피아니스트로 작품을 마주할 땐, 작곡가의 영감과 작곡 당시에 놓인 환경, 초연 때의 상황에 궁금증을 가진다고 한다. “연주자로서 좋은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굿이어가 현재 클래식 음악계에서 주목받는 것은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발군의 재능’을 보인 아프리카계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이다. 다인종 국가인 캐나다에서 성장한 점은 그가 ‘인종의 벽’을 뛰어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던 배경이 됐다.
“역사적으로 백인이 지배했던 클래식 음악계에서 아프리카계 클래식 음악가로서 활동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여정이에요. 제가 자란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다문화적인 환경이었어요. 피부색 때문에 음악가로서의 가능성이 제한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럼에도 그의 도전적 행보와 성취는 피부색으로 인해 ‘최초’, ‘최고’의 기록으로 적힌다. 굿이어는 2015년 ‘호두까기 인형’ 음반으로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최고의 클래식 음반’에 이름을 올렸다. 2012년엔 아프리카계 피아니스트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했다. 베토벤을 삶의 일부라고 말하는 그와 그의 음반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비범한 베토벤’이라고 평했다.
“사람들은 내 베토벤 녹음을 일종의 ‘선언문’으로 생각했겠지만, 나에겐 그저 작곡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의 기록이었을 뿐이에요. 빈의 작곡가 베토벤이 나와 같은 아프리카계 캐나다인 피아니스트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상상하면, 음악은 역시 보편적이며 경계가 없다고 확신하게 돼요. 전 클래식 음악계의 ‘다양성’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기를 희망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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