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정치와 국민 책임[오승훈의 시론]

2024. 1. 1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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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훈 논설위원
주권자 ‘우리 국민’이 권력주체
정치위기면 국민도 위기 책임
선거로 심판해야 혁신 가능해
국민 역할이 팬덤에 눌린 시국
비상식 정치 청산이 절실한 때
총선 선택 숙고해 증오 끝내야

미국 헌법의 첫 문장은 ‘우리 미국민은…’(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으로 시작된다. 여권에도 적혀 있다. 어릴 적 외운 첫 문단을 줄줄이 읊는 사람도 많다. 다인종 국가에서 국민의 통합, 권리, 의무, 자세, 헌신을 강조하려 할 때 그들은 ‘우리 국민(We the People)’으로 말문을 연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시작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의 영문판도 ‘We, the people of Korea…’이다.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라고 주권자를 명시했다. 국가권력의 주체가 ‘우리 국민’이다. 그래서 국가 정치의 위기는 곧 주권자, 우리 국민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 책임이 통치자만이 아니라 주권자에게도 있음이다.

정치 위기가 어찌 국민 탓이겠는가. 대통령부터 행정부와 각 정당·정파의 리더까지 위정자들의 책임이 먼저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대체 대통령이 왜 그러냐’ ‘야당 대표는 자격이 있는 것이냐’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국회의원이냐’라고, 필부들이 모여 앉아도 모두 우국지사가 되는 시국이다. 온갖 욕지거리에 조리돌림을 해도 시원찮을 화증이 쌓이는 게 정치판인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는 결단코 변하지 않는다.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여 혁신’ 운운하는 건 죄다 허언(虛言)이다. 이를 바로잡는 정치 혁신, 그게 선거를 통한 심판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해야 할 일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 6일 오피니언 면에 논설위원실(Editorial Board) 명의로 ‘도널드 트럼프와 2024년에 대한 경고’를 게재했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각 당의 후보경선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례적으로 대국민 호소문을 띄웠다. 사실(뉴스)과 의견(사설) 분리의 제작 방침에 따라 대선 때마다 지지 후보를 밝혀온 터라 애초 비판적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를 겨냥해 대통령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열거한 것은 예상한 것이지만, 그 취지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지금은 가만히 있지 말고 다시 참여해야 할 때다. 미국민은 정치적 차이, 소속 정당을 제쳐 두고 11월 선택에 숙고할 것을 호소한다”고 했다.

우리 국민의 사정이 미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국민이 군중에 압도되는 시국이다. ‘군중 심리’(1895년)를 쓴 귀스타브 르봉의 분석이 130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 더 명징해지고 있다. “앞으로 무엇이 사회의 근간이 될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건 마지막까지 통치자로 남을 새로운 세력, 바로 군중이다. 다른 권력을 모조리 흡수해버리고 어떤 위협도 받지 않으며 위세가 커지는 군중의 시대다.” 군중은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우며 다양한 자극에 쉽게 휘둘리고 과장된 감정이 극단으로 요동친다. 개인도 군중 안에 들어가면 휩쓸리고 만다. 익명성으로 인격과 책임에서도 자유롭다. 엘리트도 집단에 들어가는 순간 일개 군중이 된다. 그의 지적 능력은 집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군중을 팬덤으로 치환하면 우리 정치 세태가 더 확연하게 읽힌다. 증오·혐오 선동의 정치인과 극단의 군중이 공생하는 구조다.

우리 국민에게 윤리 도덕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군중도 우리 국민이다. 다만, 국난 극복의 저력과 지혜를 모을 줄 아는 우리 국민다운 인식과 판단을 바라는 것이다. 오남용이 심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까지 거론할 것도 없다. 그저 상식과 양식의 정치면 된다. 앞에선 국민 봉사 운운하면서 뒤론 제 잇속만 챙기는 위선, 서민 행세하면서 기득권을 챙기는 기만, 제 할 일보다 특권 뒤에 숨는 허위, 남의 눈 티끌은 보여도 내 눈의 들보는 모른 체하는 내로남불, 위법에 대한 반성보다 법탓 판사탓을 하는 몰염치, 경청하기보다 자기만 옳다는 독선, 뭐든 상대의 흠집 만들기에만 바쁜 호도 등이 상식정치에 반하는 사례다. 그런 왜곡과 음모론을 퍼뜨리며 비상식의 정치를 조장하는 선거꾼들을 이번엔 심판해야 한다.

상식의 정치라면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다. 여소야대가 되든 여대야소가 되든 다수를 앞세운 폭주도, 소수의 무기력도 줄어들 것이다. 적대적 공생의 정치가 더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국민은 무조건 옳다’는 건 그런 때다. 총선이 석 달 남았다. 두 눈 부릅떠야 할 책임이 국민에게 있다.

오승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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