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살며 생각하며]

2024. 1. 12. 11: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권석만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친구의 백발 머리·눈가 주름서
노인의 모습 보니 가슴이 아파
쉰이 되니 서른과 마흔이 그립고
일흔이 되면 예순이 아름다우리
이제 팔팔한 젊음의 문이 닫히면
여유롭고 편안한 노년의 문 열려

새해가 되어 한 살을 더 먹게 되었다. 1958년생 개띠이니 지난해에 만 65세로 국가가 공인하는 노인이 되었다. 노인은 물론 ‘어르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건만, 보건소에서 어르신께 독감 예방주사를 무료로 놓아주니 빨리 맞으시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노인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지만 나이를 숨길 순 없다. 연말에 만난 친구에게서 내 모습을 봤다. 친구의 머리에 내린 백발과 눈가의 깊은 주름에서 노인의 모습을 봤다. 친구의 늙음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벽시계는 가끔 고장이 나서 멈추기도 하건만 무정한 세월은 고장도 없다.

늙음은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들과 이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육체적 노화가 진행되면서 젊은 육체와 이별하게 한다. 아름답고 싱싱했던 자신의 신체상(body image)과 이별해야 한다. 감각·운동 기능도 떨어져 물건을 잘 떨어뜨리며 넘어지고, 기억력이나 기민성과 같은 심리적 기능도 서서히 감퇴한다. 또, 자녀들이 성장하여 독립하면서 부모 역할과도 이별한다. 자녀를 보살피고 감독하던 매니저의 역할과 이별해야 한다. 특히, 은퇴라는 중요한 사건을 겪으면서 오랜 세월 일해온 직장과 이별해야 할 뿐 아니라 동료들과도 이별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죽음을 겪으면서 부모와도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늙는 것을 두려워한다. 심리학에서는 늙음에 대한 두려움을 노화 불안(aging anxiety)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노화 불안을 경험하는 정도가 다르다. 연구에 따르면, 노화 불안이 심한 사람들은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고 자신의 외모가 늙어가는 것, 노년기에 불행해지는 것, 삶의 중요한 것들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고 한다. 이러한 노화 불안의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존재한다. 늙음이 두려운 것은, 몸과 마음이 시드는 것일 뿐 아니라 죽음이 가까이 다가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화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건강과 장수를 위해 운동과 건강식품에 집착하기도 하고 자녀와 심리적으로 유착하면서 자녀에게 의존하기도 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돈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사람은 자녀도 믿지 못해 돈에 더욱 집착하기도 한다. 때로는 정치적 이념이나 집단 활동에 과도하게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노화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어떤 대처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노년기의 삶이 현저히 달라진다.

사람들은 늙어갈수록 불행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문이 열리는 법이다. 싱싱하고 팔팔한 젊음의 문이 닫히면, 여유롭고 편안한 노년의 문이 열린다. 여러 나라의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나이와 행복의 관계는 유(U)자 곡선이다. 치열한 직장생활과 자녀 교육에 매달리는 40∼50대 중년기에 행복도가 바닥을 찍고, 이후부터 노년기에는 행복도가 증가하는 패턴을 보인다.

노년기에 행복도가 증가하는 이유는 무얼까? 미국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슨은 시간 인식이 삶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생의 후반부가 되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 미래의 성취보다 현재의 삶을 향유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노년기에는 매우 제한된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면서 관심의 범위를 좁히고 가족이나 오랜 친구들과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활동을 택하게 된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 늙음이 두려운 것은, 젊은 마음이 늙은 몸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늙음은 늦출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 피할 수 없는 늙음을 어떤 마음 자세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노년기의 삶이 달라진다. 술과 간장은 오래된 것일수록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오랜 기간 잘 숙성된 술과 간장은 맛이 순하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향도 깊고 은은하다. 잘 늙기 위해서는 심리적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 심리적 숙성은 ‘철이 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원히 살 것처럼 철없이 날뛰던 젊은 시절의 혈기를 순화하면서 인간의 유한성을 마음 깊이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물론 심리적 숙성을 위해서는 깊은 생각과 고뇌 속에서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뽀글뽀글 솟아오르는 끈질긴 집착을 달래야 한다. 심리적으로 잘 숙성된 사람은 노년기의 변화에 대한 받아들임과 너그러움이 깊어진다.

갓 서른을 넘긴 아들 녀석이 연말에 후배들을 만나고 오더니 자신이 많이 늙었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번데기 앞에 주름 잡는다더니, 가소롭다. 환갑을 맞이한 해에 요양원에 계시는 90대 노모를 찾아 뵙고 “저도 이제 많이 늙었어요” 했더니 가소롭다는 듯이 빙긋이 웃으며 귓속말로 말씀하셨다. “야, 내가 이렇게 쪼글쪼글 늙었어도 마음은 아직 이팔청춘이다. 내가 네 나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

모든 인생사가 그러하듯이, 젊음과 늙음도 상대적인 것 같다. 박우현의 시처럼, 이십 대에는 서른이 두렵고 삼십 대에는 마흔이라는 나이가 무섭다. 쉰이 되니 서른과 마흔이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하고,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하리라.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권석만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