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비치의 대항마' 야닉 시너

김홍주 2024. 1. 1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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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채항 객원기자] 2022년 9월 테니스의 영원한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의 은퇴 이후 페더러 다음으로(또는 못지 않게) 테니스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아 온 라파엘 나달(스페인) 마저 부상으로 한 시즌을 접게 되자 테니스 팬들은 드디어 ‘빅 4’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투어의 모습을 생각보다 빨리 맞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잠시 잊고 있던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적이 많을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무서운 존재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였다.

조코비치를 무너뜨린 새로운 네메시스의 등장
US오픈에서의 실격 사건, 백신 미접종으로 인한 호주 비자 거부 사건 등 생각지 못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그는 코트에 종종 발을 들일 수 없었고 그 사이 새로운 세대가 치고 올라오며 잠시 잊혀진 듯 했으나 역시 그는 코너에 몰릴수록 더욱 무서워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만천하에 입증했다. 

지난해 3개의 메이저 대회를 휩쓸며 남녀 통틀어 역대 최다 그랜드슬램 우승자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결국 세계랭킹 1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카를로스 알카라스(스페인)를 필두로 한 새로운 세대의 도전을 철저히 막아냈다. 하지만 철옹성 같은 조코비치를 흔들며 결국 그를 무릎 꿇게 만든 선수가 2023 시즌 말에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야닉 시너다. 

시너는 지난해 처음 참가한 ATP 파이널스 조별 리그에서 조코비치를 상대로 마지막 세트 타이브레이크 끝에 짜릿한 승리를 거두며 홈 팬들을 열광케 만들었고, 비록 결승전에서는 졌으나 그 다음주 열린 데이비스컵 4강전에서 다시 한번 조코비치에게 승리를 거두며 조코비치를 상대할 수 있는 새로운 적수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는 복식 경기에서도 조코비치를 상대로 만나 또 한번 승리를 거뒀는데, 복식까지 따지면 2주 사이 무려 4번을 만나 3번을 이긴거나 다름 없으니 조코비치 입장에서는 페더러와 나달 외 없을 거라 믿었던 새로운 네메시스의 등장에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게 됐다. 

유망주에서 새로운 리더로 급성장한 불꽃같은 1년
시너는 나이에 비해 빨리 투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일찌감치 차세대 주자로 임명된 바 있다. 매년 꾸준히 성장하며 그의 세계랭킹 또한 자연스럽게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왔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엄청난 존재감을 지닌 선수로 거듭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좋은 의미로 연습 벌레이자 성실하고 착실한 선수, 더군다나 코트에서조차 차분한 매너를 지녔기 때문에 그의 성장이 사실 주목받지 못한 감도 없지 않다. 

2020년 연말 랭킹 37위에 이어 만 20세가 갓 지난 2021년 벌써 5번째에 이르는 단식 우승 트로피와 함께 2000년대 생으로는 처음으로 톱10에 진입,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이탈리아 패션 매거진의 표지 모델을 장식하는 등 화제를 모았지만 아직 스타 선수급은 아니었다. 2022년 3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8강에 오르며 톱 선수로의 입지를 굳혔고, 특히 US오픈 8강에서 새로운 라이벌 알카라스와 무려 5시간 15분에 걸친 마라톤 경기를 펼치며 그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선수로 각광 받았다. 하지만 세계랭킹 15위대 수준이었던 시너를 세계랭킹 1위까지 오른 알카라스의 적수로 여기는 팬과 미디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꾸준히 성장해 온 그는 2023년 자신의 기량을 더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윔블던에서 생애 첫 그랜드슬램 4강에 올라 이탈리아 선수로는 드물게 잔디코트에서 대활약을 펼치며 멀티 플레이어의 자질을 입증했고, 7번 투어 대회 결승에 올라 이 중 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등 종횡무진 높은 수준의 기량을 뽐냈다. 특히 마스터스 1000 시리즈였던 내셔널뱅크오픈에서의 우승은 그가 큰 대회에 어울리는 선수라는 점을 명백하게 입증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홈 코트인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시즌 마지막 대회 ATP 파이널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데이비스컵 대회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며 에이스로서 톡톡히 역할을 수행, 자국 이탈리아의 47년만의 대회 우승을 이끌며 2023년 시즌 막판을 화려하게 마무리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조코비치를 상대로 단식에서 무려 2승을 챙기며 입지를 단단히 한 것이야말로 그가 2023년 시즌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스키 꿈나무’ 야닉의 성장기
시너는 화목한 가정 하에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적 환경에서 자란 엘리트형 선수에 가깝다.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에 가까운 이탈리아 북부 이니첸이란 소도시에서 태어난 시너는 어릴 적 테니스와 스키를 포함 이탈리아의 국민 스포츠인 축구도 겸하며 운동을 벗삼아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스트리아계 부모를 둔 그는 인근 스키장 내 레스토랑에서 셰프와 직원으로 일하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스키에 먼저 입문했는데, 스키에 두각을 나타내며 자칫 잘못하면 스키 선수로 성장할 뻔 했다. 

8살이던 해 전국 유소년스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국가대표급 선수로 일찌감치 두각을 보였고 12살 때까지 이탈리아 대표 선수로 활약하며 그가 성인 스키 선수로 성장할 것을 의심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부모님과 당시 그를 가르치던 코치 역시 그를 스키 선수로 키울 의향이 컸다. 하지만 그는 스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했던 축구와 테니스를 병행하며 다양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두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에게 테니스는 1순위가 아니었다는 점인데, 12세까지 스키 선수로 활동하며 이때까지도 테니스는 스키와 축구에 이어 3번째로 좋아하는 운동에 그쳤고, 심지어 1년간은 아예 라켓도 잡지 않을 만큼 등한시 했다고 한다. 

그가 여러 운동을 계속 접하며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길 바랬던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다시 라켓을 잡았고 전문 테니스 코치의 지도 하에 돌이킬 수 없는 테니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13살이 되던 해 테니스에 오롯이 집중하겠다는 결단과 함께 스키와 축구는 과감히 접게 되었다. 1순위가 아니었던 테니스를 선택한 배경도 신기한데, 우선 자신의 기록과 싸우며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스키보단 상대와 맞붙으며 실수를 해도 회복이 가능한 테니스를 차츰 선호하게 되었고,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테니스가 팀 스포츠인 축구보다는 자신에게 더 잘 맞는다는 것을 나이가 들며 깨닫게 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한다. 13살이면 아직도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기 바쁜 나이인데, 자신의 성격을 파악하며 진로까지 고민한 그가 보기보다 얼마나 큰 어른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테니스를 선택한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심한 부모는 그의 성장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했는데, 바로 이탈리아 남부 보르디게라로 이사를 가며 이탈리아 테니스의 거장 리카르도 피아티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조코비치를 비롯, 이반 류비치치(크로아티아), 리샤르 가스케(프랑스), 밀로스 라오니치(캐나다) 등의 코치로 활약하며 그들의 성장을 도왔고, 마리아 샤라포바(러시아)의 멘토로서 그녀의 커리어 후반기를 함께했던 전설적인 코치이자 이탈리아의 대표 지도자인 피아티의 품에 안긴 시너는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 체계적인 훈련과 이를 대하는 엄격한 신념이 결합되며 본격적인 테니스 선수로서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다. 주니어 시절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였고, 스키에서 테니스로 본격적인 전환을 이룬 시기가 그리 길지 않았기에 눈에 보이는 결과에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에 매진하며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와 코치의 선택이었겠지만, 주니어 대회 참가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고 심지어 단 한번도 주니어 그랜드슬램에 참가하지 않는 등 주니어 시절 남들과는 매우 다른 행보를 걸었다. 대회 참가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주니어 시절 최고 랭킹 또한 133위에 그친 바 있다. 

그와 그의 팀은 연습으로 다져진 실력을 바로 성인 무대에서 결과로 보여주었다. 테니스 선수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지 3년만에 프로 무대에 도전장을 내민 그는 17살이 되던 해 다수의 챌린저 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보다 앞서가던 주니어 선수들을 단번에 앞지르며 이탈리아테니스협회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2019년 18살이 되던 해 톱100 진입과 넥스트젠 파이널스 우승, ATP 신인상 수상까지 초고속 성장과 함께 화려하게 비상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선수가 됐다. 이 모든 것이 스키에서 테니스로 전환한지 불과 5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이뤄진 성과라는 점, 특히 아직 완성되지 않은 10대 시절에 이룬 업적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믿기 힘든 역사가 아닐까 싶다.

시너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앞서 말한대로 시너는 코트 밖에서 화제를 몰고 다니는 스타성을 지닌 선수는 아니다. 인기가 테니스 선수의 척도라면 매 경기마다 뉴스거리를 제공하는 벤 쉘튼(미국), 프란시스 티아포(미국) 또는 홀게르 루네(덴마크) 보다 그는 한참 아래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코트에서 이야기하며, 오롯이 실력만으로 팬을 만드는 재주가 누구보다 뛰어난 코트 위의 마술사다.

시너가 초창기 테니스 팬들 사이 화두에 오른 가장 큰 이유는 알카라스와의 신 라이벌 구도 때문인데, 알카라스 역시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착실한 이미지로 유명하고 코트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스타일인데 이 점에서 알카라스와 시너는 접점이 있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이들이 대결을 펼치는 모든 경기가 그 해 최고의 경기로 뽑혀도 무방할 정도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데, 놀라운 점은 지금까지 7번 만나 시너가 상대전적 4승 3패로 우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대생 선수들 중 너무나 독보적인 독자노선을 걸어가고 있던 알카라스의 대항마로 시너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투어 입장에선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그동안 이탈리아 코치와 함께했던 그는 2022년 중반부터 새로운 변화를 도입했는데, 자신과 함께했던 피아티를 비롯한 모든 코치진과 결별하며 레이튼 휴이트(호주), 안드레 애거시(미국), 시모나 할렙(루마니아)의 코치로 유명한 호주 출신의 대런 카힐을 새로운 코치로 추가 영입,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인 것이다. 시모네 바뇨찌와 함께 더블 코치 체제를 유지 중인데, 2023년 성적만을 보면 매우 성공적인 변화가 아니었나 싶다.  

시너가 투어에서 가장 유명한 코어 팬들을 보유한 점은 또 다른 특이한 점인데, 일명 ‘당근 보이즈(Carota Boys)’로 불리며 늘 당근 코스튬을 뒤집어 쓰고 나타나는 5명의 마니아들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이 당근으로 무장한 이유는 바로 시너의 빨간 곱슬 머리가 당근의 빨간색과 비슷해서라는 다소 황당한 이유도 있고, 그가 몇년 전 비엔나에서 열린 경기의 체인지 오버 도중 간식으로 당근을 먹은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한다. 그들은 지난해 로마 마스터스에서 처음 등장해 3번의 그랜드슬램에 모두 얼굴을 비추었고, US오픈에서 시너와 대면하며 골수 팬으로 인정받았다. 

시너는 빨간 머리와 여리고 귀여운 외모 때문에 ‘여우’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한데, ‘빨간 여우’ 이모티콘은 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아직도 축구를 좋아하는데 AC 밀란의 팬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실 본인이 골수 팬이라기 보다는 가장 친한 친구가 워낙 AC 밀란을 좋아해서 본인도 같이 응원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팬이 됐다고 한다.

코로나 기간 팬들에게 자신 또는 다른 이탈리아 유명인의 얼굴을 본 딴 피자를 만들어 사진을 올리도록 주문했고, 사진 1장당 10유로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며 이탈리아 내 의료기기 수급에 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지난해 중순까지만 해도 80여만명에 그쳤던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이제 130만명을 넘어 설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포스팅이 테니스 또는 스폰서와 관련된 사진일 정도로 그는 철저히 테니스와 함께 살고 있는 전형적인 테니스인 중 한 명이다. 아주 가끔 올라오는 일상 사진 역시 초대 받은 행사에서 찍은 사진 또는 잡지 화보일 정도로 사생활을 철저히 봉쇄하며 살고 있다. 

야닉 시너는 한 시즌이 끝나고 매년 선정하는 ATP 시상식 중 2003년부터 무려 19년 연속 페더러가 독차지 해 온 ‘ATP Fan Favorite’상을 2022년 나달에 이어 처음으로 차지했다. 알카라스도 차지해보지 못한 이 상에 시너가 이름을 올렸다는 점은 그가 이제는 스타급 선수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실력과 인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22살의 청년 야닉 시너의 찬란하게 펼쳐질 앞으로의 나날을 응원한다.

글= 김홍주 기자(tennis@tenn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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