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가 탐독한 '금지된 책'...완독에 10년 걸려도 불멸하는 이유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글을 씁니다.
1950년대 최고의 섹스 심벌이었던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1922)를 읽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다. 무척 진지한 표정이라 단지 사진을 위한 연출 같지가 않다. "설마 ‘율리시스’를?" 이런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먼로가 '율리시스'를 정말 읽었는지를 조사해 본 학자도 있었다. 먼로는 이 두꺼운 책을 가지고 다니며 아무 데나 펼쳐서 보기도 하고 가끔은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율리시스 애독자들이 좋아하는 독서 방법이다. 정말 즐겼던 모양이다.
이 경우는 한 여배우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라고 보기 어렵다. 소설 ‘율리시스’는 지적인 수준이 아무리 높다 해도 읽어내기 어려운 작품으로 유명하다. 영문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이나 박사 학위 소지자라 해도 이 작품을 읽어내는 일은 거의 10년이 걸리는 프로젝트였다. 한국에도 그런 예가 있다. 2002년부터 한국 제임스 조이스 학회에 소속된 전국의 교수들과 학생, 아마추어 애호가들이 모여서 함께 이 작품을 읽었다. 그것이 111회째인 2012년에야 끝났다.
한국 독자 완독 도울 새 번역본 나와
필자가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한국어와 영문으로 출판된 연구서와 해설서로 시작했다. 그런 다음 영문판과 함께 한국어 번역판을 읽었다. 속도가 더디기 짝이 없었다. 필자의 부족한 소양이 가장 큰 문제였겠지만 당시 한국어 번역판의 가독성도 심하게 낮았다. 역자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선적(線的)인 직역'을 한 것이라 한국어라고는 하지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페이지마다 10개 정도의 각주가 달려 있고, 줄은 길고 간격은 좁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페이지가 끝이 없는 벽돌책이었다. 필자가 1차로 완독한 것은 지난해 10월 말쯤이었다. 그나마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읽으며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작품 자체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소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반 독자가 읽을 수 있는 번역본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2023년 12월 문학동네에서 이종일 교수의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그동안 독자들이 완독하기 어려운 상태였음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독성을 높여 독자들이 완독할 수 있는 번역본을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전 번역본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독성이 높아졌다. 가장 큰 차이는 직역과 의역일 것이다. 한국어답게 번역하려면 어느 정도의 의역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번역은 반역이 될 수밖에 없다. 새 번역본과 이전 번역본의 해석도 아주 다른 부분이 많다. 영문판으로 읽고 싶다면 영국의 더 보들리 헤드(The Bodley Head) 출판사의 판본을 권한다. 이것이 문학동네 번역본의 판본이다. 이전 번역판은 한때 최고의 판본으로 알려졌던 1984년 게이블러(Gabler) 에디션이었는데, 게이블러의 오류가 밝혀지면서 1990년대 이후에는 거의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서양의 고전문학 작품을 읽을 때는 해설을 먼저 읽길 권한다. 그건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를 떠올려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했다고 하자. 사람들이 먼저 시작한 대화 내용을 이해하려면 ‘어떤 맥락의, 무엇에 관한 대화인지'를 알아야 한다. 서양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다. 특히 '율리시스'에는 극단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그 의식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면 아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작법 시도된 '하루 일상'
'율리시스'의 배경은 20세기 초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이다. 주인공은 레오폴드 블룸이고, 유대인이며 광고영업자이다. 이야기는 1904년 6월 16일 하루에 일어난 매우 일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어디를 펼쳐 읽어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인과관계가 분명한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모두 3부 18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의 중심에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다. 1부는 아들 격인 스티븐 디덜러스이고, 2부는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 3부는 몰리 블룸이다. 레오폴드와 몰리는 부부이지만 아들인 루디가 태어난 지 10일 만에 죽자 섹스리스 부부가 된다. 두 사람은 혼외정사를 한다. 그런 생활이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레오폴드 블룸의 의식에는 몰리의 혼외정사와 그 상대에 대한 생각이 깊이 박혀 있다. 그렇다고 이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지도 않다. 복잡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결국 서로의 사랑이 회복될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처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모더니즘 소설은 대개 결말을 열어두기 때문이다.
제목이 ‘율리시스’인 까닭은 호머의 ‘오딧세이’가 귀향하면서 겪은 모험담인 것처럼 주인공인 레오폴드가 하룻동안 아일랜드 더블린을 돌아다니며 겪은 모험담이기 때문이다. 율리시스는 오딧세이의 라틴어 이름이다. 작품 구조도 어느 정도는 ‘오딧세이’를 닮았다. 그렇다고 에피소드의 내용과 순서,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닮은 데가 없지 않지만 아주 다른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처럼 오래된 신화를 현대에 맞게 바꾼 것이다. 모든 장에는 호머의 오딧세이와 비슷한 제목이 붙어 있다. 장의 제목은 작가가 붙인 것이 아니다. 다만 작가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작품을 썼다는 것을 한 편지에서 설명한 적이 있을 뿐이다. 아주 초기 판본은 3부로 구분되어 있을 뿐 장 구분도 없다. 이처럼 읽기 어려운 작품을 독자들이 잘 읽어내려면 편집자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3부의 내용은 1, 2부에 비해 무척 다양하고 길다. 블룸은 더블린 시내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놀라운 것은 에피소드의 내용에 따라 형식과 문체를 아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문사가 배경인 7장은 마치 신문기사처럼 쓰인 짤막한 글로 구성했고, 10장은 더블린 곳곳의 수많은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잘게 나누어 썼다. 장 제목인 ‘떠도는 바위들’과 아주 잘 어울린다. 14장을 보면 영국 문학사에서 각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들 문체를 모방하여 쓰인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한국어 번역본으로 300쪽에 이르는 15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희곡이다. 이런 식으로 거의 모든 소설 작법이 시도되고 있다.
음란한 장면 때문에 출간 직후 '금서'
이 작품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잡지에 연재하다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출간된 뒤에는 곧바로 영국과 미국에서 금서가 될 정도로 저속한 언어로 표현한 음란한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표현들은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몰리의 의식의 흐름에도 많이 나온다. 몰리의 생각은 4,391단어로 쓰인 길고 긴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예스'가 등장하는데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음란성과 관련된 다의적인 단어 사용은 주인공의 이름에서 시작된다. 블룸이란 활짝 핀 꽃이고, 꽃은 식물의 성기이다. 소설에는 이런 식으로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많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라는 듯 곳곳에 숨겨 두었다. 텍스트를 곱씹어가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거기에 담긴 겹겹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가끔은 소리 내어 읽어야 그 문장의 의미가 어떤 단어와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것 가운데 중요한 단어 하나가 '스로어웨이(throwaway)'이다. 이 단어는 주로 쓰레기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경마장에 들른 블룸이 (신문을) 버리려던 것(throw it away)이라고 말하면서 ‘쓰레기’의 반전을 예고한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블룸이 우승할 말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스로어웨이라는 이름의 말에 돈을 걸어서 큰돈을 번다.
이런 장면은 하루 종일 지질한 모습을 보이는 블룸의 승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말이 승리하는 다크호스였던 것처럼. 한편으로는 자잘한 일상을 다룬 이 작품을 읽게 된 우연한 기회에 독자의 삶이 반전되기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온갖 종류의 변태적인 성행위뿐만 아니라 대단히 짓궂은 방식의 언어유희도 많다. 예를 들면 신(god)을 암시하면서 개(dog)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발표된 당시 문화계의 놀라움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강창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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