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낭만으로, 때론 벼락처럼… 세상 바꾼 ‘18세기 로맨스’[북리뷰]
한국18세기학회 지음│문학동네
볼테르 등 철학자의 연애부터
조선시대 규방 여성 현실까지
각국 넘나들며 사랑풍경 그려
오늘날 우리 세계의 풍경은 대부분 18세기에 형성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지배적 생산양식이 되었다. 국민국가가 들어서고, 제국주의가 노골화했으며, 식민 지배와 인종주의가 만연해졌다. 계몽주의가 일어서고 합리주의가 퍼져갔으며, 개인주의와 보편 인권 개념이 생겨나고, 민주주의가 싹을 틔웠다. 이에 따라 인간의 정신세계와 감정의 풍경도 크게 달라졌다.
‘18세기의 사랑’에서 이영목 서울대 교수 등 한국18세기학회에 속한 인문학자들은 프랑스와 영국,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 조선과 중국 등 전 세계를 넘나들면서 18세기 사랑의 풍경을 그려낸다. ‘18세기의 맛’(2014), ‘18세기 도시’(2018), ‘18세기의 방’(2020)에 이어 네 번째 작업이다.
18세기 동안 결혼은 가문 간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의 산물에서 낭만적 연인의 자유로운 결합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소설의 유행은 대중들 마음속에 사랑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냈다. ‘명주기봉’ 같은 한글 장편소설은 조선에서 규방 여성의 현실과 내면을 담아냈다.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 월성은 패악을 부리는 남편의 학대에 저항해서 도덕적, 감정적 우월성을 획득하고, 끝내 인격적 존중을 얻어낸다.
서양에서 소설은 낭만적 사랑, 벼락처럼 내리치는 사랑의 관념을 퍼뜨렸다. 개인 자유에 대한 열망, 신분이나 재산보다 정서 교감을 중시하는 태도, 부부가 친구처럼 우정을 나누는 동반자적 결혼의 대두와 결합해 사랑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으로 격상했다. ‘돈 조반니’에서 모차르트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구원마저 거부하는 주인공을 그렸다. 사랑의 표현을 종교적 구원보다 중시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철학자들은 ‘진정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에 몸을 던졌다. 볼테르는 연인 샤틀레 후작 부인과 평생에 걸쳐 사랑을 나누고 학문을 같이했으며, 디드로는 소피 볼랑과 30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랑의 화학을 통해 죽음 너머에서도 하나이기를 꿈꾸었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해 회화에선 페트 갈랑트가 유행했다. 페트 갈랑트는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들판이나 공원을 배경으로 사교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이는 종교화나 역사화에서 표현된 불멸의 이상보다 일상에서 나타나는 순간적, 감각적 사랑의 가치를 이상화하려는 화가들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사랑이 인간관계의 이상임을 찬미하는 목소리도 생겨났다. ‘루친데’에서 슐레겔은 말했다. “사랑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우정, 사교, 감각적 욕망과 열정,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 있어야 해요.” 이 작품에서 공허한 인간관계로 방황하던 남성 율리우스는 여성 화가 루친데를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존재의 통일성을 체험한다. 감각과 정신, 육체와 영혼을 넘어선 일체감을 맛본 것이다. 사랑은 이로써 자아의 발견과 자기완성에 이르는 최상의 수단이 된다.
사랑이 정치, 경제, 종교, 도덕을 초월하는 힘으로 인식되자 그 혁명적 성격이 드러났다. 한 인간을 신분이나 인종, 돈이나 권력보다 온전히 그 사람의 인격으로만 평가하는 세계가 열렸다. 이런 세계에서 사랑을 잘하려면 감각을 단련하고 인격을 성숙시켜 멋쟁이가 되어야 했다. 18세기에 피그말리온 다시 쓰기가 유행한 건 이 때문이다. 돌같이 딱딱한 인간이 피가 흐르는 진짜 인간이 되려면 감정적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수련 과정이 필요했다. 루소 등이 인간 본성에 따른 교육을 강조한 이유다.
그러나 사랑을 통한 자기완성의 길엔 한계가 있었다. 18세기에 번성했던 노예무역은 인종 간 결합이란 사랑의 형태를 낳았으나, 이는 식민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불평등한 형태로 전개됐다. 18세기 영국에서 인기를 끈 백인 남성 잉클과 아메리카 원주민 야리코의 이야기는 그 실체를 보여준다.
대박을 꿈꾸며 아메리카로 건너간 영국 남성 잉클은 원주민에게 쫓겨 죽음의 위협에 몰린다. 야리코는 잉클을 보고 한눈에 반해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그러나 이 낭만적 사랑의 결과는 비극이었다. 도망친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바베이도스에 도착하자마자 잉클은 야리코를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 이야기는 낭만적 사랑에 깃든 한 허위의식, 즉 식민주의적 위선과 제국주의적 폭력성을 보여준다. 여성이 낭만적 사랑의 귀결로 제시된 부르주아식 결혼에서 우울의 감옥을 발견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적 사랑의 해방적 힘을 온전히 누린 건 오직 백인 남성들뿐이었다.
18세기에 나타난 사랑은 이후 숱한 굴곡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우리 삶의 중심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낭만적인 사랑의 모습을 살핌으로써 지금 우리 가슴에서 약동하는 이 강렬한 감정과 그 한계를 더 섬세히 이해할 수 있다. 귀한 작업이 또 다른 책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224쪽, 2만 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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