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오언과 ‘승리하는 실패’의 단맛

한겨레 2024. 1. 1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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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로버트 오언의 새로운 지역공동체 실험이 이뤄졌던 뉴래너크 면방적공장 전경. 스코틀랜드의 사우스래너크셔 지방에 자리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에도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관련 정보는 https://www.newlanark.org 참조. 구글맵 갈무리

이병곤│제천간디학교 교장

헌책방에서 사뒀던 책을 뒤적거리다 흔히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일컬어지는 로버트 오언(1771~1858)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제프리 애시의 책 ‘엇박자 놓는 급진주의자들’(The Offbeat Radicals)에 담겨 있다. 영국 웨일스 출신인 오언은 공장을 관리하는 기업인으로 성장했는데, 27살 무렵 스코틀랜드 뉴래너크 마을의 방적공장을 약 25억원에 인수한다.

제프리 애시의 책 ‘엇박자 놓는 급진주의자들’ 표지. 오언에 관한 기록은 5장에 담겨 있다.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오언은 ‘어린이 노동자’들을 위한 조치를 서둘렀다. 3~6살을 위한 유아원, 6~12살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짓고, 운동장을 만들었다. 1793년 기록에 따르면, 뉴래너크 면방적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1150명 가운데 800명이 어린이였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서 온 고아들이 대부분이었고, 급식과 잠자리만 잘해줘도 감지덕지하는 상황에 내몰린 이들이었다.

오언은 2천명 남짓한 뉴래너크 노동자들에게 집을 싼값으로 빌려줬고, 질병과 사고로 고생하는 이들에게는 의료혜택이 가도록 배려했다. 저축은행을 설립해 노동자들의 저금을 관리했으며, 생활용품을 공동으로 구입하여 노동자들에게 값싼 가격에 파는 판매점을 열었다.

내가 몰랐던 오언의 놀라운 시도는 1825년 미국에서도 시작된다. 인디애나주의 땅 121㎢(약 3700만평)를 20억원에 사들여 지역 기반 협동체인 ‘뉴하모니’를 만든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3년 만에 실패로 돌아간다. 800명 정착민을 모집했는데, 부랑인이거나 범법자나 다름없는 이들이 주축을 이룬 게 패착이었다. 농업을 주로 하되 부업으로 제조업에 종사하여 자립적 협동마을을 이루려던 오언의 이상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거의 빈손이었다.

오언은 금, 은, 지폐 대신 인간의 노동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일하는 시간에 비례하는 활동에 따라 ‘노동권’(labour note)을 발행해 새로운 교환체계를 만들려 했다. ‘전국평등노동교환소’ 결성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5시간 노동과 동등한 가격’이라고 표시된 노동권을 발행해 이것을 화폐처럼 쓰자는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지역화폐도 이러한 개념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자료를 읽으면서 초상화 사진 한장 제대로 본 적 없는 오언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그는 공장을 소유한 자산가였으나, 나는 빈털터리에 가깝다. 그는 당대의 영국 귀족이나 실권자들에게 자신의 공동체 실험을 일반화할 정책 방안과 입법 요구를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나는 노동자의 권리 보장과 사회 정의가 상층 엘리트 집단에 의해 실현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오언은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이란 없다고 바라본다. 인간은 그가 처한 조건과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적응하며 성장하는 존재다. 그러하기에 노동 환경과 삶의 조건 개선,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기 위한 마을 형성에 힘을 기울였다. 사회 제도와 인간 본성은 이처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뉴래너크에서 학교가 중심을 이루는 것도 이러한 성찰에 따른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고, 협동의 정신을 실현하는 일은 새로운 정치를 필요로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교육을 통해 새로운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다. 이때의 교육은 학교를 포함하나 그것을 넘어서서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자원을 배분하며, 자치를 통해 협동적 관계를 익혀나가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오언의 저서 ‘도덕적 신세계’에 담긴 교육사상을 분석했던 교육철학자 이윤미 교수(2018)는 그가 19세기에 시도했던 개혁은 비록 당대에는 좌절했지만 “대안공동체를 통한 거대 사회의 균열과 비틀기는 작은 공동체들이 지닌, 숨겨진 거대함으로 지속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만약 우리가 공상가 같다는 말을 듣는다면, 구제하기 힘든 이상주의라는 말을 듣는다면,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수천번이라도 대답할 것이다. “바로 그렇다”고.’ 체 게바라의 말이다.

사회적 경제나 지역공동체 활성화와 관련한 올해 정부 예산이 거의 다 깎였다. 그럴수록 시대의 흐름에 ‘엇박자를 놓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실천가들에게 오언의 삶과 사상은 큰 힘을 보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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